(이론을 이해해도
살아온 삶의 중독적인 습관의 패턴이 너무 강해서
결국 그 패턴 속에서 유능함을 느낄 때 더 크게 절망적인 것 같아요.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으면’이라는 생각도 들고
이 댓글에 밑에 달린 또 댓글이 있습니다.
아는데도 습이 딸려가니까 그게 더 괴로워요.
그냥 이렇게 패턴 따라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하면서
이걸 끊을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과 혼란도 옵니다.)
두 분의 어떤 댓글인 거예요?
일단 위에 댓글하고 비슷한 맥락이 있죠.
습관과 패턴의 반복에 대해서 인지는 하고 계세요, 인지하고 계시는데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부분을 한번 들여다볼게요.
이미 아까 시작부터 관념분석의 영역으로 지금 들어가 있는 겁니다.
‘습관과 패턴의 반복에 대해서 인지는 하고 있다.’
그런데 인지하는 데서 그친 거예요.
여기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셔야 돼요.
본인이 직접 썼습니다. 글로 썼습니다.
뭐라고 썼는가?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생각
이 생각이 글을 쓰신 분의 [자기 규정]이에요.
/스스로에 대한 관념이고요.
이 관념이 현실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보통 현실이 규정을, 어떤 그 상황에 대한 규정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지만
그게 일반적인 어떤 그런 시선이죠.
전체성의 입장에서 보면
현실의 사건과 그에 대한 규정은 동시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의 현실은
그에 대한 규정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도 해요.
양방향에서 본다면.
그런데 뭐예요?
원인하고 결과라는 거는 한몸이기 때문에
원인을 만들면 결과가 나타나게 돼요.
그리고 결과를 인식하면 원인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님이 쓰신 이 자기규정은
현실에서 이제껏 계속 이래왔으니까
당연히 그에 대해서 내린 결론이 아니에요.
오히려 나의 현실을 제한하고 있는 프로그램 명령어인 것입니다.
뭐가?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았을걸’ 이 관념이
나의 현실을 제한하고 있는 프로그램 명령어인 거예요.
이 구조를 살펴보면 어떤 구조인가?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았을 걸’
‘차라리 이러이러 했으면 좋았을걸’
‘이럴 바에야 차라리 이러이러하면 좋을 텐데’
이런 구조죠.
‘이러이러해야 좋을 텐데’
무슨 얘기인지 보이지 않으세요?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뭐예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이십니까?
단순한 문장 하나에서
이 얘기가 무슨 얘기예요?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게 무슨 얘기예요?
즉 나의 행복이 무엇에 의존하고 있다는 얘기입니까?
조건에 의존하고 있다라는 뜻이에요.
여러분 근데 이 코바니 루시딩 때
이 부분을 진짜 강조하고 또 강조해서 계속 말씀드리지만
진정한 행복과 만족은 조건에 의존한 충족이 아니에요.
그건 만족이 아니라 충족이에요.
그리고 아주 중요한 것을 하나 또 아셔야 돼요.
조건에 의존한 행복이
지금 내 삶에 나타났기 때문에 나는 비관하고 있죠. 비참하죠. 힘들어 죽겠죠.
그래서 ‘차라리 이러한 사실을 몰랐더라면 적어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이렇게까지 생각할 정도로 결국 뭡니까?
내 행복이 조건에 의존해서 그 조건들이 충족될 때에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라고 여기고 있는데
충족이 안 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결국은 뭡니까?
조건에 의존해서야만 비로소 행복한 이 행복하다라는 이 관념 때문에
나는 지금 비참한 현실에 처해 있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하실래요?
여러분 어떻게 하실래요?
그냥 이렇게 죽을까요?
이렇게 그냥 좌절하고 땅바닥에 널브러져서 그냥 이렇게 죽을까요?
잘 보세요. 여러분
조건에 의존한 행복이 내 삶에 나타났다라는 사실은
동시에 무엇을 증명해 줍니까?
루시딩 로젯 공부하신 분들, 상대성에 대해서
이론반 수강하셨던 분들 여기 계시면은
이거 엄청나게 반복을 했었죠, 안 계세요?
‘넘어진 김에 동전 주워서 일어나야죠.’
아주 좋은 마음이에요.
그러나 제가 원하는 답은 이것보다는 조금 더 본질적인 형태예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조건에 의존한 행복이 지금 내 삶에 나타났다라는 사실은
상대성 동시성 전체성의 차원에서 보면은 무엇을 증명하고 있을까요?
...
내가 지금 이 순간
내 삶의 트랙에 나타난 어떤 행복의 형태가
조건에 의존해서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는 형태라면
이것은 좌절할 일이 아니에요.
이원적인 관점에서는 좌절할 일이죠. 비참할 일이고
그런데 상대성 동시성 전체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행복한 상태의 내가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일시적으로
조건에 의존해서만 행복할 수 있는 내가 나타나 있는 겁니다.
조건에 의존해서
비로소 행복할 수 있는 내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보이지 않는 그것의 상대적인 측면에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도
원만구족할 수 있는,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는 내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라는 사실의 증명이에요.
여러분 상대성 안에서 개념적인 짝을 이루면서
동시 안에, 그리고 전체 안에서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현실로 드러날 수가 없어요.
상대성 안에서 개념적인 짝을 이루며
동시에 전체성 안에 들어있지 않은 것들은
우리의 인식의 대상 자체가 아니에요.
존재할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관점 안에
메타노이아가 일어나게 된다면
관점의 전환이 일어나게 된다면
조건에 의존해야만 행복하다고 느끼는 나는
동시에 무엇과 하나입니까?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항상 행복하고 여여한 나의 증거입니다.
이 손바닥은 여기에다가 ‘조건에 의존한 행복’이라고 써보세요.
이 손바닥은 동시에 무엇을 증명해 주고 있죠?
손바닥이 있다라는 건 무엇을 증명하고 있죠?
손등이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죠.
여기에다가 ‘무조건적인 행복’이라고 적어보세요.
조건에 의존한 행복은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도 행복한 나의 뭐예요?
이 손바닥에 뭐를 증거해 주고 있어요?
의심의 여지없이 손등을 증거해 주고 있잖아요.
조건에 의존해야만 행복하다고 느끼는 나는
지금 이 순간에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는 내 안의 현실이에요.
내 안의 내면아이의 현 주소예요.
“이것은 좌절하고 비관할 일이 아니었구나.”
이것은 동시에 뭐다? 관점을 바꾼다면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도 이미 행복한, 이미 만족한,
항상 여여하게 지복에 잠겨 있는 나의 증거예요.
...
이것이 있다라는 것은
동시에 이것이 있다라는 뜻이다.
손바닥은 동시에 뭐다?
손등의 증거이다.
나의 비참한 현실은
동시에 행복한 현실의 증거이다.
(조건 없이 행복할 수 있나요?
욕구의 충족이 행복 욕구의 불충족이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인간 아닌가요?)
보통 그렇게들 생각하고 있죠.
행복이라는 그 단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셔야 돼요.
행복이라는 건
만족한 상태에서의 어떤 그 느낌을 갖다가 표현하는 건데
그렇다면 만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셔야 돼요.
여러분 안의 행복, 그리고 만족이라는 개념을
재정립하지 않는다면
이 부분에 그 수수께끼를 풀 수가 없습니다.
(왜 상대성이 한쪽만 느껴질까요?)
그러니까 인간 의식은요.
나라는 정체성이 굳어지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는
이원적으로 작용을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면 애당초 그렇게 작용하기 위해서 나타나는 것이고
그래서 뭐 잘못된 건 아닙니다.
잘못된 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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