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09)

즉문즉설_법륜스님(제47회) 흉악범도 교화가 될까요

Buddhastudy 2010. 12. 29.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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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에서는 옳다 그르다 할 것이 없다. 이렇게 얘기 하죠. 여러분들 참 받아 들이기 어렵죠. 분명히 옳은 게 있고 그른 게 있는데 왜 옳다 그르다 하는 게 없을까? 그런데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볼 때 모든 사람들, 나만 아니라 모든 사람도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는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인식을 합니다. 자기 관점에서 본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똑같은 것을 두고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서 다르다 이 말이오. 그 자기 관점이라는 것은 자기가 살아 온 환경 영향도 있고, 문화적 영향, 종교적 영향, 가치관, 생활 습관, 윤리도덕, 관습. 온갖 것들이 다 거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세상을 본다. 음식 맛을 볼 때도 그 간을 보면서 아 이거 싱겁네. 아 좀 짜다. 이렇게 말 할 때에도 그 음식 자체가 짜다 싱겁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은 사실은 그 사람의 입맛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싱겁다 하는걸 다른 사람이 짜다라고 할 수도 있다 이 말이오. 매워 못 먹겠다 했는데 다른 사람은 이게 뭐가 맵노?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이야. 그 모든 것에서 다 자기 기준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이거는 내 관점이다. 내 입장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데. 자기 관점이 절대화 되 버립니다. 그래서 아내는 자기의 입장에서 그렇다가 아니고 이게 진리다 이거야. 이거 음식 짜잖아 이렇게 나온다 말이오. 내 입맛에 짜다 이리 말을 안하고 이거 짜다 이렇게 말해 버린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아내는 아내입장에서 남편은 남편입장에서 얘기를 하니까. 이쪽 입장에서 저쪽을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요. 몇 번 떠 먹어봐도 짠데 이걸 싱겁다니 그게 도대체 맛이나 볼 줄 아는 혀야? 그것도 혀라고 가지고 다니냐? 이렇게 된다 이 말이오. 그래서 우리의 갈등은 다 이래서 생깁니다. 남북간의 갈등도, 한일간의 갈등도, 지역간의 갈등도, 진보보수간의 갈등도, 노사간의 갈등도, 또 부부간의 갈등도, 부모자식간의 갈등도, 형제간의 갈등도 다 그래요.

 

그래서 옛말에 무슨 말이 있습니까?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옳고,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옳다. 이렇게 말하잖아. 그죠? 동네 시어머니끼리 모여서 얘기를 해 보면 며느리들이 문제죠. 나만 그리 생각하는 게 아니오. 여러 사람들이 다 그래. 그러면 이게 더 진리가 됩니다. 며느리끼리 둘러 앉아 이야기 해 보면 나만 이런 게 아니라 다 그렇게 얘기해.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문제요.

 

그러니까 북한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늘 회의를 하니까 남한이나 미국이 문제요. 우리 한국은 또 우리끼리 모여 맨날 회의를 하니까 토론을 해도 조금 차이가 있어도 늘 저쪽이 문제가 된다. 이게 이 세상의 갈등이 해소가 안 되는 원인이에요. 그러면 인간사란 이렇게 싸워야 되느냐? 그건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 관점, 자기 기준에서부터 빚어지는 거다. 이 기준을 내려 놓으면 어떠냐? 옳고 그름이 있는 게 아니고, 맞고 틀림이 있는 게 아니고, 서로 다르다. 견해가 서로 다르다. 입맛이 서로 다르다.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다. 사상이 서로 다르다. 믿음이 서로 다르다. 다른 것만 있어요.

 

그러면 다르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니까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을 해야 되요. 나와 다른 상대를. 어 저 사람이 입맛에는 짜구나. 이걸 인정하면 입맛이 서로 다른데도 다투지는 않는다. 그게 색이 공한 도리만 안다고 되는 게 아니라 공이 색한 도리도 알아야 된다. 그래서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런데 우리가 색이 공한 도리를 대부분 몰라. 그래서 늘 현상계에 집착을 해. 그래서 갈등이 일어.

 

그래서 공부를 조금 하면 색이 공한 도리만 알아. 그래서 이 세상 중생을 외면해. 그거 다 공한데 뭐 이렇게 얘기해. 그 공이 색한 도리를 알게 되면 중생의 그 짜다 싱겁다 하는 그 근기 따라 다 어떻게 한다? 짜다 하면 물 갖다 주고. 싱겁다 하면 간장 갔다 주고. 그렇게 하는 거요. 그래서 서로 다른 이 세계에서 갈등 없이 조화를 이루고 살 수 있다.

 

다 깨쳐서 다 입맛 짜고 매운 게 없어서 그저 주면 주는 데로 먹는 사람만 살아야 갈등이 없는 게 아니고. 각각의 입맛을 갖추고 있지만은 이미 그것을 알기에 우리는 맞춰서 살아 갈 수가 있다 이런 얘기요. 그러면 죄를 짓는다. 불교의 근본도리로 보면 죄라는 게 있나 없나? 없어. 없는 도리를 알아야 되. 그러면 여러분들은 아니 저 나쁜 짓을 했지 않냐? 자꾸 이렇게 생각해. 근본 죄가 있다고 생각하니 사형을 시키든지 처벌을 해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요.

 

죄가 본래 없는 도리를 알아야 되. 그러면 죄가 없는데 저 사람은 저런 죄를 짓는냐? 이런 문제요. 죄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아 그럼 사람을 죽여도 아무렇지도 않는거냐? 상관없네 죄가 없으니까. 이렇게 나와. 이게 공에 빠지는 거요. 그러니 공이 색한 도리를 알면 죄라고 할 것이 본래 없지만은 인연을 따라서는 어때요? 죄라고 이름 지어지는 게 있다 이 말이오. 옷을 입는 게 좋으냐? 벗는 게 좋으냐? 벗는 게 좋다 입는 게 좋다고 정할 수 없다.

 

그러면 아무렇게나 해도 좋으냐? 그것도 아니다. 목욕탕에 들어 갈 때는 벗어야 되며 나오면 입어야 돼. 여름에는 얇은 옷을 입어도 되고, 겨울에는 두터운 옷을 입는다. 겨울을 중심으로 하면 몸을 많이 가리는 게 좋은 일이지만은 그렇다고 여름까지도 다 가리라고 할 수가 없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그 인연에 따라서는 또 해야 할 일이 있다 이 말이오. 그래서 사람을 많이 죽인 살인자 앙골리말라도 당시의 왕은 이걸 죽여 버려야 해결이 된다 생각했는데. 부처님은 그를 깨우쳐서 해결을 했어. 악몽을 꾸고 있는 거 같은데 잠을 깨워 줬다 이 말이야.

 

쥐가 쥐약을 먹는 것은 몰라서 그렇다. 죄가 있어서 쥐약을 먹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쥐약이다 하고 가르쳐 주면 그 쥐도 안 먹는다 이거야. 그것처럼 무지에 의해서 이런 죄를 짓게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 무지를 깨우침으로 해서 그가 거기에서 벗어 날 수가 있다. 누구든지 가능하다. 가장 대표적으로 부처님이 어떤 사람을 실험으로 보여줬다. 사람을 99명이나 죽인 살인자를 보여 줬단 말이오. 누구나 다 구제가 가능하다. 구원이 가능하다.

 

그러면 이 사람은 탁 깨쳐버리면 아무 상관이 없네 이제. 그는 상관이 없어요. 정말 깨쳤다면 그는 삶과 죽음의 경지를 벗어 나 버렸어. 그런데 이 사람 말고 다른 어리석은 사람이 볼 때는 그 사람이 깨쳤든 못 깨쳤든 아무튼 살인자요 살인자 아니오? 살인자지. 그러니까 이 사람 입장에서는 원수를 갚을라 그러겠어 안갚을라 그러겠어? 갚을라 그러겠지. 그래서 그가 탁발을 왔는데 돌멩이를 쳐서 죽였단 말이오.

 

그런데 이 분이 못 깨달았으면 죽기 싫으니까 거기 저항을 할 거요 안 할거요? 하겠지만 이미 이 분은 깨쳤단 말이오. 그리고 그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해요 못해요. 이해하지. 그러니까 그 돌멩이를 맞으면서도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아무런 마음의 분별이 안 일어나는 거요. 받아 들이는 거요. 그런데 이거를 아 이 사람은 깨쳤지마는 과보를 받는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요. 알았어요?

 

그런 일이 벌어지면 벌어지는 데로 받아들이고, 안 벌어지면 안 벌어지는 데로 받아 들인다. 이런 개념이에요. 우리가 나쁜 짓을 했다 하더라도 그가 어리석어서 그런 죄를 저질렀으니 그에게도 깨달을 기회를 주는 게 좋아요 안주는 게 좋아? 주는 게 좋지. 그러니까 죽이지 말고 깨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게 중요하다. 이런 얘기에요. 이것이 불법이 가르치는 바다 이 말이오. 자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