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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상식 세계사] 기니비사우 10분 완벽정리

Buddhastudy 2022. 3. 9. 19:28

 

 

[5분상식 세계사] 기니비사우 10분 완벽정리

 

1. 소개

기니비사우로 알려진 국가의 정식명칭은 Republic of Guinea-Bissau 기니비사우 공화국입니다.

기니비사우의 국기는 빨강, 노랑, 초록의 삼색기로

빨간 바탕에 커다란 검은색 별이 있습니다.

 

빨강, 노랑, 초록은 '범아프리카주의'의 색깔로

빨강은 독립투쟁에 의한 피를 의미하며

노랑은 북부 사바나와 풍요를

초록은 남부지방과 농업을 나타냅니다.

검은 별은 아프리카의 상징이며 국민의 단결을 의미합니다.

 

기니비사우의 이름은 수도 비사우에서 따왔으며

비슷한 이름의 국가인 기니, 적도 기니, 파푸아뉴기니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기니비사우는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국가로

아프리카의 서해안에 면하면서 북쪽으로는 세네갈, 남쪽으로는 기니와 인접해 있습니다.

국토 면적은 약 36,000^2km로 경상남북도를 합친 면적인 30,000^2km보다 조금 더 큰 면적에 해당합니다.

 

인구는 2019년 기준으로 약 200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이는 대한민국의 충청남도 인구수와 비슷합니다.

기니비사우의 1년 총 GDP2017년 기준 약 13억 달러.

이는 세계 168위로 비슷한 수준의 국가로는 세이셸, 솔로몬제도를 꼽을 수 있습니다.

 

기니비사우의 인구구성은 아프리카 흑인이 대부분이며

그 외에 포르투갈 식민시절 후손인 백인과 발란테종의 인종이 거주합니다.

 

기니비사우의 공용어는

포르투갈어와 여러 아프리카어가 혼합된 크레올어가 쓰입니다.

 

종교는 이슬람교도가 다수를 차지하며

그밖에 기독교와 토착신앙을 믿는 인구도 다수 존재합니다.

 

 

2. 역사

기니비사우는 1446년 포르투갈인에 의해 발견되어

포르투갈 최초의 해외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17, 18세기 포르투갈은 기니비사우와 인접한 대서양의 섬나라 카보 베르데에 노예무역의 거점을 두고

기니비사우 지역에서도 노예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했습니다.

기니비사우는 1879년 이후에는 공식적으로 포르투갈령 기니가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범아프리카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아프리카 각국이 독립하면서 식민지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기니비사우에도 1956년에 독립운동 단체인

기니비사우-카보베르데 아프리카 독립당이 결성되었는데요.

이 단체를 중심으로 1963년부터 본격적으로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항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랜 기간 치열한 독립 항쟁을 전개하면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게릴라식 독립항쟁을 꾸준히 해온 기니비사우는

국경을 맞대고 있던 서아프리카 국가들의 지원과 중국, 쿠바, 소련 등

공산주의권 국가들의 적극적인 원조 덕분에 포르투갈을 밀어내고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습니다.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기니비사우-카보 베르데 독립당은

19749월 정식으로 독립을 성취한 뒤

함께 투쟁했던 카보 베르데와 함께 통합하려 했으나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유럽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과 비슷하게

기니비사우 역시 독립 이후에 혼란한 시기, 무수한 쿠데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독립 이후 정치 실권을 장악한 PAIGC는 사회주의 정치 체제를 지향했습니다.

하지만 이와 다른 노선을 취했던 전 국회의장 주앙 베르나르두 비에이라가

1980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초대 대통령을 축출하고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로부터 18년 뒤인 1998,

비에이라 정권에 불만을 품은 군 참모총창이었던 안수마느 마네의 반란으로 내전이 발발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혼란하고 불안정한 시기를 거친 기니비사우는

1993년부터 국가 평의회를 폐지하고 대통령제를 실시하면서

조금씩 정국에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3. 정치 & 경제

기니비사우는 독립 이후 기니비사우-카보베르데 아프리카 독립당 PAIGC가 정치 실권을 장악합니다.

PAIGC는 지도층들이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어

1975년에 전 국토를 국유화하고, 비동맹 중립주의를 표방했습니다.

 

198011월 전 국회의장 주앙 비에이라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카브랄을 추방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후 19947월 실시한 대선 및 총선에서 승리한 주앙 비에이라는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1998년 전 참모총장 안수마느 마네의 반란으로

기니비사우는 다시 한번 내전에 휩싸입니다.

 

정국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던 안수마느 마네는 얼마 가지 않아 사망하고

포르투갈로 망명했던 조앙 비에이라가 돌아와 다시 정계에 복귀하게 되는데요.

2005년 대통령 투표에서 재선에 성공하였으나 2009년 군인들에 의해 피살되게 됩니다.

 

그 후에도 기니비사우의 정치계에는 심심치 않게 정치인 피살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때문에 UN, AU 등 국제사회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2014년 유엔 안보리에서 기니비사우 헌정 질서 회복을 논하게 되고

같은 해 호세 마리오 바즈 대통령이 당선됩니다.

 

그 이후로 기니비사우는 범인류적인 차원에서

포괄적인 기업 및 경제개발을 위한 국제사회의 체계적인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기니비사우는 세계 빈국 중 하나로

잦은 정치 내전으로 인해 경제가 더욱 피폐하였습니다.

경제는 농업과 어업에 의존하고 있으며

농업은 국내총생산의 40%, 노동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합니다.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하고 있는 기니비사우의 경제는

국가 주도 경제와 민간주도 경제가 혼합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1987년 정부가 자유시장정책을 받아들인 뒤 국가 주도의 경제활동은 급속히 감소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경제활동은 저조하여 일부 지방에서만 주식인 쌀과 땅콩, 코프라, 아몬드 등이 생산됩니다.

주요 산업으로는 정미, 야자유 제조, 땅콩기름과 같은 식품가공업이 있습니다.

 

토지 대부분이 국유화되어 있어 집단 농장 형태로 경작되고 있으며

땅콩과 코코넛은 중요한 황금 작물로써 총 수출 소득액의 약 40%를 차지합니다.

 

 

4. 자연환경 & 문화

기니비사우의 국토는 대부분이 늪지와 감목숲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니와 국경을 이루는 남동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하천의 삼각주 지대로 이루어져 있고

앞바다에 비자고스제도의 여러 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습지와 소택지가 많고 기후는 열대성 적도 기후로 전체적으로 고온다습한 편입니다.

 

연평균 기온이 약 26.3, 연평균 강수량은 약 2,000mm 정도인데

6월부터 9월 사이에 대부분 강수가 집중되어있다고 합니다.

 

기니비사우 하천의 삼각주 지대는 좀처럼 보기 힘든 야생동물들의 서식지로도 유명합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플라밍고와 펠리컨과 같은 새들이 있고

크로커다일, 도마뱀과 같은 파충류에서부터 멸종 위기인 바다거북까지 이 삼각주 지대에 서식하고 있습니다.

 

포르투갈로부터 오랜 식민지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니비사우의 문화 전반에 걸쳐 아프리카 전통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는데요.

특히 아코디언과 비슷하게 생긴 가이타라는 악기연주에 맞춰 춤추고 노래하는 푸나나 등이

기니비사우의 도시와 타운에서도 여전히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합니다.

 

기니비사우 사람들은 많은 아프리카 전통 스포츠를 즐깁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레슬링이 가장 전통이 깊고 유명하다고 하는데요.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레슬링 종목에 출전했을 정도로 레슬링 사랑이 대단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사랑받는 스포츠에는 역시 축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86년부터 정식 축구리그가 출범했고

피파에도 가입하여 국가 대항전에도 꾸준히 출전해오고 있습니다.

 

기니비사우는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도 발전된 문화시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수도인 비사우에는 국립 예술 학교가 있어 많은 콘서트를 지원하고 있으며 춤과 음악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수의 공공 도서관과 박물관 미술관 등이 있어서

국민들의 문화적 소양 고취에 적극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인물

기니비사우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로는 아밀카르 로페스 카브랄이 있습니다.

카브랄은 기니비사우의 작가이며 농업기술자임과 동시에 혁명가이기도 합니다.

 

1924년에 포르투갈령 기니의 바파타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를 마치고

1945년부터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농학을 배웠습니다.

 

리스본 대학에서 앙골라 출신의 아고스티노 네토를 만나

아프리카 민족주의 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1952년 마리아 엘레나 카브랄과 결혼한 이후

조국인 포르투갈령 기니로 돌아와 농업 기술자로 일하지만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2년 뒤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1956년 카브랄은 고국으로 다시 귀국하자마자 아프리카 독립당을 결성하였고

리스본 대학에서 만났던 아고스티노 네토와 함께 독립운동을 시작합니다.

초기 독립운동은 평화적이였으나 포르투갈군의 압박과 대치하며 점점 무력으로 대항하고

이후 독립당을 발전시켜 기니비사우-카보베르데 아프리카 독립당 PAIGC를 결성하게 됩니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카브랄은 PAIGC의 지도자가 되며

포르투갈과의 본격적인 항쟁을 시작합니다.

 

1972년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을 위해 인민의회를 창설하지만

이듬해 기니의 수도 코나크리에서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은 사람에게 암살당합니다.

 

이후 그의 동생 루이스 카브랄이 기니비사우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아밀카르 로페스 카브랄은 국민적으로 기억되는 혁명가가 됩니다.

 

이후 그의 이름은 카보베르데의 아밀카르 카브랄 국제공항과

서아프리카의 축구 대회인 아밀카르 카브랄 컵으로 쓰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