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론을 보겠습니다.
/만일 범부 중생들이 32상 80종호의 부처님 형상을 무시하고
32청정 행을 닦지 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룬다하면
스스로 부처종자를 죽이는 일이다.
물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세계는 일체상이 끊어져서 허공과도 같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 자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지는 않는다.
우리 범부 중생들은 말을 하면 그 말을 쫓아다닌다.
그리고 거기에 매달려 전체를 보지 못하고 헤매인다.
법신은 본래 상이 없으므로 무상 무주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니
무상, 무주라는 말에 집착하여 또 다른 마음의 상을 일으켜
단멸상의 미궁 속에 빠져드는 것이다.
부처님의 세계는 본래 색성이라고 해도 걸리지 않고
색성의 세계가 아니라고 해도 걸리지 않는다./
다시 법문 보시면,
/수보리야 네가 만일 이런 생각을 하되
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모든 법이 단멸했다고 말하는가 한다면
이런 생각도 하지 말지니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법에 있어서
단멸상을 말하지 않느니라./
예, 옛날에 해인사에 큰 사건이 한번 있었는데, 그게 무엇인가하면, “해인사에 도인이 났다.” 이래서 아주 온 해인사가 그리고 전체 한국불교가 많이 흥분하고 시끄러웠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도인이라고 하는 스님은 한번 자리에 앉으면 일어날 줄을 몰라요. 그냥 며칠이고 꼿꼿하게 허리를 채운 채로 앉아 있는 거죠. 그래서 모든 신도들이 다 법당에 참배하는 것 보다는 그 스님이 앉아 있는 선방 쪽으로 절을 하고 환희심을 내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소문이 금강산에 있는 석두라고 하는 은사스님한테까지 소문이 전해졌어요. 은사스님은 진짜 이놈이 공부가 되어서 아주 꼿꼿하게 앉아 있나 싶어서 석장을 짚고 금강산에서 해인사까지 갔던 모양입니다. 가서 몇 바퀴 돌아보더니 그냥 가지고 있던 주장자, 짚고 다니던 주장자를 어깨를 내치면서, “어디 혼은 빠지고 막대기만 앉아 있구나.” 해서 내쫓아 버렸다고 그랬어요.
앉아 있는 흉내, 그러니까 참선하는 흉내를 하면서 정신은 어디 다, 멍청한 상태로 앉아 있는 수가 많습니다. 사람들 보면, 그 순간은 또렷또렷한 의식으로 깨어 있어야 되는데, 깨어있지 못하고, 그냥 멍청한 상태, 그게 일단은 편할 수도 있어요. 그냥 정신이 나간 상태로 허황하게 앉아 있으면 편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참선은 아니고,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을 찾는 공부가 아니다. 이 말이죠.
단멸이라는 말은 아무것도 아닌데 떨어지면 단멸이라고 말해요. 무기공에 떨어졌다. 이러거든요. 우리가 공부한답시고 앉아있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혼이 바깥으로 나가버린 상태에서는 공부가 안되지 않습니까. 애들도 마찬가지고. 우리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거든요. 우리가 천수경 외운다던가 금강경을 읽으면서도 정신이 거기 탁 집중해 있지 않고, 자꾸 엉뚱한 생각하고 정신은 온통 돌아다니는 거요. 그게 바로 단멸상에 떨어지는 거요.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얘기를 하자면 남전참묘라 이런 말이 있어요. 옛날에 남전이라고 하는 큰스님이 계셨는데 그 제자 조주라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아, 그 두 분에 얽힌 얘기인데, 한번은 남전스님이 계신 그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 들었기 때문에 동당서당으로 선방을 따로 짓고, 동쪽에서도 스님들이 참선을 하고, 서쪽에서도 참선을 했어요. 두 패의 스님들이 열심히 정진을 했는데, 쉬는 시간에 가끔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고양이가 동쪽에 갔다가 서쪽에 갔다가 왔다 갔다 하는데 스님들은 심심해서 그런 것인지, “저 고양이는 우리 고양이다.” 동쪽 사람은 동쪽 고양이다. “동당의 고양이다.” 서쪽에 있는 스님들은 “저건 서양의 고양이다. 우리 거다.” 고양이 한 마리를 놔놓고 시비를 해요. 한 날은 아주 대판 시비가 벌어졌습니다. 그 꼴을 남전이라고 하는 스님이 조실스님이 떡 보고는 기가 차서 그냥 동당 서당 스님들을 다 불러 모아놓고 고양이 덜미를 쥐고는 “한마디씩 일러라.” 만일에 이르지 못하면 내가 이 고양이 목을 베리라. 이랬어요. 한마디 해봐라.
“만약에 진리다운 말을 한마디 하면 내가 고양이를 살려주겠지만, 너희들이 고양이 한 마리 가지고 싸우는 그 자태를 보니 꼴이 말이 아니다. 만약에 너희들이 하는 말이 시원찮거나 말하지 못하면 나는 단칼에 이 고양이 목을 베어버리리라.” 이렇게 말했어요. 대단히 무서운 말이죠. 아무도 내 고양이다. 네 고양이다 할 때는 말이 많더니, “한마디 일러보라. 진리에 대해서 한번 얘기해 보라.” 할 때는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스님이 약속대로 가지고 있던 단도로 목을 잘라버렸어요.
자비문중에서 어떻게 고양이 목을 칠 수 있을까?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나중에 저녁때가 되었는데, 남전스님의 수제자 중에서 조주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조주스님이 원주소임을 살았는지 장에 갔다 오는 시간에 그 일이 벌어진 거요. 그래서 원주 시장 갔다 온 수제자 조주를 보고 얘기를 했습니다. “낮에 그러그러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없이 고양이 목을 잘랐다. 조주, 너 같으면 어떻게 했겠노.”
내가 고양이 목덜미를 쥐고 물었는데 너 같으면 어떻게 했노? 그러니까 조주스님이 그 말 듣자마자 바로 돌아서서는 현관문 들어와서 신발을 벗어놨던 모양입니다. 돌아서서는 신발을 그냥 머리에 이고 문을 열고 그냥 박차고 나가버렸어요. 그 모양을 보고 은사인 남전스님이 “하하 참으로 안타깝도다. 저 조주가 낮에 있었다면 고양이의 목숨은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말해요.
아니 짚신, 벗어 놓은 신발을 머리에 이고 나갔는데, 그게 어떻게 고양이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일이 되겠는가 이 말이오. 생각을 계속 해봐야 돼. 이런 것은 일종의 화두입니다. 그런 얘기를 듣고도 “스님, 귀신 씨나락 까먹는 그런 얘기를 합니까?” 무시해보면 단멸상에 떨어지는 겁니다. 생각해 봐야 되요. 화두라는 것은 끊임없이 생각해 봐야 되요. “왜 그럴까? 왜 그럴까? 왜 그럴까?” 이게 깨어있음 이거든요. 예. 한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왜 조주스님이 짚신을 머리에 이고 나갔는데, 그의 스승 남전스님은 “저 조주가 있었다면 고양이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씀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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