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들으면 크게 오해할 수가 있는데요
복 중에 보시복이 제일입니다, 복 중에.
보시 많이 한 복은 이거는 말할 수가 없어요.
왜그러냐 하면 보시를 많이 하면 그건 받을 일밖에 없거든요.
복을 많이 받으면 그건 괴로울 일 밖에 없구요.
보시를 많이 하면 좋을 일 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게 있어요.
복 많이 받는 거 절대 좋아하면 안 되요.
보살은 첫째가 불수복덕이에요. 복덕을 안 받아요.
금강경 저 뒤에 나오거든요. 불수복덕, 복 받으면 보살이 아니에요.
복을 받지 말아라.
그럼 어떻게 하느냐? 짓기만 해요.
보살은 복을 짓기만 하지 받지는 않아요.
복 받는 게 뭐냐? 세력 부리고, 잘난 거 내세우고, 돈 많은 거 내세우고, 이게 전부 머리 좋은 거 내세우고, 인물 좋은 거 내세우고,
이게 복 받는 겁니다.
복은 받으면 없어져요.
즉, 복이라는 건 뭐와 같으냐 하면
/복이라는 것은
하늘로 쏘아 올린 화살과 같다/
하늘로 쏘아 올린 화살과 같아서
얼마나 힘을 써서 쏘느냐에 따라서 올라간 높이가 다르거든요.
이게 복을 짓는 겁니다.
얼마나 복을 짓느냐에 따라서 그 받는 양이 다르죠.
받으면 없어지는 거예요. 복은.
화살이 다 올라가면 다시 떨어져요.
금강경 5과에 화살비유가 많습니다.
세력도 높아지면 떨어지고요, 인물도 잘생기면 금방 없어져 버려요.
천하에 어리석어서 머리 좋은 것도 몇십 년 써먹으면 그거 못 써요.
옛날 머리가지고 오늘날 살려고요? 어림도 없어요.
지식이라는 것도 생명이 아주 짧아요.
옛날 지식 가지고 절대 내세우지 마세요. 바보 되는 거예요.
30년 전, 20년 전 지식은 오늘날에 쓸 데가 없어요.
그걸 알아야 해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복이라는 것은 받으면 없어진다.
그러니까 보살도 지혜를 실천하는 이 구도자들은
짓기만 하고, 받지를 말아야 해요. 불수복덕이라.
불수복덕이에요. 복덕을 받지 말아야 해요. 항상 짓기만 해야 한다.
화살로 보면 계속 달려만 가지 안 떨어지는 거와 같은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계속 달려가냐? 자꾸 지으니까.
복을 계속 지으니까 안 떨어지는 거 아니에요.
그게 무주상 보시거든요. 무주상.
무주상이라는 건 안 받는다, 이 소리예요.
보시라는 건 계속한다, 이거에요.
보시복덕이 굉장히 좋은 건데 이걸 반야로 돌리지 못하고 그냥 받으면
그걸 간단히 말해서
우리나라 조선조 초에 함허 큰스님이 금강경 서리를 내셨는데
그 서리에 뭐라고 했느냐하면
보시라는 시, 복 복, 시복이라고 그랬어요. 시복.
보시 복이다, 이 말이죠.
또 반야수행을 깊이~~하는 복을 경이라는 경, 복 복, 경복이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이 보시한 시복이 경복 보다 못하다, 이 말이지
보시 복, 자체가 못하다 그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첫째로 보시행을 닦아야 하거든요.
/보시행을 닦아야 나를 고통에서 구제할 수 있다./
부자 되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요.
행복해지려면 보시를 많이 해야 해요.
부자되는 사람하고 행복하게 사람하고는 달라요. 뭔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부자 되려면 돈만 많이 벌어야 해요. 그건 부자예요. 부자.
그런데 행복하려면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워야 하는데 그러려면 보시를 많이 해야해요.
보시 많이 한 사람은 절대 공포가 두려움이 없습니다.
보시 안하고 재산만 많이 가진 사람은 그냥 두려움이 많아요.
그래서 잠자는 그 방은 좋은데, 꿈자리는 나빠요.
그래서 잠자리는 좋은데, 꿈자리는 나쁘다,
그래서 돈 많은 사람은 잠자리만 자꾸 좋게 만들지, 꿈자리가 어떨지는 생각을 못하는 거에요.
그래서 잠자리도 좋고, 꿈자리도 좋으려면 보시를 많이 해야 해요.
그게 행복입니다. 보시 안하고는 행복을 얻을 수 없어요.
그래서 부자하고 행복하고를 혼동하거든요.
행복은 보시에서 오고, 부자는 어디서 온다? ㅎㅎ
돈 많이 버는 데서 오거든요.
그거 아주 중요한 거예요.
부자되면 잠자는 방은 잘 꾸밀 수 있지만, 꿈자리는 보장할 수 없다.
악몽에 시달려서 좋~~게 방꾸며 놓고, 불면증에 걸려서 얼마든지 고통받을 수 있고, 그런 겁니다.
시복이에요.
그런데 그것보다, 금강경을 수행한 공덕이 더 높다, 이 얘기입니다.
보시복이 나쁘다, 그게 절대 아니에요.
놋쇠가 다른 무쇠보다 좋잖아요.
그런데 그 놋쇠라 하더라도 순금하고는 바꿀 수 없다. 이걸 말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제.. 비유를 하나만 더 든다면
내가 사진을 엄청나게 많이 찍었는데요, 한량없이 많이 사진을 찍어놨는데
그 사진하고 이 몸하고 맞바꾸자 그러면 바꾸겠습니까?
신체와 영상을 바꿀 수 있겠느냐 이거에요. 영상.
영상은 사진이거든요.
사진을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히 꽉 차게 찍었고,
온갖 그림을 항하사 모래알 숫자와 같은 항하사가 있고, 그 많은 전체, 갠지스강의 모래알 같은 세계와 같은 삼천대천 세계에 꽉 차도록
내 이 몸을 그림도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하더라도
그런 그림이나 그런 사진하고 자기 몸뚱이 하나하고 바꿀 수 있겠는가? 이 말이에요.
그거 못 바꾸잖아요.
그런 겁니다. 이게.
공부라는 게 이런 거예요.
그게 참나라는 게 그런 거예요.
영상과 신체는 바꿀 수 없다.
그러면 자기를 찾지 않고 왔다 갔다 허둥대는 거는 영상만 쫓아가는 겁니다. 신체를 저버리고.
그러면 비유에서 난데, 그건 사진과 비유하니까 신체이지만
세상하고 비유하면 나거든요.
나가 뭐냐? 간단한 거죠.
“나를 찾으러 어디로 간다” 그거 아주 우수운소리예요. 나를 어디서 찾아요. 그냥 난데.
그럼 나가 뭐냐?
내가 지금 보는 거, 그게 납니다. 보고
내가 지금 듣는 게 납니다. 듣고
내가 지금 말하는 게 나에요. 말하고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게 납니다. 생각하고
내가 이렇게 손도 움직이고 발도 움직이고, 움직이는 게 나에요.
내가 항상.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이것이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것이
명상이고, 참 공부다./
이를 찾아들어가는 게 그게 명상입니다. 그게 참공부예요.
만날 내가 하는 게 그건데, 보기는 만날 보는데, 보는 대상만 쫓아가지,
그 보는 내 마음은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영상만 쫓아가지 내 몸은 버린다.
그러니까 하늘을 보면 저 하늘이 좋다는 것만 알지 하늘 누가 보느냐?
이건 몰라요.
저 하늘이 아니라 내 마음이에요. 저게요.
경에서 이걸 가르치는 겁니다.
기신론이라는 그 논에서도,
/삼계만법이 유심소작이라_ 온 우주는 오직 이 한 마음이 만든 것이다.
이심이면 즉무육진경계니라_ 마음을 떠나면 색성향미촉법,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게 없다. 마음을 떠나면 곧 육진경계가 없다.
심생즉 종종법생이요_ 마음이 일어날 때 하늘도 일어나고 땅도 일어나고 다 생겨난다.
심멸즉 종종법멸이라_ 마음이 사라지면 하늘도 땅도 다 사라진다./
사람을 이렇게 봐도 그게 내 마음인데 사람인 줄만 알지 내 마음인 줄은 꿈에도 몰라요.
이게 미했다는 겁니다. 그게 술에 취한 겁니다.
이거 한번 보세요.
이게 이렇게 보이면 이게 뭐죠? 뻔히 알아도 이게 뭐냐고 물으면 대답을 안 하더라고요.
망신 당할까 봐, 그걸 아집이라고 그러고요, 욕심이에요.
평소에 마시던, 찻잔입니다 하면 될 건데, 저게 무슨 수가 있나 싶어서 말을 안 해요.
이걸 그릇이라고 딱 보는 순간에
2가지 모르는 게 있는데요,
한 가지는 요 그릇만큼 요게 허공입니다.
그릇만 봤지 요만큼 허공이라는 걸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 그릇으로 보든, 허공으로 보든 요게 내 마음입니다. 이걸 몰라요.
그래서 무엇을 보더라도 그 보는 게 내 마음인 거예요.
그걸 깨닫는게 불교수행이에요.
심외무법이라, 일체유심이라. 이걸 깨달아요.
마음밖에 법이 없다. 일체가 오직 마음이다.
이게 수행입니다.
그냥 이거를 말로 듣고, 말로 넘기면 그냥 독송에 불과하고
이걸 찾는 거예요. 찾는 게 수행이에요.
일체유심이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죠?
일체가 오직 마음이다.
일체유심, 오직 유, 마음 심.
심외무법_ 마음밖에 법이 없다.
법이라는 건 뭐요? 사람도 법이고, 만물, 만법이 이거거든요.
만물이 만법이니까 법은 모든 존재이지요.
모든 존재, 사물, 심외무법이에요, 마음밖에 법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중생은 뭘 보든지, 듣는지, 그걸 자기 마음이라는 걸 꿈에도 모르는 거예요.
그걸 미했다 그래요.
그래서 마음을 하나 떡 밝혀 놓으면
저 하늘도 내 마음이요, 땅도 내 마음이요, 사람도 내 마음이요, 내 마음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오불견공이라_ 깨달은 사람은 허공을 보지 못한다.
적조가 함허공이라_ 그 적적히 비추는 마음이 허공을 다 삼켰다.
전부 경에서 말하는 게 이런 겁니다.
그걸 보는 게 관경, 경을 보는 거고, 그걸 닦는 게 수행이에요.
그걸 닦으려면 어떻게 닦느냐? 간단하죠.
우리가 대화하는 걸 보면, 전부 남 얘기만 해요.
저 북한산에 가니 어떻더라, 산 얘기만 하고,
물건 얘기, 남 얘기만 합니다. 자기 얘기는 없어요.
그럼 자기가 없으면 물건도 없고, 자기가 없으면 사람도 없는데
자기는 만날 접어두는 거예요.
참 이게 어리석기 짝이 없는 거예요.
남 쫓아가다 자기 버려.
그 남 얘기 할 여가가 어디 있습니까? 나를 찾아야지.
나를 어떻게 찾냐?
보는 게 나이고, 듣는 게 난데, 이게 도대체 이 보는 나를 모른다, 이거예요. 듣는 나를 모르고.
그러니까 늘, 화가 나면 ‘화내는 이것이 무엇인가?’
그러면 스트레스 안 받아요.
화가 나면요, 화를 참으면 병 나요.
참지 말고 딱 화나는 걸 느끼면 화내는 이게 뭔가? 하면 스트레스 안 받아요. 그게 수행이에요. 그냥 날아가 버려요.
누가 미우면, 미운 거 참으면 병나는데
미움을 느끼는 순간에 ‘이 미움을 느끼는 이것이 무엇인가?’
항상 ‘이것이 무엇인가?’
무서우면 그걸 피하지 말고, ‘그 무서움 느끼는 이것이 무엇인가?’
이게 숙달되면 이것 빼고, “이 뭐냐?”
“이 뭐꼬”라는 게 그렇게 마지막에, “이거 뭐냐?”
“이것이 무엇인가?” 처음에는 이렇게 정확하게 해야 해요.
“미운 이것이 무엇인가?”
“아, 저 사람 저렇게 하지만, 내가 참는다” 이러면 병나죠.
“미운 마음이 일어나는 이것이 무엇인가?”
“아, 무섭지만 겉으로는 안 무서운척 해야지” 그럼 병 나는 거에요.
그럼 “무서움을 느끼는 이것이 무엇인가?”
괴로움을 느낀다 그러면 “괴로움 느끼는 이것이 무엇인가?”
이게 수행이라고요.
그러면 한순간만 그렇게 해도, 단 1초만 해도, 그 공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남 얘기 100년 한 것보다 낫습니다.
물건 얘기 천년 한 것보다 나아요.
그게 수행공덕이라는 거죠.
남 얘기 억만년을 해봐야, 나한테는 아무 소득이 없는 거예요.
물건 얘기 억만년을 해봐야 나한테 아무 소득이 없는 거예요.
보는 이것이 무엇인가?
듣는 이것이 무엇인가?
말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생각으로 뭘 판단하는 건 이건 아니에요, 그건 윤회이고,
생각하는 그 자체를 참구하는 그게 수행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속는 거예요.
“아, 그건 참 좋은 것이다.” 이거는 판단이에요. 그건 수행이 아니고 윤회입니다.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수행을 할 때, 생각을 꺼내놓으면 맞아요. 그건 판단이란 말이죠.
수행이란 ‘것이다’가 아니고, ‘것인가?’ 이렇게 참구해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여기서 헷갈리는 거죠.
아무리 좋은 생각을 해도, 그것은 그림자에요.
몸통이 아니라고요. 그건 사진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진은 보이고 몸통은 안 보이니까, 항상 사진 속에 헤매고 다니는 게 중생이에요.
“아 극락세계가면 얼마나 좋을까” 이건 전부 사진입니다.
“극락을 발언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이게 수행이에요.
그러니까 요즘 우리 마음 씀씀이를 보면
만날 남의 얘기만 하고, 안 그러면 그냥 곯아떨어져서 자고, 이게 전부입니다.
이런 건 천년을 잡아도 날 못 찾고, 만년을 남의 얘기해도 날 못 찾아요.
그럼 “잠자는 이것이 무엇인가?”
이 1초만 해도, 천년동안 남 얘기한 거 그거와 비교할 수 없는 거죠.
수행공덕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예요.
그러면 수행이 그냥 되나? 아니에요.
복을 많이 지어야 하거든요. 보시 많이 해야 해요.
보시하지 않고는 수행이 절대로 안 돼요.
욕심이 그냥 막, 화산처럼 폭발하는데 어떻게 수행이 됩니까? 그게.
그러니까 부자 되는 길, 행복하게 사는 길, 길이 달라요.
부자 되려면 욕심을 많이 내야 해요.
욕심 없이 어떻게 부자가 됩니까? 절대 안 돼요. 그거는.
그런데 결론은 부자는 돼요.
그런데 행복할 수는 없다.
행복하려면 보시를 많이 해이 해요. 보시를.
또 보시를 많이 한 사람은 이 수행길에 들어가게 돼요.
지옥에 빠져있는데 무슨 수행을 합니까? 안 되는 거예요, 그거는.
길이 있어요.
사람 몸 받았을 때, 부지런히 정진해요. 복 받을 생각하지 말고, 복 지을 생각만 해라.
복은 받으면 없어진다,
그게 잘 사는 길이에요.
힘 쓸 생각하지 말고, 힘을 자꾸 좋게 써라, 이거예요.
복을 자꾸 지으면 된다.
짓되, 복 받는데 절대 멈추지 말고, 계속 나를 찾는 노력을 해라, 이게 복과 지혜를 함께 닦는 거거든요.
나를 찾는 건, 지혜를 닦는 거고, 자꾸 보시는 것은 그것은 복을 닦는 건데요.
보시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복을 받지 말아야 해요. 짓기만 하되 받지 말아야 해요.
내가 다 써버리면 보시할 여력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게 아주 잘 사는 거예요.
짓기는 많이 짓는데, 내가 전부 다 써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복을 어떻게 짓습니까? 못 지어요.
그래서 역대로 보면 돈은 할아버지들이 훨씬 더 많이 버는데
역대로 보시한 분들은 전부 할머니들이에요.
할아버지들은 70이 넘어도, 죄지어서 감옥 가는 거 많이 나와요.
할머니들은 좋은 일 했다고 그런데 많이 나고, 감옥 갔다는 얘기 안 나오거든요.
왜 그렇겠어요, 그게?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보시를 해야 한다, 이 말이죠.
복을 적게 받아서 그래요.
할아버지들은 복을 자꾸 받으려는 경향이 많아요.
그 복받는 게 그게, 좋게 사는 게 절대로 아니거든요.
자꾸 보시하고, 또 보시해서 끝나면 그건 놋쇠밖에 안 된다, 금이 안 된다.
그래서 나를 찾는 수행을 자꾸 하는게
첫째는 금강경을 읽고
또 자꾸 쓰고
거기서 더 들어가서 아까 얘기했던 그런 수행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이것이 무엇인가?”
하루에 1분씩만 해도요, 몇 생을 산 공덕보다 높은 거예에요. 이게요.
천년을 살아도 맨날 남 생각만 하고 물질 생각만 하면 1초 그 수행한 공덕도 못 따라가는 거예요.
수행 공덕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겁니다.
자, 그러면 요거 한 번만 딱 읽고 오늘 마치겠습니다.
<금강경> 제 11장 무위복승분 _무위의 복이 수승하다.
수보리 여항하중소유사수여시 사등항하
어의운하 시제항하사 영위다부
수보리언 심다 세존 단제항하 상다무수 하황기사
수보리 아금 실언 고여 약유선남자선녀인 이칠보
만이소항하사수 삼천대천세계 이용보시 득복 다부
수보리언 심다 세존 불 고수보리
약선남자선녀인 어차경중 내지 수지 사구게 등
위타인설 이차복덕 승전복덕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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