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3)

[즉문즉설] 제487회 남에게 분별심을 내는 나를 봐라

Buddhastudy 2013. 7. 17. 22:38
출처 YouTube

 

그런데 자기부터 고쳐야 되요. 지금은 질문하는 사람은 책임을 또 남한테 전가하고 있어. 자기부터 고쳐야 되는 게 질문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하면, “제가 스님법문을 너무 많이 듣고, 그것을 다 실천도 못하면서 자꾸 이치만 많이 알아가지고 자꾸 저도 모르게 나도 못 하는 게 자꾸 남한테 간섭하는 이런 습성이 생긴 거 같습니다. 이럴 때 저를 어떻게 고치면 좋겠습니까?” 질문이 이렇게 와야 수행적 질문이 돼. 정토사람들은 스님법문 많이 듣고 아는 것만 많아가지고 묻지도 않는데, 자꾸 남을 가르치려고 한다.

 

이 얘기는 사실도 아니고, ? 그건 정토사람 내가 보는 몇몇이지. 전국에 있는 정토사람을 자기가 다 만난 것도 아니고, 내 주위에 있는 몇몇을 보고 첫째 얘기를 해서 사실도 아니고, 두 번째는 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문제요. 그러니까 그걸 보고 지금 분별심은 누가 내고 있다?내가 내고 있거든. 그럼 분별심을 내는 나를 봐야 되는 거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제가 분별심이 난다. 그럼 이 분별심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이렇게 봐야 되는데. 그럼 저런 사람들 고쳐야 된다. 그 말은 안하지만 정토회 이것 좀 고쳐야 되지 않느냐? 지금 이 얘기 하고 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술 먹는 저 남편 고쳐야 되지 않느냐? 는 거나, 법문만 듣고 행은 안하는 저것들 고쳐야 되지 아니냐? 는 거나. 결국은 남고치자는 얘기란 말이오. 이것도 본인의 수행적 관점이 지금 안 잡혀 있다는 거요. 그래서 지금 질문자는 이걸 봐야 된다. 그래서 나부터 법문을 들은 데로 행하는 게 필요하다. 남을 들먹거리고 여럿을 들먹거리는 것은 마치 이거 하고 똑같다. 내 주장을 옳다고 밝히기 위해서 동네사람한테 물어봐라. 누가 그렇게 옳은지.” 이렇게 얘기하는 거와 같다. 이거요.

 

그러니까 자기 생각이 이렇다고 말하지. 동네사람을 들먹거릴 필요가 없다. “하늘을 두고 물어봐라.” 하늘이 대답하나? 말 안하지. 그죠? 이런 것은 다 뭐냐 하면 자기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남을 탓하지 마라. 자기를 봐라. 이렇게 말하는 거요. 으흠.그래서 다시 자기를 잘 보세요. “~ 내가 나도 모르게 남을 탓하는, 밖을 향하는 마음을 갖고 있구나. 우선 내가 주위에 있는 몇몇 사람을 두고 일반화시켜서 정토사람은 다 그렇다.” 이렇게 하는 것도 이것을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두 번째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문제란 말이오. 그것을 보는 내 분별심이 ~ 내가 저렇게 하는 걸 내가 분별심을 내고 있구나.” 이렇게 봐야 되거든. 이렇게도 볼 수 있잖아. “~ 저 사람들은 그래도 법의 이치는 알고 있구나. 법의 이치는 알고 있구나. 행은 못해도.” 그러니까알기만 하지 행하지도 못 하는 게 이렇게 볼 수도 있고, “행은 못해도 그래도 저 사람들은 이치는 알고 있구나.” 이치도 모르는 사람보다 나아요? 안 나아요? 낫지.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 행하지도 못 하는 게 숫제 모르는 것보다 더 못하다. 이런 식의 생각이나 같단 말이오.

 

이것도 잘못된 거요. 그러기 때문에 나를 봐야하고 내가 본 몇 가지 경험을 일반화시켜서는 안 된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자기 생각을 말 안하고 뭐라고 그럽니까? “국민이 그렇다.” 자꾸 이렇게 얘기하잖아. 그죠? “국민이 원한다.” 이렇게 자꾸 얘기하는 것도 맞지 않단 말이오. 국민이 원하는지 안하는지 물어보지도 안했잖아. 나한테 물어본 사람도 없었는데. 자기가 3명이나 4명한테 얘기 듣고는 온 국민이, 이러기를 원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옳지가 않다. 그래서 이걸 우리가 항상 저의 수준은 그렇습니다. 제가 볼 때는 이렇습니다.” 이런 게 매우 필요하다.

 

여기 본인이 수행차원에서 한 얘기고, 이걸 떠나가지고 얘기가 나왔으니까. 지금 우리가 병을 고치려는 건 뭐냐 하면 불교학자나 스님들이 불교사상에 대해서 경전에 대해서 많이 알아요? 몰라요? 많이 알지. 그런데 그것을 자기의 삶속에서 실천을 못하고 있잖아. 그죠? 이렇게 되면 이걸 뭐라고 한다? 알음알이다. 이렇게 말해요. 알음알이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자기 삶이 안 바뀐다. 이 말이오. 그래서 우리 정토회에서는 자기 삶을 바꾸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이 경전을 많이 읽거나 교리를 많이 공부하거나 하는 거보다 그런 기본적으로만 하고, 바로 너 자신의 삶을 바꿔라. 이렇게 가르쳤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남편이 술을 먹고 온다 하면, 술 먹는 남편을 오히려 이해하는 마음을 내라. 그러면 우선 너부터 좋아지고 두 번째 남편이 너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그만큼이라도 덜 받게 되니까 남편이 술을 적게 먹고 오는 요인이 된다. 한번 해봐라. 그렇게 딱 해보면 된단 말이오. 그러면 자기에게 떨어진 요 지친만 갖고 수행하면 고것만 갖고 또 변화가 일어나는 거요.

 

그런데 이제, 만날 남의 얘기. 이 사람 얘기 저 사람 얘기 다 앉아 듣고, 그걸 가지고 아하~ 저걸 나도 저런 경험이 있었다. 저렇게 봐야지. 이렇게 작동 안하고 아~ 술 먹는 남자한테는 스님이 뭐라고 한다? 술을 보약이라고 한다. 자식문제 나오면 스님은 무조건 남편한테 참회하라 그런다. 이렇게 교리를 만든단 말이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스님도 교리를 안 만드는데, 자기들이 앉아서 교리를 만들어.답을 만든다. 그래서 정답은 많이 아는데 이래 말하잖아. 인생의 정답이 없어. 으흠. 그것도 잘못된 생각이오.

 

스님이 그걸 두 번, 세 번, 같은 얘기를 하면 그걸 정답이라고 생각해. 그렇지가 않아. 남편이 뭐 어쩐다 하면, 남편한테 참회기도하세요. 항상 그렇게 얘기 하는 거 아니오. 안녕히 계세요 하고 끝내라 하는 얘기도 있고, 다른 방향이 얼마든지 있어요. 그런데 자기들이 그 횟수가 많으면 그걸 정답화 시키는 거요. 그래서 지금 자기들끼리 둘러앉아. ~ 그건 우리 스님이 이래라 그랬다. 아 그건 우리 스님이 이래라 그랬다. 이런 얘기는 옳지가 않다는 거요. 그건 이미 교리화 됐다. 스님의 법문을 자기 식대로 해석해서 교리로 만들었다는 거요. 이건 잘못된 거죠.

 

그래서 우선 불법의 이치. 이치라는 것은 인생의 이치를 말하는 거요. 스님의 말씀을 몇 개를 분석해가지고 그걸 갖고 교리화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에 그런 관점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죽은 글귀, 법이 살아있지 못하고 이미 형식화하기 시작하는 징조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