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는
오감으로 들어오는 외계의 정보들 가운데
믿을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보를 인식하고 있는 ‘나’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입니다.
쉽게 말해 세상의 중심은 ‘나’라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있는 걸까요? 아니면 없는 걸까요?
사실 이 물음은 수행의 시작과 끝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심층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류가 그동안 찾아낸‘나’에 대한 가정은 딱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나’를 구성하는 물질이 해체되면 ‘나’는 없다/는 유물론입니다.
두 번째는 /‘나’를 구성하는 정보들이 흩어지면 그 바탕에 진짜 ‘나’가 있다/는 힌두교의 ‘아트만(참나)’사상입니다.
전자의 유물론은 무아이고
후자의 힌두교는 유아입니다.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유물론에서의 ‘나’란
물질의 조합에 의해 만들어진 생명체가
정보를 취합하면서 ‘나’라는 관념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물질들이 조건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가운데
‘나’가 홀생홀사한다는 무아론을 견지합니다.
이에 반해 힌두교의 ‘참나’는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물질이나 정보들이 모두 사라져도
그 바탕에 상주하는 실체가 남는데
이것이 진짜 ‘나’인 ‘참나’라고 합니다.
앞선 유물론의 무아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전형적인 유아론입니다.
이처럼 ‘나’에 대한 주장은 유물론의 무아와 힌두교의 유아로 확연히 갈립니다.
이렇게 두 견해가 상충하는 가운데 싯다르타라는 불세출의 성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과연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게 될까요?
싯다르타는
“‘나’는 연기법에 의해 잠시 머물다가 사라진다.
따라서 ‘나’는 조건 발생적이며, 그래서 그 실체가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즉 유물론의 무아와 똑같은 주장을 펼치게 됩니다.
유물론에서 주장하는 ‘물질들의 이합집산’이 ‘연기법’으로 개명한 것을 제외하면
다른 점을 찾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되자 커다란 의문이 생깁니다.
인류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이라는 싯다르타가 주장한 것이
고작 유물론의 무아와 별로 차이가 없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되자 불제자들은 세존의 무아를 다듬을 필요가 생깁니다.
그래서 세존의 사후 제자들은
불교의 무아는 유물론의 무아와 결이 다르다는 논리를 만듭니다.
이것을 위해 유물론에서 ‘무아’를 삭제하고 ‘단멸(斷滅)’이라는 용어를 붙입니다.
그리고는 힌두교의 ‘참나’와 유물론의 ‘단멸’을 양극단으로 놓고
그 가운데에 싯다르타의 무아를 집어넣습니다.
결과적으로 싯다르타의 무아는
힌두교의 ‘참나’도 아니고 유물론의 ‘단멸’도 아닌
中道라는 것이 됩니다.
즉 싯다르타의 무아는 힌두교의 유아론을 부정하면서도
유물론처럼 ‘나’가 완전히 사멸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입니다.
‘나’가 연기법에 따라 조건적으로 발생하기에
‘참나’와 같은 상주하는 실체가 없지만
그렇다고 유물론처럼 완전히 끊어져 소멸하는 것도 아니라는
괴상한 얘기입니다.
이렇게 힌두교와 유물론의 중간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서 자리를 차지한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질문해 봅시다.
“불교의 무아는 ‘나’가 있는 겁니까, 아니면 없는 겁니까?”
이렇게 재차 질문하면
불제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답이 길어집니다.
연기법을 끄집어내면서
힌두교와 유물론의 중간을 설명하기 위해 진땀을 뺍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을 애써서 꾸며내려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아무튼 초기불교에서 연기법으로 무아를 풀어
힌두교와 유물론의 가운데를 차지하려는 발상은 참으로 낯부끄러운 얘기입니다.
이런 사실에 창피함을 느낀 불제자들은
싯다르타의 무아를 고차원적으로 해석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유물론에서 쓰는 연기법대신
형이상적 해석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것이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해서 태동한 중관학파의 공사상입니다.
중관학파는 공을 통해 무아를 재해석함으로써
힌두교와 유물론의 가운데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데 주력합니다.
나도 공하고 법도 공하여
나라고 할 실체가 없다.
그런데 그 공한 것이 이어짐으로써
유물론의 단멸도 아니라는 논리가 됩니다.
쉽게 말해 무아는 공이며
그러므로 힌두교의 유아도 아니고
유물론의 단멸도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이 역시 애매모호하긴 하지만
연기법보다는 좀 더 그럴싸해졌습니다.
공에 뭔가 심오한 비밀이 숨어있는 것 같은 냄새를 풍김으로써
일단 무아가 지닌 이중성을 덮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 가지 않았고
공의 모호성에 지친 수행자들이
공 속에 상주하는 실체가 있다는 주장을 다시 펴게 됩니다.
이것이 대반열반경, 여래장경, 화엄경 등에 나오는
여래장 사상입니다.
여기에 유식사상이 나와 이론적 뒷받침까지 해주게 되니
불성이 부각되면서
싯다르타의 무아는 다시 힌두교의 참나가 되고 맙니다.
이처럼 무아의 변천사를 되돌아보면
참으로 우왕좌왕이고 오리무중입니다.
오늘날에도 초기불교의 연기, 금강경의 공, 화엄경의 불성 등으로 쪼개져서
무아에 대한 해석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 얘기는 무아에 대해 답을 못 찾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무아를 모르니 해괴한 논리 다툼이 끊이질 않는 것이지요.
단언하자면 초기불교의 연기론적 무아,
중관학파의 공으로 푼 무아
화엄경의 불성으로 푼 무아
유식사상의 식으로 푼 무아등은 모두 정답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그냥 힌두교나 유물론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합니다.
사실 힌두교의 참나가
단순히 상주불변하는 ‘나’가 있다는 단답형으로 끝나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속엔 연결을 통한 연기론이나 송의 섭리도 모두 녹아 있습니다.
즉 참나의 여러 속성들을 꺼내서 불교적 해석을 가미해 봤자
죄다 표절이고 아류에 불과하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싯다르타의 무아는 도대체 무얼까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나’가 있나요? 아니면 없나요?
그것도 아니면
‘나’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가요?
혹시 ‘나’가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건 아닐까요?
여러분, 존재에 대해 모르는데
이런 의문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1+1을 알아야
100+ 100을 따질 수 있는 것처럼
존재가 뭔지도 모르면서
무슨 ‘나’의 유무를 가지고 그토록 다투시나요?
존재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어떻게 창조 활동을 하는지를 알아야
나를 따질 수 있습니다.
존재를 알려면 존재의 시작점인 제1원인을 알아야 하고요.
제1원인을 알면 싯다르타 무아는 저절로 풀립니다.
싯다르타의 무아는
존재의 근원인 제1원인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아를 알면 깨달음이 저절로 열립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불교의 고차원적 깨달음이며
싯다르타가 무아를 전해준 이유입니다.
소득 없는 말꼬리 잡기 놀이에 빠지지 말고
제1원인의 화두를 잡고
참구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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