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식이 활동하여 오온을 일으키고
오온이 그대로 법임을 깨달아야 하는 이유는...
반딧불은 의식으로
몸에 불을 밝혀 주변을 확인하고
자기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쁘다고 하지만
반딧불에겐 그것은 삶의 존재 방식입니다.
인간도 의식의 반딧불 작용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오온입니다.
오온이란
색수상행식이니
곧 몸, 느낌(감정), 생각, 의도, 분별을 말합니다.
이것들은 사실은 몸을 확인, 보존하는 데 필요한
의식의 변형 프로그램입니다.
인간은 오온을 이용해 주변을 반딧불처럼 확인하며
자기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반딧불 빛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는
아무것도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엔 아직 드러나지 않는 모름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의식이 자기 주변만 밝힐 뿐
그 너머에는 모름의 세계입니다.
이 모름의 세계가
반딧불이 빛을 밝힘에 따라
차례차례 풀과 꽃, 벌판과 호수 등으로
그 모습을 하나씩 드러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의식 활동에 따라
나와 너, 가족과 사람들, 직장과 사회, 자연 등이
하나씩 눈앞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깨닫는다는 것은 별것이 아닙니다.
의식이 반딧불 작용을 해서
하나씩 드러나는 대상에 이름을 붙이고
그 대상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의 이야기를 입힌 것이
바로 우리들 삶이며
그것이 바로 이야기뿐이기에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영화 필름이 수없이 지나가면
그 사이에 이야기가 만들어지듯이
우리는 그렇게 집단 최면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며
눈앞의 일이 삶이라는 허구의 꿈속에 빠져
정신 차리지 못한 채
허구의 나 안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닫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 일상이
다 꿈이며, 허구의 이야기임을 정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엄밀하게 보면
곧 의식이 매 순간 만드는
생각, 느낌, 감정, 분별이란 요소들로만 구성되어 있을 따름입니다.
인간 아무개란 나는 그 안에 없습니다.
그냥 오온이 생멸할 뿐입니다.
이게 바로 매 순간 매일같이 우리 눈앞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며,
깨달음이란
바로 이 진실을 정견하고
실상 이것을 법이라 한다에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닫기 위하여 어디 산속으로 가거나
수행처를 찾아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 눈앞의 일상 속에서
우리는 다만 똑바로 지속적으로 정견하기만 함으로써
깨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상이 곧 공부처입니다.
선가에선
눈앞의 소식이란 말을 자주 씁니다만
이 말은 곧
일상이 그대로 오온이 일어나서 꿈을 만들어내는 현장이며
이 모든 것이 배후에서
일체를 일으키고 인식하는 그 자리를 찾아 하나 됨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바다에 파도가 그치지 않듯이
법회의 이 자리에는
끝없이 오온의 파도를 일으키는 의식 활동이 생멸하고 있습니다만
이 모든 것의 배후적 실제를 정견하려면
파도만 보지 말고
바다와 파도를 같이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문득 우리는 본래로부터
이 한 사실밖에 없었다는 진실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그 소식이란
곧 의식이 활동하여 오온을 일으키고,
오온이 그대로 법임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 현상에 빠져 갇힌 채
꿈만 꾸고 있다는 삶의 기막힌 신비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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