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의심과 왜곡
분별은 논리적으로 의심해 들어가면 그것의 뿌리 약화된다
그래서 수행은 오로지 의심삼매여야 한다.
의심의 궁극까지 가서 의심이 없는 경지를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의심이 쉬운 것 같지만 몇 발짝 들어가다 보면 주저앉기 일쑤이다.
지와 혜가 바닥나서 그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왜곡의 함정에 빠지기 때문이다.
왜곡이 무엇인가?
그건 논리의 부재를 말한다.
간단히 말해 논리가 있으면 의심이고 논리가 없으면 왜곡이다.
그래서 논리가 탄탄하면 정도이고 논리가 허술하면 외도이다.
얼룩을 지우면 바탕이 드러나듯이 외도를 바로 알면 정도가 분명해진다.
외도는 태생적으로 논리를 꺼린다.
왜냐, 논리가 세워지면 자신의 거짓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도는 한결같이 논리를 부정하거나 감추려고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할까?
첫째, 권위를 이용해 서열을 정해 버린다.
이렇게 되면 논리보다는 일방적인 훈계나 가르침 쪽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런 사람들의 언어 습관을 보면 붓다와 중생, 영력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 같은 분별적 용어에 익숙하다.
둘째, 예전에 한 사이비 교주가
“내가 누구인지 알아? 바로 우주를 걸어다니는 사람이야”라고 했떤 말이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이처럼 모든 언어가 자신의 존재를 돋보이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가령 피아노와 바이올린, 플롯이 있을 때 악기들은 저마다의 특성이 있어
우열을 가릴 수 없다.
국어선생과 수학선생의 실력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온갖 해괴한 논리를 붙여 서열을 정하며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셋째, 감성을 이용해 논리를 희석하고 분별을 확대한다.
논리를 따져야 하는 마당에 감성적인 언행으로써 내편 네편을 따지고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며 본질을 호도한다.
대개 논리 다툼을 피하고 마치 자신이 깨달았거나 달관한 듯한 분위기로 몰고 간다.
정리하면
권위를 통한 서열
아상을 위한 논리의 수단화
감성을 통한 분별의 극대화로 정리할 수 있다.
깨달음을 논하는 자리에 이와 같은 가식과 허울, 자존심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심지어 붓다가 와도 계급장을 떼고 끝장 토론을 벌여야 하는 곳이 도판이라면 도판이다.
붓다 역시 발가벗는 마당에 어느 누가 감히 법랍과 권위를 들먹이며 고개를 빳빳이 세울 수 있는가.
태양이 뜨면 어둠은 그림자로 도망가 숨지만
오히려 자신의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만다.
그렇듯 깨달음이 휘영청 밝아오면 거짓 깨달음은 설자리가 없게 된다.
빛으로 나오면 간단한 일이지만
외도는 태생적으로 빛을 원하지 않는다.
깨달음에 대한 염원이 전혀 없는 까닭이다.
있는 것은 오로지 단 하나,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것뿐이다.
분별말이다.
그래서 빛이 밝아오면 그 빛과 어우러질 생각을 하지 않고 기꺼이 그림자를 자청한다.
근묵자흑이라고 수행자들이 외도에 물들이 않으려면 그것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자신의 스승이다.
스승을 의심하지 못하는 사람은 수행자가 아니다.
스승 된 자가 깨달았는지 깨닫지 않았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수행을 한단 말인가.
행여, 그것을 판단할 반야가 부족하더라도 하는 데까지 의심을 일으켜야 한다.
의심 없이 스승을 따르는 건 일종의 신앙이고 맹종이다.
혹자는 스승에 대한 그런 태도는 매우 불경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참된 스승은 오히려 제자가 자신에 대해 의심하는 것을 반긴다.
그래서 제자의 의심이 격해지면 더할 나위 없는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
혜가의 맹공이 이어질 때 달마의 심정은 열반 그 자체였다.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의심하라.
당신의 스승이 깨달았다면 만면에 미소가 가득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분노로 일그러질 것이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재밌지 않은가.
물론 외도는 그런 도담의 빌미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
스승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제자의 질문에 아는 것을 일러주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면 된다.
모르는 것은 시간을 두고 함께 풀어 가면 될 일이다.
어려울 것이 전혀 없지 않은가.
스승은 솔직하면 되지 무조건 견성성불 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사실 깨달음을 기준으로 하면 세상에 스승의 명패를 찰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하지만 스승의 위치에 있게 되면 깨달음의 짐 덩어리를 지게 된다.
[스승 = 깨달음]이란 등식에 의해 부지불식중 깨달음을 조금씩 꾸며내게 된다.
이것이 쌓이고 쌓여 온갖 왜곡이 비롯되었다.
그 순수했던 수행승들이 어느덧 나이가 들어 스승의 위치에 서게 되면서
외도의 가의 가식을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다.
알면 안다고 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가?
이 간단한 것 하나가 두려워 도문을 폐쇄하고 정보를 왜곡하기 일쑤이다.
스승의 진위를 판단하기 어렵다면
도문의 개폐와 정보 공유의 의지만 봐도 얼추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
아무튼 스승에 대한 의심을 점차 확대해 큰스님이나 조사, 불법이나 붓다로 넓혀 나가라.
세존이 세 명의 스승을 끊임없이 의심했던 것처럼 당신도 하라.
세존이 자신의 깨달음을 냉정하게 의심했던 것처럼 당신도 하라.
세존이 의심의 궁극에 이르러 저절로 쉬게 된 것처럼 당신도 하라.
세존의 가르침은 경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존이 몸소 걸으신 의심의 길, 그것을 쭉 따라가는 것이 수행의 첩경이면서 정도이다.
당신은 지금 이 책을 의심으로 읽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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