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중도론24. 이것이 참된 위빠사나 수행이다. 관찰만하지 말고 맘껏 즐겨라!

Buddhastudy 2023. 6. 14. 20:20

 

 

 

5. 관찰하고 즐겨라.

 

생각을 관찰하여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

이것을 일러 위빠사나라 한다.

그러데 위빠사나에 대한 한 가지 빠진 게 있다.

바로 즐기는 것이다.

 

 

생각을 관찰하는 이유가 뭔가?

생각이 일어나는 방향 자체가 실존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생각은 나를 분명히 하려고만 한다.

그러다 보니 수십조 개의 생명(세포)으로 이루어진 몸뚱이와

여기서 발생하는 무수한 정보의 이합집산을 통틀어 나로 규정한다.

그리고는 피조물이니 중생이니 하면서 무상함과 고해를 토로한다.

바로 한 줄기 생각에 얽히고설켜 만들어낸 기가 막힌 허상이다.

 

이런 이유로 위빠사나에서는

생각을 관찰하여 그것이 만든 다의 허상에서 탈피하려 한다.

대단한 설득력있는 수행 방법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아쉽게도 반쪽짜리이다.

 

 

1) 오감을 깨워라.

수행의 목적은 결국 실존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기에 생각이 만든 허상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존의 성향을 살펴 그것을 깨울 수 있는 것도 필요하다.

 

실존이 나를 찾다 삼라만상을 늘어놓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실존의 해석이다.

실존이 해석한 것이 정보의 형태로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실상은 움직임이 없다.

오고 가고 멈추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

 

제논의 패러독스를 보면

세상에 움직일 수 있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당의 선승인 승조 역시 물불천론을 주장했다.

만물은 움직임이 없다는 것인데, 그가 읊은 시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돌개바람이 산악을 뒤흔드나 항상 고요하며

강하가 다투어 흐르나 흘러감이 없다.

말이 먼지를 흩날리며 들판을 질주하나 움직이는 것이 없고

일월이 하늘을 지나지만 돌지 않는다.

 

왜 움직이는 것을 뻔히 보면서 움직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

얼핏 보면 말장난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실제로 움직임이 없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우리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들은 사실상 5차원 점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점은 위치는 있어도 면적이 없어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현상계에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은

점과 점이 연결된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실존의 해석에 의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가령 TV 화면 속의 화소는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화면엔 다양한 움직임이 일어난다.

실제는 움직임이 없지만 점과 점을 연결해 마치 움직임이 있는 것처럼 꾸며낸다.

 

이처럼 삼라만상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실존이기에

오고 가고 멈추는 게 없다.

오고 가고 멈추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은

실존이 그렇게 해석을 함으로써 정보의 다발이 만개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는 여래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여실지견이다.

 

아무튼 실존이 정보를 일으켜 삼라만상을 수놓았다.

왜 그런 것일까?

어떤 뚜렷한 의도에 의해 발생한 건 아니다.

그런데 창조 현상과 동시에 실존의 감상이 일어난다.

실존이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비추고 있는 상태

이것을 불교에서는 열반이라 한다.

열반은 실존의 창조성에서 나온다.

 

, 이제 왜 관찰하며 즐기라고 하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바로 열반의 상태에 가까워지면

그 속에 실존의 감상이 배어나기 때문이다.

선지식들이 적멸만 하고 비춤()이 없으면 불교가 아니다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관찰은

부정적인 생각들을 멀리하는 수동적인 방법이고

즐기는 건

실존의 열반에 접근해 저절로 우러나오게 하는 능동적인 방법이다.

 

두 방법 다 중요하다.

그렇기에 위빠사나만 하지 말고 틈나는 대로 즐길 필요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즐기는 것이 최상일까?

사람에 따라 상대적이기에 답은 없다.

다만 오감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찾아보면 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 주목하라.

이 다섯 창구를 통해 5차원 실존이 자신이 꾸며낸 세상을 감상하고 있다.

따라서 오감의 어느 하나라도 극대화할 필요가 있다.

평상적인 만족을 넘어 탄성이 우러나올 정도의 희열을 느낀다면

부지불식중 실존은 깨어난다.

하지만 대부분은 탐진치로 인해 그만큼의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

 

혹자는 오감에 집중하거나 도취하는 건 일종의 착이 아닌지 우려할 수 있겠다.

착에 해당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착엔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나를 분명하게 하기 위한 착이 있고

두 번째는 대상을 감상하기 위한 착이 있다.

후자는 창조의 목적에 해당하기에 제대로만 감상하면 5차원의식이 발현된다.

 

예술의 경지에 이런 현상이 즐비하다.

그래서 화가는 불법이 없어서 깨닫지 못하고

스님은 불법이 있어서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인생을 더할 나위 없이 즐겁게 산다면

그 역시 수행자이다.

그래서 원효는 그토록 일탈을 즐겼던 것일까!

 

 

2) 정보를 나누어라.

필자는 어려서부터 불법에 관심이 많았고

나름 이런저런 서적을 통해 수행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스무 살 무렵에 관음보살님을 친견했는데

가피를 입어서인지 그 자리에서 견성을 이루었다.

 

이후 일주일 동안 나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가 된 건 아니다.

나는 완전히 없지만 그렇게 없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을 진아, 불성, 절대, 해탈.. 등의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부절처럼 딱 맞지가 않아 꽤 어색하다.

 

아무튼 당시 나는 나가 사라짐으로써 실존에 대한 자각을 하였다.

이제 전지만 더해지면 대각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우매한 필자는 그러지 못했다.

사실 당시엔 견성이나 성불에 대한 뚜렷한 개념도 없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대각을 위해 정진했던 기억이 나지만

선방의 스님들에 비하면 참으로 궁색한 수행이었다.

그러다가 30대 중반에 이르러 오대산에서 주로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실재하는지도 의문인 비로자나불을 먼발치에서나마 친견하는 천운을 맞았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면서 고차원 세계에서 펼쳐지는 역사에 대해 눈을 떴고

내친김에 천국지라는 소설로 역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특별히 어떤 수행에 매진한 것도 아닌데

어느 시점부터 5차원 실존이 되어 버렸다.

평소와 다름 없이 지냈을 뿐이데

어느날 저절로 그냥 깨닫게 된 것이다.

곰곰이 이유를 살펴보니 그건 비로자나불로부터 가피를 입었던 덕분이다.

 

가피가 무엇인가?

그건 정보를 나누는 것이다.

비로자나불을 친견함으로써 당신께서 지닌 5차원 실존의 정보가 고스란히 나의 심연에 전해졌고

그것이 쌓이고 쌓여 저절로 깨우침을 얻게 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의 수행은 관음보살님의 친견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수행을 나처럼 어떤 대상에 의지해서 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득보다 실이 클 수 있어서 대개는 이런 방식을 금하고 있다.

자력이나 타력이니 운운하며 경계를 하지 않던가.

하지만 수행의 속성을 깊게 이해하면 자력과 타력의 구분은 성립하지 않는다.

 

수행의 근간은 정보의 나눔이다.

그것을 스스로 고차원에 올라 이루든

아니면 고차원 존재와 어울리면서 이루든 상관없다.

 

그 유명한 맹모 삼천지교도 있지 않은가.

출가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속세와 다른 좋은 수행문화가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차원 정보를 얻기 위해 도담을 하고, 설법을 듣고

선각자들이 남긴 어록을 들춘다.

그러면서 선을 통해 직접 깨달음의 사냥에 나서기도 하고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보다 높은 차원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일은

수행을 빠르게 진전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다.

 

 

존재라는 것은 결국 정보의 이합집산에 의해 있는 것처럼 보여질 뿐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와중에도 정보가 엄청나게 섞이고 변화하고 있지 않은가.

부싯돌을 비벼가며 불을 붙이려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하지만 이미 타오르는 불길을 옮겨 가는 것은 쉽다.

그렇듯 불보살님들의 5차원 정보를 나누는 건 다다익선이다.

 

그러니 염불을 하거나 진언을 할 때

어떤 덕을 보려는 생각을 지우고

그저 정보를 공유한다는 생각으로 하는 편이 좋다.

 

정보를 섞고 나누는 마음으로 불보살님들을 찾는다면

보다 수월하게 통신이 되어 가피를 입게 될 것이다.

 

그리고 수행자들은 자신이 이룬 경지를

물론 세존처럼 대각을 이루진 않았어도 세상 사람들과 나누는 것도 중요하다.

정보는 고착될수록 그 기능을 못하게 된다.

 

흐르는 물이 맑고 깨끗하듯

정보는 흘러야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정보를 나누는 것에 소홀해선 안 된다.

 

금강경에 온 세상을 가득 채울 만한 칠보를 보시하는 것보다

불법 몇 구절을 다른 사람에게 일러 주는 공덕이 크다라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세간에는 기이하게도

깨달았다는 자들이 정보를 나누는 것에 매우 인색한 광경을 쉽게 목격한다.

심지어 제자들이 다른 고급 정보를 얻지 못하도록 대놓고 방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고로 가르침의 문호를 폐쇄하거나 협소하게 해서

제자들 위에 군림하려는 수행자를 일컬어 마군 또는 마구니라고 불러왔다.

사실 정보를 혼자만 독점하려는 자는 각자는 고사하고 수행자도 아니다.

 

그저 깨달음을 이용해 사람들의 영혼을 홀리고 옥죄려는

어리석은 중생일 따름이다.

 

세존은 모든 중생이 자신과 같은 붓다가 되기를 발원했고

예수는 모든 인류가 죄업에서 벗어나 자신과 같은 진리적 존재가 되기를 소망했다.

 

이처럼 깨달음은

절대평가 등의 마음에서 우러나와

높고 낮음의 구별 없이 다 함께 어우러지는 데에 있다.

 

이런 대동세계의 첫 단추가 바로 정보의 나눔이 아니던가!

 

아무튼 이런 원론적이고 당위적인 얘기를 떠나서

정보를 섞고 나누는 것 자체가 커다란 즐거움이다.

왜냐, 삼라만상 그 자체가 정보 덩어리이고

여기서 파생된 정보가 이합집산하는 가운데

창조의 가치와 보람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본서에서 고급 정보를 습득했다고 판단되면

그것의 물꼬를 터 흘러가게 하라.

우리는 다 함께 깨달음의 길을 가야 한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근본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