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문제가 있데요. 자기는 일어나고 싶은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 보통 그렇게 말하죠. 그래서 몸의 유혹이라고 말하고, 몸은 수행의 장애다. 이런 말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법의 원칙으로 말하면 몸은 공입니다. 색즉시공이라 그러잖아. 그죠? 색인 물질, 몸은 공이에요. 공이라는 말은 그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성스러운 것도 아니고 부정한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니라는 얘기에요. 몸에는 아무 시비할게 없습니다. 몸 자체는.
그럼 “제가 아침에 일어나고 싶은데 눈이 안 떨어져 못 일어나는데요.” 몸이 문제인지 실험을 한번 해볼까? 총을 가지고 팍~ 옆에서 쏴버리면 10초 내로 마당에 가있습니다. 아시겠어요? 이게 몸이 문제에요? 몸은 아무 이상이 없어요. 이것도 마음의 문제요. 마음이라고 하는 여기서의 마음은 소위 업식. 업식. 업식에 끄달리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아침에 5시에 틀어놓고 ‘5시에 일어나야지’하고 잡니다. 그런데 아침에 벨이 따르릉, 5시에 울리면 이불 밑에서 “아이고, 일어나야 되는데.” “일어나야 되는데.” “일어나야 되는데.”
그런데 이게 몸이 말을 안 들어. 그래서 알기는 아는데 몸이 말은 안 듣는다. 지금 이렇게 얘기하는 거요. 저도 다 해봤으니까. 어떻게 스님이 그렇게 잘 압니까? 나도 다 해봤으니까. 그런데 이것은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우리가 반야심경 공부하지만, 조견. 조견_비추어서 싹~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이거 뭐 잘못 알고 있는 거요. ‘일어나야 되는데.’ 이 말을 우리가 다섯 번만 한번 계속 해 봅시다. “일어나야 되는데.” “일어나야 되는데.” “일어나야 되는데.” “일어나야 되는데.” “일어나야 되는데.” 일어났어요? 안 일어났어요? 안 일어났다는 거요.
일어나야 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안 일어났다는 걸 말하고 조금 더 깊이 보면 “일어나야 되는데.” “일어나야 되는데.” 이 말은 “일어나기 싫다.” 이 말이지. 맞습니까? ‘일어나야 되는 데’는 일어나고 싶다 같지마는 그런데 몸이 일어나고 싶기는 한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이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데. 사실은 “일어나야 되는데.” 라는 것은 ‘일어나기 싫다.’ 이 말이오. 그런데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이렇게 다섯 번 하면 일어날 확률이 높습니까? 못 일어날 확률이 높습니까? 못 일어날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못 일어나는 거요.
그러니까 일어나기 싫으면 어떻게 하면 된다? 자버리면 되요. 간단한 거요. 그러면 일어나야 되는데 못 일어나니까 이게 지금 질문이 되는 거 아니오. 그죠? 그러면 이거는 굉장히 손해요. 잠도 못 자고 괴롭고. 두 가지가 되는 거요. 이게 최하수요. 그냥 탁 자버리면 못 일어난 건 어차피 일어나야 되는데도 못 일어나고 자버리면 못 일어나는 건 마찬가지 아니오. 그런데 이건 잠이라도 자잖아. 자는 동안은 괴롭지 라도 않잖아. 이건 그냥 자버리는 사람보다 훨씬 하수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아침에 못 일어나서 몸에 끄달려서 수행을 못합니다. 이렇게 묻는 사람은 수행 수 자도 못하는 사람보다 하수다. 이 말이오. 밑에 수요. 높이 평가해 줄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바보 같은 짓에 속합니다. 일어나기 싫으면 자면 되는 거요. 인생은 딴 거 없어요. 일어나기 싫으면 그냥 자시면 돼. 일어나지 않으면 수행 못하지 않느냐? 그럼 못하면 되는 거요. 이 지구상에 수행 못하는 사람이 뭐 한 둘이가? 수행 안 하는 사람이 99%요. 아무 신경 안 써도 돼.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어. 안 하면 돼.
늦게 일어나면 지각하지 않습니까? 지각하면 돼. 그럼 직장에서 야단맞지 않습니까? 야단맞으면 돼요. 쫓겨나지 않습니까? 쫓겨나면 돼. 그럼 지각하는 걸 쫓아내지 누가 붙여 놓겠어요? 정토행자라서 5시에 일어나서 수행도 안하고 그러면 정토회에서 안 좋아하잖아요? 당연하지. 하기로 한 사람들이 모여서 정토회를 만들었는데 안 하겠다는 사람 뭐, 미움 살 수밖에 없는 거고. 그럼 안 나오면 되는 거지. 걱정할 거 없어. 자기 배짱대로 살면 되는 거요. 이럴 때 항상 유의해야 될게 뭐다? 과보가 따르는 거요. 아시겠어요?
야단맞는 과보. 잘리는 과보. 비난 받는 과보. 과보가 따른다. 어쨌든 자기 업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싫으면 하기 싫은 대로, 하고 싶으면 하고 싶은 대로, 할 때는 뭐가 따른다? 과보가 따라. 과보를 기꺼이 받으면 돼. 길가다가 물건을 하나 훔치고 싶으면 그냥 훔치면 돼요. 그럼 과보가 따라. 망신을 사든, 비난을 받든, 감옥을 가든, 가서 살면 돼. 그냥. 비난을 당연히 받고 감옥을 당연히 살면 되요. 그래서 ‘아이고 감옥 산다고 불쌍하다’고. 무슨 소리 하는 거냐? 남의 물건을 훔쳤는데 감옥 안 살고 어떻게 하냐? 나라도 감옥 살지.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감옥을 살면 인생엔 아무 문제가 없어요. 이걸 누가 잘했다 못했다 평가하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늦잠 좀 한두 번 늦잠 때문에 야단을 맞거나 잘리거나 감옥을 가거나 이러면 후회가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되겠지. 아~ 잠 때문에 아~ 일어날 걸. 후회가 되면 이거 괴로움이라는 거요. 그러니까 그 고통. 후회하는 고통을 안 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된다? 일어나기 싫어도 일어나버려야 되요.
앞에서 말했잖아. ‘쥐약이다.’하는 걸 알면 아무리 배가 고프든지, 아무리 맛있든지 안 먹어야 돼. 그런데 “아이고 조금만 먹으면 안 돼요? 조금만 먹으면 안 돼요? 배가 너무 고픈데요.” 그러면 먹으면 돼. 안 되는 건 없어. 대신 뭐가 따른다? 배 아픈 과보가 따르는 거요. 그때 먹으면 먹고 죽으면서 “아따 실컷 먹고 죽으니 좋다.” 이러면 아무 문제가 없어. 그런데 이럴 때 “아~ 조금만 참을 걸. 괜히 먹었다.” 이게 苦고라는 거요.
그러니까 이 과보가 더 큰 苦고다 이 말이오. 아시겠어요? 과보가 더 큰 苦고일 때는 업식에 따라가면 안 돼. 업식을 콱 거슬러 버려야 돼. 일어나기 싫지마는 콱 일어나버리고, 하기 싫지마는 확 해버리고, 하고 싶지마는 콱 멈춰 버려야 되는 거요. 왜 그렇게 한다? 더 큰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 뭐 하려고? 이익 보려고. 큰 손해 안 보려고 그렇게 하는 거요. 누굴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그러니 일어나기 싫다. 일어나 버려야 돼. 그런데 일어나기 싫은데 어떻게 일어나느냐? 그냥 일어나버려야 되는 거요.
그러니까 아침에 벨이 딱 울리면 ‘일어나야 되는데.’ 라는 생각을 일으키기 전에 일어나버려야 돼. ‘일어나야 되는데.’ 하지 말고 싹~ 일어나버려야 돼. 왜? 일어나야 되는데 하고 생각을 일으키면 이거 자체가 벌써 뭐라고? 업식을 따라가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두 번 하면 벌써 이거 더 안 돼. 그러니까 벨이 울리면 그냥 벌떡 일어나버리면 돼. 거래를 하지 말고. 일어나버린 뒤에는 어떨까? ‘일어나야 되는데.’ 라는 생각은 생길까? 안 생길까? ‘일어나야 되는데.’ 하는 생각은 안 일어났을 때 일어나는 생각이지. 일어나버리면 ‘일어나야 되는데.’라는 건 없어져버려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어요? 오늘 집에 가서 실험한 번 해 봐라.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그래서 혼자서 독방을 쓰고 잘 때는 집에서 혼자 할 때는 아침에 잘 못 일어납니다. 왜? 계속 일어나야 되는데? 일어나야 되는데? 이러다 자거든요. 그런데 이런 법당에서 100명이 수련할 때 자고 있단 말이오. 그럴 때 계속 못 일어나는 사람 있습디까? 한 명도 없어요. 불 다 켜면 무의식의 세계에서 안 일어날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이 없습니다. 아시겠어요? 옆에서 일어나면 저절로 일어나버려. 눈이 덜 떠져도 그냥 일어나요. 그래서 초심자는 수행할 때 어떻게 한다? 대중과 같이 하는 거요. 그래서 대중 생활을 하라는 거요.
그래서 행자들을 개인 방을 안줍니다. 여기도 운문사든 어디든 가보세요. 이 사미승들 행자뿐만 아니라 사미승까지도 개인 방을 안 줍니다. 그러니까 그게 능히 극복이 될 수 있어야 개인 방을 주는 거요. 그래서 초심자가 토굴에 가서 혼자 수행하면 안 돼. 그럼 게을러 빠져버려. 업식에 끌려가서. 그래서 여러분이 처음 할 때는 가능하면 절에 나와서 하는 게 좋아. 아침기도는. 아시겠어요? 같이 하는 게 좋아. 그래서 한 100일쯤 해서 몸에 습관이 배어버리면 어때요? 혼자 하는 것이 비교적 용이합니다.
그래서 다시 얘기하지마는 생각은 수행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언제나 몸에 끄달립니다. 이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못 본거요. 그러니까 몸에 끄달리는 게 아니라 뭐에 끄달린다? 업식에. 업식에. 습관에 끄달린다. “담배를 끊어야 된다고 알기는 아는데요. 몸에 끄달립니다.” 이 말이 아니고. 이 담배 피우는 습관에 끄달리는 거요. “잔소리 안 해야 된다는 걸 알기는 아는데요.” 잔소리 자꾸 나오죠? 그죠? 습관에 끄달리는 거요. 그래서 잔소리를 내가 남편한테 안 하겠다. 아 ~ 이 잔소리 하는 게 아무 이익이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해서 몇 번 혼자서 결심을 해봐도 자꾸 잔소리가 나오잖아. 그죠? 그럼 고치는 방법이 간단합니다.
남편한테 말해요. 내가 딱 말했을 때 당신이 듣고 잔소리라고 느끼거든 내 뺨따귀를 눈이 팍~ 불이 나도록 떼려 버려라. 그럼 한번 때릴 때마다 내가 딱 10만원씩 줄게. 그러면 금방 고쳐져. 이게 못 고치는 게 아니오. 아시겠어요? 고치려는 생각이 없는 거요. 고치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계속 반복되는 거요. 아무리 업식이 있어도 고치려는 생각이 확실하게 있으면 대 결정심이라 그래요. 대결정심이 있으면 업식이 대결정심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부처님도 6년 고행하실 때 보면 온갖 유혹이 있지 않습니까? 그죠? 그럴 때 늘 유혹에 이렇게 끄달려 가시다가 대결정심이 발동하잖아요. 그렇게 해서 탁 끊어버린다.
그래서 질문하신 분은 대결정심을 내셔야 돼. 5시에 일어나 수행하겠다. 하면 좋은데 이러지 말고 오늘부터 5시에 벨이 딱 눌려가지고 못 일어나면 어떻게 하느냐? 나하고 이따 갈 때 각서를 써요. 100만원씩 주기로. 한번 못 일어 날 때마다 100만원씩 벌금을 내기로 하면 일어날까? 안 일어날까? 일어납니다. 100만원 벌금 내는 방법도 일어나게 하고. 일어나면 내가 반대로 그 보살님한테 100만원 준다 해도 일어날까? 못 일어날까? 일어납니다.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이건 본인이 돈 있으면 나한테 100만원 주고 본인이 돈 없으면 오늘 스님하고 약속을 해. 내가 100만원 줄게.
그래서 여기 있는 사람도 오늘 내가 기도문 다 주고 내일부터 여기 아침에 5시까지 정시에 여기 아침 예불하러 오는 사람은 10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씩 앉아서 현금으로 탁탁~ 나눠주면 대부분 다 올까? 안 올까? 진짜 99% 옵니다. 그러니 아직도 우리가 해탈을 얘기해도 아직도 우리는 뭐니뭐니해도 머니가 더 중요하다. 이 수준이오. 그래서 이건 안 되는 건 아니에요. 그냥 내키지가 않는 거요. ‘꼭 해야 되나?’ 이런 게 깔려있습니다. 아시겠어요? ‘5시에 일어나서 해야지.’ 이러면서도 저 무의식의 세계. 무의식이 업식이 거든요.
저 밑의 업식이 ‘뭐 그 꼭 해야 되나? 그거 안하고도 너 여태까지 잘 살았잖아.’ 이렇게 늘 내면의 다른 소리. 이게 경전에 기록은 이게 뭐냐? 마구니의 소리입니다. 아시겠어요? 마왕 마라가 귀에다 계속 대놓고 이렇게 속삭이는 거요. “꼭 해야 되나? 여행할 때까지 꼭 해야 되나? 이런 공항에서 이런 호텔에서까지 그렇게 그걸 고집해서 할 게 뭐 있어? 그게 부처님이 그런 걸 집착이라 그랬어.” 이렇게 자꾸 속삭이는 거요. 아시겠어요? “이런 건 안 해도 괜찮은 거야.” 이렇게 자꾸 속삭이기 때문에 그만 두게 되는 거요.
그런데 딱 결심을 해서 그게 기차간이든 공항이든 무조건 하는 거로 정해놓고 해버리면 마장이, 마왕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슬림들 보셨죠? 무슬림들은 택시 기사가 손님 태우고 가다가 12시 딱 되면 어떻게 합니까? 차를 사막 한가운데 세워놓고 가가지고 기도하고 오고. 이러지 않습니까? 그럼 자기만 문제가 아니라 손님까지 놔놓고. 그래도 우리는 할 말이 없어. 왜? ‘저 사람은 무조건 하는 사람이다.’ 하면 우리가 적응해야 되요? 안 해야 되요? 해야 돼.
여러분도 무조건 5시에 일어나서 하면 남편이 두드려 패도하고, 뭐 다리를 고장 내놔도 하고 이러면 처음엔 난리를 피우지 좀 지나면 인정합니까? 안 합니까? 인정해. 천해 놔버려요. 그 결정이오. 살든지 안 살든지. 뭐 안 산다고 난리를 피우고 온갖 협박 공갈을 해도 ‘그냥 나는 내 길을 간다.’ 하고 정해버리면 아무 천하의 누구를 나를 건드릴 사람이 없어집니다. 그거를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그래도 이익이 되면 서로 살게 되는 거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래서 옛날부터 사주팔자 지 만들지 나름이라고 하잖아. 그런 대결정심이 없잖아요.
그건 왜 그러냐? 법에 대한 귀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 지금 공부해야 되겠다. 이런 마음 안 돼요. 공부하겠다고 딱 마음을 내면 앞으로 화요일은, 화요일은 난 무조건 없어. 알아? 두 달 동안 화요일은 없는 거로 쳐. 이래. 그거 나한테 인정해주고 같이 살려면 살고 못살면 난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끝이다. 애고 뭐고 초등학생이든 뭐든 화요일 날, 니 알아서 밥해먹어. 그 외에는 잘해줘야 돼. 아시겠어요? 그 외에는. 그 외는 잔소리도 안하고, 늦게 와도 말도 안하고, 그저 밥도 잘해주고. 대신 화요일은 손대지마. 이렇게 딱 나가면 서로 적응해서 살게 돼 있다. 이 얘기요.
직장에 다니시는 분도 그래요. 우리 거사님도 보면, 딱 요일을 어느 날 정해가지고 그날 무조건 법회 간다. 직장에선 회식 한다, 뭐 한다, 뭐 한다. 이러지 않습니까? 그죠? 그래서 뭐 직장생활 할래? 그만 둘래? 협박 공갈 하다가도 그렇게 되면 나중에 약속 잡을 때 무조건 화요일은 뺀다는 거요. 아시겠어요? “아, 그 사람 화요일은 안 되잖아.” 이래서 그 사람 빼버리고 하든지 안 그러면 어때요? 거기 맞춰서 요일을 정하는 거요. 마찬가지 아니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 일요일 날 무조건 안 하니까 다 따라 갑니까? 안 갑니까? 따라가지. 우리 기독교인 아닌데도 따라 가잖아.
그러니까 무슬림 지역에 가면 금요일 날은 무조건 쉬어버려요. 따라가는 거요. 금요일 날 무조건. 그런데 아프가니스탄 같은 데는 그 나라는 무조건 금요일 날 쉬고. 그 나라는 제 힘으로 못살아 외국인들이 들어와서 주로 도와주고 살잖아. 그죠? 외국인 들어온 사람들은 전부 일요일 날 쉬어. 그래서 일주에 휴일이 며칠이다? 이틀이에요. 어떤 일을 하려면 금요일 날 이 사람이 쉬어버리니 아무 일도 안 되고, 일요일은 이쪽이 쉬어버리는 아무 일도 안 되고. 그래서 휴일이 붙은 게 아니라 금요일하고 일요일이 휴일이에요. 방법이 없어. 맞춰 살게 되는 거요.
일제시대부터 박정희 대통령부터 구정 없애버리고 신정한다고 공무원들 설에 놀러 가면 모가지 잘라버리고 그랬어요? 안 그랬어요? 그랬지. 그렇게 해도 그 유식한 그 공무원들 배운 사람은 다 겁을 내서 따라가는데, 촌에 농사짓고 사는 사람은 겁날 일이 있나? 없나? 없지. 너 그야 어이 가든지 계속 음력설로 하는 거요. 그런데 공장에 다니는 이 막노동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 설에 안 보내주면 어떻게 한다? 가버리는 거요. 그냥. 공장이 다 비어버려. 그러니까 한때 공장에서는 설은 무조건 쉬잖아. 그죠? 사람이 가버리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민주화가 되니까 독재시대에는 그렇게 했지마는 일제시대부터 따지면 50~ 60년을 그렇게 사람들이 계속 하니까 결국은 돌아가 버리잖아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담배 피우든 습관이 있는 사람은 담배 피우든 습관, 업은 쉽게 양보 하려고 그러겠어? 안 하려 그러겠어? 절대 안 하려고 그래. 끝까지 그냥 자기 식으로 밀고 가는 거요. 그래서 안 피워주면 몸을 아프게 만들어버리고 생각을 바꿔버리고 요동을 치고 이렇게 난리를 피우는 거요. 그러니까 보통 우리가 못 이기죠.
그러니까 대결정심이라고. “너는 그래라. 나는 이쪽으로 간다.” 가버리는 거요. 그냥. 그럼 요동요동치다 지 풀에 죽는 거요. 그런 태도가 필요한 거요. 정진을 할 때는. 그러니까 무조건 그렇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정말 내가 정진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그렇게 해야 된다. 이 말이오. 아까 질문하신 분. “내가 정말 아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말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남편한테 숙여야 되겠다.” 이럴 때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든, 술을 먹든, 돈을 흙탕에 버리든, 그런 거 별로 중요하게 생각 안 하는 거요. 아시겠어요?
내 이 업을 바꾸는데 있어서는 그런 거는 아주 하찮은 거에 속하는 거요. 무조건 당신 하는 건 잘했어. 술고래가 되어 와도 잘했다. 여자를 데리고 와도 잘했다. 그냥 직장에 떨어져도 잘했어. 당신 잘했어. 이렇게. 그렇게 하찮은, 내 해탈을 위해서는 그런 걸 하찮게 봐 버리는 태도를 확 가져버려야 공부가 굉장히 쉬워 져버려. 그럼 마장이 범접할 여가가 없어. 당신은 왕이로소이다. 이러고 해버리면 되는데. 이게 그냥 계속 잘못했다고 그러고도 저 정도로 저렇게 까지 저게 나간다. 봐주니 저거 봐라.
이런 식으로 하니까 결국 되돌아오는 거요. 그런 태도가 필요하다. 이 말이오. 과보를 기꺼이 받아들여라. 그 과보가 큰 고통이거들랑 어떻게 해라? 하고 싶더라도 그만 두고 하기 싫더라고 해야 돼. 거기 용납하면 안 돼. 그런데 여러분은 수행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 하는 거를 수행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좀 안 맞아. 수행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이건 딱 선택을 해서 한번 밀어봐야 돼. 넘어지고 자빠지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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