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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있는 그대로]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려볼까 하는데
제가 볼 때는
불교든 영성공부든 간에
제일 어려운, 설명하기 어려운 게
[있는 그대로] 하고 [중도]예요.
제일 어려운 게 ‘있는 그대로’ 하고 ‘중도’
그래서 중도는 이제 나중에 언제 한번 다뤄보겠지만
오늘은 이제 ‘있는 그대로’를 한번
어느 분의 부탁에 의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데
지난번에 ‘있는 그대로’를 이해를 잘하기 위해서
제가 4월달에 ‘뿐’과 ‘즉’에 대해서 먼저 특강을 했어요.
왜냐하면 그래야만 있는 그대로를
좀 더 쉽게 여러분이 수용하실 수가 있어요.
지난 4월달 강의는 다 들으셨죠?
‘있는 그대로’라고 하는 말을
우리는 쉽게 참 잘 쓰는데
영어로 말하면 Be as you are
또는 As it is 뭐 이런 식으로 번역이 되죠.
장자의 무위자연 그것도 있는 그대로죠.
아마 장자의 무위자연에서 ‘무위’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라는 말은
한마디로 분별하지 말고
본래 그대로를 보라는 얘기예요.
분별 조작하지 말고
본래 있는 그대로를 보자.
이 ‘있는 그대로’라는 말이
왜 깨달음의 세계에서 중요하냐면
우선 석가의 수행과정을 우리가 좀 한번 돌아보실 필요가 있어요.
석가의 수행과정을 보면
석가가 6년 동안 그 당시에 선지식을 찾아다니면서
나름대로 선정공부를 했잖아요.
그랬는데 그 각각 단계의 스승들은
한마디로 요새 사무념처정 뭐 이런 말로
공무변처정을 가르쳐준 사람도 있고
식무변처정을 가르쳐 준 사람도 있고
무소유처정을 가르쳐준 사람도 있고
마침내 비상비비상처정까지 가르쳐준 사람이 있었어요.
근데 석가가 보기에는
그런 선정들이 만족스럽지가 않았어요.
왜냐하면 선정이라고 하는 것은
출입이 있어요.
들어가서 선정할 때는 엄청 좋아요.
근데 나오면 다시 괴로움이 시작돼요.
이게 기독교 신앙생활하시는 분들도
한번 생각해 봐야 돼요.
제가 저희 집사람에게도 언제 한번 이거에 대해서
얘기를 해준 적이 있는데
교회에 가면은 천사예요, 교회 안에서는
근데 나오면 벌써 운전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또 뭐 주변 사람들하고의 어떤 갈등이라든가
신뢰관계에 금이 간다거나
이런 거가
교회라고 하는 어떤 3차원적 지정학적 장소 내에서는
사람을 굉장히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데
그걸 그 바운더리를 벗어나는 순간
사람이 좀 다시 원상회복되는 듯한
이런 것이 저희 집사람한테서 제가 좀 느껴지기 때문에
또 사람 사이에서도 한 교회 사람하고 다른 교회 사람
또는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하고도 약간의 차별 대우가 있고
이제 이런 거에 대해서
가끔 우리는 영성적인 얘기를 해요.
그러면 서로 물어보기도 하고 답변도 하고
그런 점이 참 좋은데
근데 어쨌든 그런 얘기를 왜 하느냐 하면
그것도 일종의 선정이거든요.
즉 뭐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교회라는 곳에 가면
마치 어머니 품에 안긴 것 같은 편안함
그리고 저절로 사랑이 가슴에서 솟아 나온다는 거예요.
저희 집사람 말에 의하면.
자, 그러면 여러분들도 어떤 선정에 딱 들어가면
정말 그냥 너무 이렇게 지극히 즐겁고 편안하고
법열이 흘러넘치고 하는데
문제는 여기서 나와야 직장도 다니고
어디 출퇴근도 하고 밥도 해먹고 인간관계도 만들어지지
그 안에만 있을 수는 없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
그래서 석가모니께서 고민하신 거는
왜 이런 것들을 전부 다, 궁극의 도가 아니라고 판단을 하셨느냐 하면
이런 거는 [미묘한 분별]이라고 보신 거예요.
미묘한 분별이고 [취사선택]이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전체가 그대로 이 진리여야지
왜 하필이면 들락날락해야 되고
“자 지금부터 들어갑니다” 하면 그때부터는 좋고
“나옵니다” 하면 그때부터는 또 아니냐?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이것과 이것 아닌 것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아직 궁극이 아니라고 보신 거예요.
그래서 이분이 마지막에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 보리수 아래에 와서
한마디로 그 심정이 굉장히 참담한 거예요.
배울 때 다 다녀보고 해도
자기가 원하는 궁극의 도는 아닌 것 같아서
그때 보리수 아래에 앉아서 뭐라고 자기한테 선언했냐면
“내가 궁극의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다시는 여기서 일어나지 않겠다”
‘죽겠다’ 이 말이에요.
그리고 나무 아래에 들어서 선정에...
선정에 들어갔다고 보기에도 난 어려운 게
그런 선정을 다 실망하셨으니까
내가 볼 때는 그냥 있으신 거예요.
그냥 있는 게 있는 그대로예요.
그냥 있는 게
근데 이분이 그렇게 밤을 꼴딱세우고
그냥 우리 쉽게 이해하기 쉬운 말로
멍때리고 있었다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이분은 끝없이 멍때리지 않고 정견을 하고 계셨죠.
자기의 모든 존재 상태를, 눈앞의 모든 존재 상태를.
그러다가 새벽별을 보신 거예요.
새벽벌을 보는 순간 이분이 깨달았어요.
마침내 비상비비상처정에 있는 무상정등각을 깨달으신 거예요.
무상정등각이라고 하는 거는 뭐냐 하면
한마디로 대상이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대세계에서 절대세계로 들어가 버린 거예요.
여러분 이런 비유가 있어요.
아기 돼지 10형제인가가 소풍을 갔는데
징검다리 강을 건넜어요.
그래서 혹시 “다리가 길이다 보니 빠진 사람 없냐?” 하고 “세보자”해서 셌는데
“야, 네가 세봐라, 니가 똘똘하니까”
그럼 얘가 하나, 둘, 셋, 넷 해서
“이상하다 9명이다”
“그럴 리가 있냐? 그럼 네가 세봐라”
그러니까 걔도 하나, 둘, 셋, 넷 하니까 또 9명인 거예요.
그러니까 얘네들이 막 울기 시작하는 거야.
누군가 하나 빠졌다.
그러니까 지나가는 다른 어른 돼지가 보니까
애들 아홉 명이 울고 있거든.
“야, 너네 왜 우냐?” 그러니까
하나가 빠졌다는 거예요.
“그래?”
어른이 쓱 보니까 10명이거든
그러니까 “야, 너네 10명인데?” 그러니까
“아니에요. 우리가 세 봤어요. 분명히 9명입니다.”
그러니까 세는 놈은 안 치고
꼭 눈에 보이는 놈만 따지는 거야.
대상만 따지고 있다고요
그래서 어른이 할 수 없이
나뭇잎을 10개를 따서
“지금부터 내가 하나씩 나눠줄 테니까
자기가 첫째 받는 놈은 하나, 둘째 받는 놈은 둘, 하고 외쳐라.”
“예”
하나, 둘, 셋, 넷 하니까 딱 10개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애들이 열 번째 받은 놈
“너 어디도 있다 나타난 거냐?”
자 여러분, 근데 우리가 지금 그런 짓을 하고 있어요.
다시 말하면
모든 걸 보고 판단하고 있는 [자기]는 안 보고
그리고 다 [대상]만 보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석가모니는 이 별을 보고 깨달은 게
‘있는 그대로’를 깨달으신 거예요.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무슨 말이냐면
석가모니가 나무 밑에서 여기 뭐 이렇게 바위가 있었겠죠
문득 보니까 별이
이 안에 다른 풍경도 있었겠지만
물도 흐르고, 멀리 산도 있고, 등등 있었겠지만
예 대충 그렸어요.
이렇게 별을 보고 뭘 깨달았을까요?
보통 사람은 여기서 또 ‘아기돼지 10형제’ 짓을 해요.
뭐냐하면
의식이 바로 별에 가서
“별을 봤다”라고 하는 생각을 갖다 딱 붙여요.
자기를 잃어버린다고
“별을 봤다”
또는 자기를 또 생각할 때는
“내가 별을 봤다” 라고 해서 [주객]을 만들어요.
그리고 [행위]를 만든다고요.
이게 우리가 하는 짓들이에요. 그죠?
이건 [있는 그대로]가 아니에요.
[분별되고 조작된 그대로]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런데 석가가 깨달으신 건 뭐냐 하면, 뭘 깨달았냐면
이 별을 통해서
이 별을 본다는 이 [봄]
이런 조작된 상태가 아니고
생각하기 이전에 별을 보면
별이 나타나 보이잖아요. 인식되잖아요.
이 별을 본다는 이 [봄]은 곧 [앎]이잖아요.
본다는 건 아는 거고
안다는 건 보는 거예요.
별을 통해서 뭘 알았냐면
이 별을 본다는
자기의 봄과 앎을 돌아본 거예요.
보통 사람이 이렇게 보는데
이걸 돌이켜서 자기를 본 거예요.
[자기의 봄과 앎]이라고 하는 [본성]을 본 거예요.
근데 이 봄과 앎은 별만 있는 거예요?
아니면 이 나무에도 있고, 산에도 있고, 물에도 있고,
전체 자연에 다 있는 거예요?
여러분 보면 다 있잖아.
그러니까 이 전체가 이 별을 통해서
이런 것들이 분별되기 이전에
[봄과 앎이라는 한 덩어리]가 있다라는 걸 본 거예요.
별은 그냥 잠깐 방편에 의해서 본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왜
있는 그대로 못 보냐면
순간적으로 분별에 자꾸 떨어지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근데 여러분이 만약에
이 방에서 모든 사람을 다 나가라고 하고
여러분은 혼자 남아 있다 그러면
그래도 여러분은 보고 있는 게 있어요.
이 방 전체를 보고 있을 거 아니에요, 그죠?
근데 이 방도 다 부셔버려.
그래서 <매트릭스>의 영화처럼
하얀 장면만 배경만 나온다 그래도, 뭐가 남아 있어요?
[자기의 봄과 앎]은 남아있잖아.
그러니까 그게 가장 궁극적인 [자기 자신]이라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게 [있는 그대로의 진리]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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