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 닦아 나갈 때 제일 첫 번째 해야 될 건 이치를 바르게 알아야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거나 이런 걸 볼 때 이치를 잘 모르고 한단 말이오. 이치를 잘 모르고 하니까 이게. 등산을 가면 길을 제대로 알고 가야지 길도 모르면서 지맘대로 산에 오른다고 되는 게 아니란 말이오. 첫째는 이치를 알아야 된다. 두 번째는 이치만 안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뭘 몰라가지고 잘못한 거는 알기만 하면 해결이 되요. 그런데 습관화가 되어 있는 거는 이미 몸과 마음에 딱 배어 있는 습관화되어있는 거, 까르마로 되어 있는 거는 안다고 해결이 안 된다.
왜?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자꾸 원래대로 가버린다는 거요. 여러분들 그 옛날 그 누굽니까? 김유신 장군 그 글에 나오죠? 늘 말 타고 천관이라고 하는 기생집에 늘 술 먹으로 다녔잖아. 그죠?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걸 알고 야단을 쳤잖아요. 그래서 아버지 앞에서 안 가겠다고 맹세를 했는데 술 먹고 취하니까, 술 먹고 취했다는 건 자기가 깜빡 졸았다는 거 아니오. 그러니까 말이 어때요? 저절로 천관 집에 가버렸다는 거 아니오?이 얘기 아시죠? 이거란 말이오. 그러니까 아~ 참, 이러면 안 되지.
하지만 딱 경계에 부닥치면 나도 모르게 화가 먼저 나온다든지 나도 모르게 잔소리가 먼저 나온다든지 그때 깜빡 놓쳐버린단 말이오. 이거는 이치를 알아도 그 순간 놓쳐버린다. 자기도 모르게 말이 그 집에 갔단 말이오. 그랬을 때 어떻게 했어요? 칼을 들어 말의 목을 쳤죠? 그죠? 그러니까 “이왕지 온 거니 놀다가 내일부터 안 오지.” 이러면 안 된다니까. 칼로 말을 쳐야 된다니까. 칼로. 즉 자기 까르마를 그 자리에서 탁 잘라야 된단 말이오. 어~ 내가 사로잡혔구나. 나도 모르게 또 내가 옳다고 주장하구나. 이렇게 탁 바로 돌아와야 된단 말이오.
그런데 그것도 놓쳐버렸다. 이 말이오. 그럴 때 아침기도를 할 때 “아~ 내가 그걸 놓쳤구나. 아~ 내가 그걸 놓쳤구나.” 이렇게 탁탁 자학을 해야 된단 말이오. “내일은 안해야지. 다음엔 안해야지.” 이렇게. 그러나 또 경계에 팔리면 또 자기도 모르게 어때요? 또 그렇게 되요. 세 번 네 번 되풀이 된다고 “아하~ 난 안되나 봐.” 이러면 안 된단 말이오. 백번 되풀이해도 백한 번째 다시 시작하고, 천 번 되풀이 되도 천한 번째 다시 되풀이 하는 게 뭐다? 정진이란 말이오. 내가 안하겠다고 해서 그래 된 게 아니란 말이오.
무의식적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건 한탄해도 소용이 없어요. 나도 모르게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정신을 차리고 다시 주의를 주고,또 놓치면 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주의를 주고 이게 연습이란 말이오. 애들에게 자전거 어떻게 탄다고 가르쳐준다고 애가 탁 원래 태우면 쪼로록 굴러갑니까? 아니지. 넘어지지. 그럼 한번 두 번 타나가 넘어졌다고 그냥 안 된다고 울면 그건 못 탄단 말이오. 그다음부터는 계속 연습을 해야 된단 말이오. 연습을. 그러면 그게 넘어지고 넘어지고 넘어지고 넘어지다가 어느 순간에 탁 타지는 것처럼 안되고 안되고 안되고 안되다가 된단 말이오.
그럼 안되고 안되고 안되고 하는 건 뭐에요? 안 되는 거예요? 되어 가는 중이에요? 되가는 중이라는 거요. 그래서 그게 낙관적이라는 거요. 안 되는 걸 되어가는 중이라고 아는 것이 낙관적이라는 거요. 안된다고 그만 두면 절망, 좌절. 안되는 게 시도도 안하고 뭐 되고 안되는 게 따로 있나?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인데.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오. 으음? 교리를 그런데 갖다 붙이면. 그러니까 안 되면 계속 될 때까지 연습을 하는 것. 이 안되고 있는 것이 곧 되는 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하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계속 가는 것이 이제 우리가 인생을 낙관적으로 산다. 이렇게 말해요.
그래서 넘어지면 씩 웃고 일어나야지. 넘어지면 엎드려서 울면 안 된다. 그래서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움으로 봐야 된다. 으흠. 그 번뇌 자체를 탓하면 안 된다. 일어날 만한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는 거다.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 “없애야 되겠다. 어이하면 없어지노?”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참회하는 마음을 내면 그건 저절로 밀려나간단 말이오. 내가 참회하는 마음이 간절하게 안 일어나면 그건 저절로 들어와 내 머리를 차지한단 말이오. 그러니까 “아~ 내가 지금 기도문에 집중을 안 하구나.” 이걸 내 증표로 아는 거 아니오.
그래서 내가 참회하는 마음을 다시 일으키는 거요.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진짜 참회가 되요. 지금은 억지로 참회, 억지참회를 하지. 남편한테 “아이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네, 하고 숙이겠습니다.” 이렇게 하기는 하지만 저 무의식세계에서는 “왜 내가 참회해야 돼? 지가 해야지. 미쳤나? 이거 내가 왜 하노? 지가 잘못했는데.” 자꾸 이런 저항감이 일어나는 거요. 그 저항감을 딛고 또 엎드리고, 또 엎드리고, 또 엎드리고, 또 엎드려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아~ 내가 정말 고집 셌구나. 진짜 내가 남편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이렇게 마음에서 어느 순간에 탁~ 이해되는 마음이 일어나면서 눈물이 일어나고, 그러니까 슬퍼서 우는 것도 아니고 억울해서 우는 것도 아니고, 참회의 눈물은 얼굴은 밝아지고 눈물은 흐르는 거요. “아~ 그렇구나.” 하고 이렇게 일어나는 눈물이란 말이오. 그래서 그 눈물은 참회의 눈물은 얼굴에 슬픔 인상이 아니에요. 얼굴이 탁 밝은 속에서 눈물이 흐른단 말이오. 그럼 이제 눈물이 끊어져요. 그 전에 흐르는 눈물은 절하면 또 눈물 나고, 절하면 또 눈물 나고, 절하면 또 눈물 나고, 이거는 아직도 억울하고 분해서 흘리는 눈물이오.
눈물의 뿌리가 안 빠졌다. 이 말이오. 그런데 이제 참회가 딱 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눈에 눈물이 딱 흐르면서 이거는 눈물의 바닥에 나는 눈물이오. 그러면 아예 눈물이 안 나느냐? 그 얘기가 아니라, 또 다른 걸로 또 나겠지만 그거는 그렇다. 이렇게 이제 이치를 먼저 알고 이거 견도라고 그래요. 법의 이치를 알고 법문을 듣고 법의 이치를 알고, 두 번째 이치를 실제로 행하는 게 필요하다. 이거는 반복된 연습. 꾸준한 노력. 이걸 갖다 수도라고 그런다. 그러니까 견도 수도를 해서 그다음에 그것을 내가 경험하고 체험하는 경지로 가야 된다.
우리 다 그 과정에 있어요. 으음. 여러분이나 저나 다 그 과정에 있다 이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 과정에 있는 사람을 보고 “거건 절에10년 다닌 게, 5년 다닌 게, 저것도 못하나? 맨날 알기만 하지, 니 하는 게 뭐냐?” 이런 말 하면 안 돼. 다 우리가 아는 것과 행하는 사이에 간격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꾸준히 노력하고 연습하고 있는 중이란 말이오. 그걸 대놓고 “절에 5년 다닌 게, 법문을 그렇게 많이들은 게 왜 그것도 못하나?” 이런 말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수행을 갖고는 논평하지 마라.
그냥 저분 참 열심하고 있네. 그 되고 안 되는 걸 논하지 마라. 우리 모두가 안 되는 사람들이오. 그런데 왜 그것도 못하나? 이런 얘기 하면 안 된단 말이오. 으흠. 그래서 이렇게 수행에 대해서는 가르치려고 하지 마라. 딴 사람이 상담을 하면 빙긋이 웃고 아이고, 저도 안 돼요. 이렇게 해주고. 스님도 여러분들이 염불 물으면 뭐라고 그래요? “아이고 나도 그래.” 이런 얘기하잖아. “왜 그것도 못해?” 이런 말 절대로 안하잖아. “아이고 나도 안 돼. 절할 때 다 나도 번뇌가 일어나고, 면상할 때 번뇌가 일어나고 그래요. 나도 안 돼.”
그러나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데 지금 일어나는 과정이고 이거를 가지고 우리가 앞으로 꾸준히 해 나가면 된다. 그래서 수행은 평가하면 안 된다. 이 말이오. 으흠. 다만 자기 정진을 열심히 하고, 다른 사람이 묻게 되면 자기 경험을 얘기해 줄 뿐이지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정토회 계율 중에 가르치지 마라. 이런 말이 있어요. 목탁 치는 거 가르치지 마라. 이런 뜻이 아니에요. 수행이 잘됐니 못됐니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이런 말은 하지마라. 이 말이오. 어떤 사람이 남편 때문에 막 괴로워하면 “야~ 너 남편한테 참회해야 된다.” 이런 말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오.
그냥 그러냐고 받아주고, 그다음에 내 경험, 나 같은 경우에는 그랬을 때 “스님이 이렇게 해보라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한번 해 봤더니, 마음이 편하더라.” 여기까지만 얘기해야 돼. “니도 해라.” 이러면 안 돼. 그러면 그 사람이 알아서 “나도 한번 해볼까?” 이렇게 얘기하면 “그래 너도 한번 해봐라.” 이렇게 얘기 하는 정도. 수행은 평가하면 안 돼. 알았어요? 내 수행 부족한 걸 봐야지. 그런데 여기 절에 다니면서 정토회에서 가끔 폐단이 나타나는 거는 자꾸 법문을 듣고 남에게 적용해서 늘 “스님법문 뭐라고 했는데 너 왜 그래?”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오.
다만 자기 공부만 해야지. 남을 갖고 평가하면 안 돼. 이런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지금 아까 그런 질문도 올라오게 되는 거요. 그런데 그 질문하는 것 참 좋았는데, 질문자를 위해서는 질문자도 또 남을 얘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바로 그럴 때 자기를 봐라. 우리 모두가 각자 자기를 봐야 되는데, 늘 남을 본다. 이 거야. 으흠. “스님요, 쟤는요, 보세요. 자기 안보고 남보고 있어요.” 이거 맞는 거 같지만, 이것도 내가 지금 누구보고 있다? 남보고 있는 태도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네, 오직 남이야 어떻게 하든 관여하지 말고 자기를 봐라. 그래야 우리가 해탈 열반의 길로 갈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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