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나는 잘 하고 있습니다.’라는 기도문을 받았다고 그러면, 그건 자기가 자기한테 만족 못 하고. 자기에 대해서 늘 부족하게 생각하고, “아이고 내가 요거밖에 안되나?” 자꾸 이렇게 아마 생각하니까. 누가 자기에 대해서 긍정적이라. 현실의 자기에 대해서 긍정적이라 해서 아마 ‘나는 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마 기도문을 준 거 같거든요. 기도문이라는 것은 자기가 끊임없이 자신한테 암시를 주는 거요. 내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아니다. 너 잘하고 있다. 너 잘하고 있다. 너 잘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자기 부정을 극복하라고 주는 거니까. 당연히 자기가 자기를 부족하게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그죠?
그러니까 그 부족하다고 느끼는 거를 뛰어 넘으라고 ‘잘하고 있다.’라고 기도문을 줬으니까 충돌이 일어나는 것밖에 없죠. 예를 들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게 담배를 끊으면 담배를 피우고 싶은 생각과 끊어야 된다는 생각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까요? 안 일어날까요? 나겠죠. 그거와 똑같은 거요. 그런 충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아니다, 너는 잘하고 있어. 아니다 넌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어.” 이렇게 계속 하다가 보면 그것을 어느 고비를 넘기면 ‘아~ 그래. 쯧. 내가 잘하고 있네. 그래 살아있는 것만 해도 성공이야.’ 이렇게 자기 긍정적이 되죠.
살아있는 거, 성공이라는 거 알아요? 중간에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살아있는 거 대성공이오. 어떤 분이 이렇게 얘기해요. “아이고 스님, 제가 50되도록 결혼도 못했어요.” 이래요. 50되서 결혼 못한 게 큰 인생의 실패래요. 그럼 난 60이 됐는데 어떻게 해요. 그런데 스님들 사회에서는 어떠냐? 60이 되도록 중간에 속퇴 안하고 이렇게 살아 남아있는 거, 대성공에 들어가거든요. 그러죠? 중간에 그만둔 사람 많잖아. 그죠?
왜 똑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60이 되도록 결혼 안하는 게 성공에 속하고. 어떤 사람은 60이 되도록 결혼 안하는 게 실패에 속합니까? 똑같은 사람인데. 그리고 똑같은 60에 혼자 사는데 하나는 인생 실패자고 하나는 인생 성공자에요. 그러니까 인간존재는 성공도 실패도 없는데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성공도 되고 실패도 되거든요. 자기의 존재는 다만 한 존재일 뿐이에요. 그걸 자기가 부정적으로 보면 자기는 실패자에 들어가고 자기가 자기를 긍정적으로 보면 성공자에 들어가는 거요.
결혼했어요? 안 했어요? 못했어요? 그래서 실패자요? 결혼도 못해가지고? 어~ 지금까지 그래도 결혼 안하고 처녀로 지냈다는 건 대성공이지. 그죠? 왜? 자기가 결혼을 안 했기 때문에 지금 결혼 할 수도 있고, 출가해서 스님이 될 수도 있고, 수녀도 될 수도 있고, 가능성이 지금 열려 있잖아. 그죠? 이 남자도 저 남자도 만날 가능성이 열려 있잖아요. 그런데 결혼을 해버리면 가능성이 팍 줄어버린단 말이오. 그래서 자기는 가능성을 더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굉장한 성공한 케이스에 들어가는 거요. 으음.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에요. 이거는.
그러니까 자기를 자기가 자꾸 왜소하게 보기 때문에 자기에게 긍정하라고 그렇게 하는 거요. 그런데 자기가 지금 극복이 그게 금방 안 되니까 충돌이 일어나죠. 계속 더 해야 되요. 계속 더. 그건 좋은 일이에요. 왜? 지가 잘난 것도 별로 없어요. 으음.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잘난 것도 별로 없고, 못난 것도 별로 없다. 이게 핵심이오. “못났다.”고 생각하면 “잘났다.” 이렇게 자긍심을 갖도록 해주고. “잘났다.” 이러면 “네가 잘난 게 뭐 있노?”해서 교만을 탁 꺾어주는 거요. 왜? 인간 존재는 잘난 것도 아니고 못난 것도 아니니까. 하하하.
Q2
그게 왜 안 고쳐지냐 하면 안 고쳐도 살만하니까 안 고쳐지는 거요. 먹고 살만하니까는 아니고, “이게 좀 고쳐야지” 해도 “뭐 무의식세계에서는 뭐 그럴 수도 있지. 나만 경쟁하나? 세상이 다 경쟁하는데.” 이런 자기에게 자기를 합리화 시키는 이런 목소리가 다른 한쪽에서 있어요. 그래서 그게 안 고쳐지는 거요. 정말 “이거 안 고치면 죽는다.” 이러면 고쳐져요. 간절해야 된 다기 보다 정말 고치고 싶어요? 그러면 방법이 하나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자기가 생각할 때 ‘어~ 내가 또 경쟁심을 일으켰다. 이거 진짜 내가 안 하려 했는데 또 했다.’
이럴 때는 전기 충격기 있죠. 자기를 한 번씩 지녀버려요. 그러면 내가 생각할 때 이건 실지로 의학적으로 쓰는 겁니다. 세 번 정도만 지져버리면 속에서 무의식 세계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약간 두려움이 생겨요. 경쟁하려고 그러면 뜨끔해요. 이렇게 하면서 자극을 주기 때문에. 그런 정도로 자기를 고치려는 결의가 강하냐? 이러면 고칠 수는 있어요. 그런데 뭐 자기가 생각할 때 내가 이런 얘기하면 “스님, 뭐 그렇게 까지 해서 고칠게 뭐 있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그냥 남아있는 거요.
그러니까 고칠 수 없는 건 아니다. 이 말이오. 고칠 수 없는 건 아닌데. 그럼 안 고쳐지는 이유는 안 고쳐도 살만하기 때문에 안 고친다. 이 얘기요. 그게 이제 자기 합리화지. 그런데 자기가 이제 손실을 그 경쟁심 때문에 자기한테 손실을 많이 입으면 자기가 반성하게 돼. 지금 벌써 손실을 입고 있잖아. 그러니까 반성하는 게 나온단 말이오. 지금 경쟁심 때문에 자기가 힘들잖아요. 자기가 자꾸 손실을 본다는 거요. 손실을 자꾸 보니까 지금 이런 반성이 나오는 거고. 여기서 손실이 좀 더 오면 이제 고칠 가능성이 있죠.
그래서 제가 살만하니까 산다. 이 말은 고친다 하면서도 아직은 견딜만 한 거요. 아직은 견딜만 하다. 만약에 이거 보세요. 뜨거운 구슬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내가 이걸 딱 쥐었어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딱 쥐자마자 “앗 뜨거.” 이러죠. 그때 “왜 났니?” 그러면 뭐라고 그래요? “어떻게 놨니?” 그러면 “뜨거우니까 놨다.” 이러죠. 여기에 뭐 이걸 어떻게 놓는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에요. 사실은 뜨거우니까 놔버린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이걸 쥐고 만약에 어떤 사람이 “아 뜨거, 아 뜨거” 이래요. “어떻게 하지?” 그래요. 그래서 “놔라.” 이러니까 “이걸 어떻게 놔요.” 이래요. 방법을 몰라서 못 놓는 겁니까? 아니요. 이거 놓기 싫어서 못 놓는 거요. 왜 놓기 싫을까? 뜨겁다면서. 그러니까 손이 뜨거운 거는 싫고, 이 구슬을 갖고 싶은 욕망은 있고. 이 둘 사이가 뜨겁다면서 못 놓는다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여기 이제 우리가 선택해야 될 거에요. 갖고 싶으면 손 데는 과보를 겪어라. 갖고 싶으면 손을 대라. 이 얘기요. 그러니까 손이 대기 싫으면 갖고 싶더라도 어떻게 해라? 놔라. 이 두 가지 밖에 없지 거기에 타협점은 없어요.
네. 그건 뭐 선택이니까. 인생은 항상 선택이에요.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면 되요. 그러니까 길가다가 전철 간에 앉아서 여학생 종아리가 아주 예쁘다. 만지고 싶다. 만지세요. 괜찮아요. 그럼 3년 감옥가면 되요. 그럴 때 감옥에 가서 후회하면 안 된다는 거요. “아이고, 그래도 예쁜 종아리 한번 만져보고 3년 감옥 살은 거 다행이지 5년 안 살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이렇게 생각하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그거 만지고 싶다고 만졌다가 창피당하고 그러고 난 뒤에 감옥간 뒤에 후회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라? 만지고 싶더라도 만지지 마라. 우리 인생은 하고 싶은걸 다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하고 싶더라도 손실이 크면 안 해야 되고 하기 싫더라도 이익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된다? 해야 되는 거요. 그런데 자꾸 “하기 싫은데 어떻게 해요?” “하고 싶은데 어떻게 안 해요?” 이런 얘기는 하나마나 얘기에요.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하고 싶더라도 우리는 안 해야 될 일이 있고, 하기 싫더라도 때로는 해야 될 일이 있어.
그때 자유라는 것은 하기 싫을 때 해버릴 수 있는 자유. 하고 싶은데 멈출 수 있는 자유. 이게 진정한 자유다. 우리는 자기로부터 자유로워야지 자꾸 남으로부터 자유를 생각하기 때문에 늘 속박 받고 산다는 거요. 자기가 그것을 용인하고 손실을 감내하든지 손실이 싫으면 과감하게 극복을 하든지. 극복을 하려면 아까 얘기한 데로 빨리 극복하려면 그런 수단도 있고. 그것에 타협을 하면서 이제 우유부단하게 살면 그만큼 괴로움이 따르고 그러는 거요. 여기에 어떤 게 좋다 나쁘다고는 할 수가 없어요. 네.
'법륜스님 > 즉문즉설(2013)'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제358회 부모의 간섭 (0) | 2013.03.08 |
---|---|
[즉문즉설] 제307회 인간의 능력과 한계 (0) | 2013.03.08 |
[즉문즉설] 제306회 자녀들과의 원활한 관계, 행복한 가족생활 (0) | 2013.03.07 |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제356회 과정과 결과 (0) | 2013.03.06 |
[즉문즉설] 제305회 빙의된 영, 과연 나인가? (0) | 2013.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