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가 100억화신 지혜광명이다.
그래서 오시고, 되시고, 드시고 이게 전부 화신이거든요.
100억화신 지광이라.
그러면 이런 성불이 있고, 그다음에 뭐가 있냐?
일체중생이 있어요. 삼세제불이 있고.
이렇게 지혜광명을 몸소 얻으신 분을 삼세제불이라고 그러고
이런 지혜광명을 얻지 못하고 경계에 끌려다니고 생각에 끌려다니는 것을 일체중생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러면 삼세제불이나 일체중생이 다 어디서 나왔냐?
다 마음에서 나왔다.
한 생각이 잠들면 중생이 되고
한 생각이 깨어나면 제불이 된다.
모든 부처님이 된다. 이게 불교에요.
그래서 이것을 일체유심조라 그래요.
일체라는 말은 그런 지혜광명을 얻은 삼세제불,
과거현재미래 모든 부처님을 반야심경에서 삼세제불 이러거든요.
그러면 일체중생도 삼세제불도 전부 마음에서 나왔다, 이게 일체유심조거든요.
그래서 한 마음이 밝아지면 삼세제불이 되고
한마음이 잠들면 일체중생이 된다.
전부 마음에서 나왔다, 이거예요.
그래서 깨닫고 못 깨닫는게 전부 마음에서 나와서
마음을 잘 닦아서 깨달으면
그 중생의 고해를 버리고, 이게 이고죠.
깨달음의 즐거움을 얻는다, 이게 득락이죠, 얻을 득, 즐거울 락.
이게 이고득락離苦得樂이에요. 불교는.
못 깨달으면 그게 아무 상관이 없으면 하지만
미혹한 고통이 있거든요.
또 깨달으면 깨달은 즐거움이 있어요.
고통이 그냥 오는 게 아니라 미혹해서 온다고요.
그래서 모기가 환한 불을 보고 거기 뛰어 들어가서 타죽거든요.
그러면 그 불이 뜨거운 줄 모르고 들어간단 말이에요.
뜨거운 걸 모르는 게 미혹이죠.
처음에는 좋은 거라고 취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괴롭더라.
경에 보면 그런 말이 있어요. 비유로.
어떤 사람이 산에 가서 누런 금을 하나 보고
그걸 보자기에 싸서 집에 가지고 왔는데
금인 줄 알고 가져왔는데 나중에 보니 누런 독사였다.
그래서 이 독사가 돌아다니면서 집안을 막.. 해서 아주 괴로웠다.
보기는 봤는데, 독사를 독사로 보지 못하고 황금으로 본 거,
이게 미혹이에요.
이 젊음이 오래가는 게 아닌데, 오래가는 것처럼 보는 것
그게 독사를 황금으로 보는 거와 똑같은 거죠.
내 생각이 오래가는 게 아닌데
그 생각에 의지해서 그냥 막 주장을 하는 거.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나면 바뀌는데 그때는 창피해서 ㅎㅎ
내 생각이 잘못됐다는 말도 못 해요.
이게 미혹한 고통이거든요.
그러면 깨달았을 때, 거기에 엄청난 광명이 있고, 자유가 있고, 기쁨이 있다.
이런데 전부 마음에서 온다 이거예요.
그래서 미혹한 번뇌망상에서 나오는 것은 중생이고
반야에서 나오는 것은 제불인데
중생의 어머니는 독사를 황금으로 보는, 그걸 무명이라고 그래요.
맑은 눈이 없는 눈이다.
중생의 어머니는 무명이에요.
또 제불의 어머니는 뭘까요?
부처님에게도 어머니가 있거든요. 그걸 반야라고 그래요. 반야.
그래서 삼세제불은 의반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렇게 설명해요.
중생은 무명에서부터 온갖 미세한 번뇌가 나오고
또 그다음에 거친 번뇌가 나와서 그 번뇌망상으로 생사윤회가 펼쳐지고요
삼세제불은 그 반야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어요.
그럼 아버진 누구냐?
불교에서는 그 어머니를 먼저 대단하게 쳐요.
부처님의 어머니는 반야에요.
반야는 생모다, 불모다.
그럼 부처님의 아버지는 누구냐?
방편이라고 그래요.
그 방편으로 많은 공덕을 닦지 아니하면, 그 반야가 제대로 자라지를 못해요.
그래서 방편은 제불의 아버지요, 반야는 제불의 어머니다.
그럼 중생의 어머니는 무명이라고 그랬죠?
그럼 중생의 아버지는 뭐냐?
탐애라고 그래요. 탐하고 애착하는 거.
이 탐애에 의해서 중생이 다 속박을 벗어나지 못해요.
탐애가 끊어지면 무명은 힘을 못 써요.
무명은 자라지 못해요.
그러니까 그 어머니만 혼자 달랑 있으면 아이가 보호가 안 되듯이
탐애가 끊어지면 무명이 힘을 쓰지 못하거든요.
그러듯이 이 반야도 방편으로 많은 공덕을 닦지 아니하면
반야가 자라지 못해요.
이래서 삼세제불과 일체중생이 펼쳐지는데
이게 전부 마음인 거예요.
그래서 이쪽으로 가면 삼세제불이 되고
반대로 가면 일체중생이 되고
이게 일체유심조죠.
그래서 부처님은 마음의 본래 지혜광명을 얻었다.
그걸 깨달음이라고 한다.
경에서 이렇게 가르쳐요.
그리고 화엄경 세주묘엄품에 보면
부처님의 깨달음을 여러 사람이 칭찬하고 찬탄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이런 성도제일 성도법문을 하는 것도 이게 전부 부처님 찬탄이에요.
부처님 깨달음을 찬탄하고, 부처님 깨달음을 신봉하고, 부처님 깨달음에 대해 예경하고
이런 거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도 그 깨달음의 종자를 심어서
이 순간이 보이지 않는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게 불교의 원융인연이라고 그래요. 원융인연.
원융인연이라는 것은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있고.
전체 없는 하나 없죠?
또 하나 없는 전체 없는.
전체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 떠나서는 없거든요.
이걸 원융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그 깨달음의 공덕이 위대해도
조그마한 한두 개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오늘 저녁에 서울 갈 텐데, 안 잘 거예요. 서울 가요. ㅎㅎㅎ
목적지에 도달하면 그게 그냥 간 게 아니라
여기서부터 한걸음서부터 시작하는 거죠.
그럼 한 걸음 한 걸음이 서울까지 가는 거거든요.
그렇듯이 여러분들 다 성불 안하려야 안할 수가 없는데
하나가 있으면 전체가 다 있게 되거든요.
그러면 이 순간 이 인연으로 성불하게 돼요.
하나가 있으면 전체가 이루어진다.
이게 불교에요.
그러니까 깨달음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이 순간순간에 있다. 하나하나에 있다.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을 신봉하고 또 예경하면서
한순간 한순간 인연을 지으면, 그 한순간 한순간이 전체의 깨달음을 이루어 간다.
요렇게 가르치는 게 불교에요.
재미있죠? ㅎㅎ
그러니까 먼 목적지만 생각하지 말고
지금 한 걸음 출발할 때.
그래서 발심과 성도가 똑같다는 거예요.
성도가 위대하면 발심도 위대하다.
발심은 마음을 일으킨 최초의 인연이거든요.
성불은 완전히 결과를 이룬 구경인연이라고 그래요. 구경.
그래서 최초와 구경.
구경열반, 이런 거 있잖아요.
그거는 최후 마지막이라는 소리예요.
그래서 최초 없는 구경이 없죠.
부처님에게 예경 한번 하는 순간에 그게 성불인 거예요.
그게 최초인 동시에 그게 예경이고, 그게 하나하나 부분인 동시에 전체다.
저는 이렇게 성도법문한 인연으로 성불하고
여러분들은 성도법회에 참여한 인연으로 성불해서
자타일시 성불도, 저나 여러분이나, 여러분이나 저나 자타가
다 한날한시에 성불하는게 이게 불교거든요.
박수 안 치세요? ㅎㅎ
막상 또 박수 치시니까 멋쩍네요, 멋쩍어. ㅎㅎ
그러면 실지로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멀리 가는 게 아니고요, 그런 말씀이 있어요.
선어록에서는 어떻게 가르치냐?
적육단신, 우리 몸을.
붉을 적, 육단신, 근육덩어리 몸. 근육 육, 덩어리 단, 몸 심.
붉은 근육 덩어리 몸에, 근육덩이라 우리 몸이잖아요. 붉은 우리 몸이잖아요.
적육단신이잖아요.
여기에 無位眞人무위진인이 있다. 지위 없는 참사람.
지위 없다는 이 말은
이건 아버지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고 애들도 아니고
옛사람도 아니고 지금 사람도 아니고 동서남북도 아니고 지위가 없어요.
참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이 몸안에 늙고 병들고 죽고 오고가고 하는 이런 적육단신말고
본래 면목이 있다. 이렇게 가르쳐요.
무위진인, 본래면목.
이건 어머니아버지가 주신 면목이고, 또 내가 자라오면서 만들어진 면목인데
이건 출생면목이고 성장면목이고 노쇠면목인데
이런 면목 말고 세간면목 말고, 본래면목 나의 본래 모습,
그래서 무위진인 본래면목
지위 없는 참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세상에 나와서 진급하고 출세하려고 애를 쓰는데
내 몸 안에 지위를 다 떠난, 참사람이 있다.
무위진으로 돌아가면
높은데 일부러 올라가 애쓸 필요가 없어요.
그렇잖아요.
낮은 사람 없으면 높은 사람도 없는 거예요.
그게 원융이거든요.
학생 없으면 교사도 없는 거예요.
을이 없으면 갑도 없어요.
원융진인을 모르고 거기서 그냥 헤매는 것에요.
원융이요, 진 참사람이다.
나의 본래면목이 있다.
그래서 세간면목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본래 면목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경전에서는 이걸 오온신상이라고 그래요.
몸, 색수상행식, 생각과 육체가 합쳐졌다, 이걸 오온이라 그러거든요.
이걸 몸 모습이라고 그럽니다. 몸 신, 형상 상,
오온신상에 무량수불이 있다.
수명 없는 부처님이 여기 들어있다 이 말이에요. 무량수불
또 지광명불이 있다. 지혜광명의 부처님이 여기 들어있다.
무량수불, 지광명불이 우리 오온을 떠나서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이에요.
이게 꽃송이를 떠나서 봄이 있는 게 아니고
파도를 떠나서 바다가 있는 게 아니다.
그 파도 속에 바다가 있는 거고요
봄철에 핀 꽃송이 속에 봄이 있다, 이거예요.
그래서 우리 몸은 한송이 꽃과 같고, 한 방울 파도와 같은데
거기에는 바다가 있고, 봄이 있다.
그걸 무량수불 지광명불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그걸 몸소 얻고, 분명하게 얻으면 그걸 깨달음이라고 그런다.
이제 슬슬 마쳐야 하는데요, ㅎㅎ
요 정도 법문 듣고 만족하시겠어요?
아.. 이거 만족 안하면 큰일인데 ㅎㅎ
만족 안 해도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이왕이면 만족했으면 좋겠어요 ㅎㅎ
그런데 지금 그 우리 몸에 무량수불, 우리 몸에 지혜광명의 부처가 과연 지금 어디 있냐?
어디 있냐 이거예요.
그걸 어떻게 가르치느냐 하면
참 기가 막히게 가르쳐요.
夜夜抱佛眠 야야에 포불면이요, 밤마다 그 부처님을 내가 안고 잠이 들고
朝朝還共起 조조에 환공기라, 아침마다 아침마다 그 부처님과 함께 일어나고
起坐鎭常隨 기좌에 진상수라, 앉을 때나 일어날 때나 항상 그 부처와 내가 함께 따라다니고
語默同居止 어묵의 동거지라, 말을 할 때나 말을 하지 않을 때나 항상 함께 머물고
그렇게 가르쳐요.
如身影相似 또 여신영상사야, 몸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데, 그림자는 때로는 보일 때도 있고 안 보일 때도 있잖아요.
안 보인다고 그래서 그림자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몸과 그림자와 같아서
纖毫不相離 섬호불상리라, 아주 가느다란 털끝만큼도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럼 도대체 어디 있냐?
欲識佛去處 욕식불거처, 그런 지광명불 무량수불, 본래면목, 무위진인이 지금 어디 있냐?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지금 내가 말을 하고 있는데, 요 말소리에 있다.
말 한번 해볼까요?
여러분.. 똑같이 옴 자 한번 내봅시다.
오옴~~~~~~~, 오옴~~~~~~~, 오옴~~~~~~~
그게 부처님인 거예요.
거기에는 일체중생의 번뇌망상도 있지만
그 삼세불에 제불의 지혜광명이 있어요.
옴을 말한 그 소리에 들어있는 지혜광명을 확실히 증득하면
그걸 깨달음이라고 그런다 이거죠.
그럼 어떻게 하면 증득하냐?
좋은 인연 많이 닦고
자기 지혜를 닦으면 되는데요
지혜를 닦는 방법은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요 마음, 요것이 무엇인가?
이걸 으흠...
攝心-返照섭심반조라고 그래요.
저 밖으로 흩어지는 마음을 거둬들인다. 섭심. 거둬들일 섭, 마음 심.
온~~~갖 세상으로 흩어지는 마음을 거둬들여서
돌아본다. 이게 반조에요. 돌이킬 반, 비칠 조
밖으로는 좋은 인연 많이 지어서 공덕을 닦고
안으로는 마음을 거둬들여서 자기 마음을 돌아보면
그것이 깨닫는 길이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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