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간화선의 위기! ‘몰라’에 열광하는 한국불교

Buddhastudy 2022. 4. 7. 19:07

 

 

차원에 갇히면 모든 지식이 그 차원의 범주 내에서만 가능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더 높은 차원은 상상으로도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수행자들이 형이상의 세계를 아무리 궁구해도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력을 다해 알려고 해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고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여기서 발상의 전환이 생깁니다.

진리라는 건 알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냐는 추측입니다.

다시 말해 全知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본인 스스로 진리를 모른다고 자백하는 꼴이 되겠지요.

그래서 에서 모름으로 가고

모름에서 다시 앎과 모름이 한꺼번에 사라져

깨달음에 이른다는 얘기가 등장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런 말이 이해가 가시나요?

 

 

다음은 어느 유명한 스님이 간화선의 오직 모를 뿐에 대해 기술한 내용입니다.

나는 누구일까?

잘 모른다.

지금이 언제인가?

우주적 차원에서 따지면 지금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

이곳이 어디인가?

우주의 무변허공 속에서 여기가 어디라고 정확히 말할 수 없다.

무엇을 위해 왜 사느냐는 질문도 마찬가지이다.

육하원칙에 따라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다.

 

수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모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선문(禪門)에서 말하는 간화(看話)가 이것이다.

 

이것이 무얼까?

지극히 묻고 또 묻고, 계속해서 묻다 보면 물음 속에 푹 빠지게 된다.

이것을 선문에서는 의심, 의정, 의단 등으로 표현하는데

결국 여기엔 답이 없다.

 

있는 것은 오직 모른다는 사실하나뿐이다.

이때 모름속에서 일체의 이 끊어진다.

이 사라지면서 모름도 사라져 텅 비게 된 자리가 본성이고 깨달음이다

 

이상의 내용은 몇몇 스님의 주장이 아닙니다.

간화선을 주종으로 삼는 한국불교의 전체적인 공론입니다.

 

결국 진리는 지식으로 알 수 없고

이 사실을 받아들일 때

알려고 하는 마음이 정지하면서

마음 바탕에 이르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몰라가 깨달음에 이르는 동아줄이 됩니다.

 

간화선은 화두를 통해 의심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인간이 지닌 이성을 극대화하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그 출발은 가히 수행의 정석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그런데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져 버렸습니다.

진리를 알 때까지 의심을 놓지 말아야 하는데, 중도에 포기하고 만 것입니다.

 

수행자들 가운데 화두를 통해 진리를 깨우친 사례가 나오지 않자

답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줄을 이었고,

여기서 오직 모를 뿐으로 전향하게 된 것입니다.

 

몰라가 되면 답을 찾으려는 마음 작용이 멈추고

사마타나 위빠사나에서 오는 선정과 유사한 마음 상태가 됩니다.

이것을 좀 더 비워 해탈이나 열반으로 포장하고

혹은 아뢰야식에 빗대어 순수의식이나 참나를 덧씌우게 됩니다.

 

어찌 되었든 몰라구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함으로써

응무소주의 마음을 조성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깨달음의 실마리를 찾게 됩니다.

 

결국 간화선은 진리적 자각을 위해 출발했다가

중도에 그것을 포기하고 상태적 심리로 선회하였습니다.

 

그리고 적잖은 수행자들이 여기에다 불성을 첨가함으로써

힌두교의 참나가 되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수행 중에

용이 되어 승천할 수 있는 것이 간화선이었건만

의심을 중도 포기함으로써 이무기가 되고 만 것입니다.

 

 

차원을 낮춰, 2차원의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2차원의 수행자는 아무리 고차원을 화두로 삼고 궁구해도

그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의심의 궁극에 이르러 모른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앎도 모름도 다 놓아버리고 해탈에 이를 수 있겠지요.

그리고는 이 마음을 깨달음에 연결 지을 것입니다.

 

그런데 3차원 존재가 이런 2차원 수행자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자신의 무식을 감추기 위해 해괴한 구실을 가져다 붙인다며

혀를 끌끌 차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오직 모를 뿐

심하게 이야기하면 저차원 존재의 발악이며

구차한 변명일 따름입니다.

 

서두에서 한 스님이 도무지 답을 알 길이 없다고 예시한

존재론적 의문들은 사실 매우 쉬운 명제들입니다.

 

이미 세존과 용수가 무아와 중론으로써

그 답을 쉽게 알려주지 않았겠습니까?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몰라를 수행의 대들보로 삼는 것은

한편의 희극에 불과합니다.

 

요컨대 진리는 오직 모를 뿐을 통해

모름과 앎이 사라진 경계에서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름과 앎이 사라져봤자, 남는 것은 그냥 무지이고 무식입니다.

 

수행자들이 무지와 무식에다 해탈 열반 불성등의 화려한 수식어를 붙여봤자

진리를 모른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진리는 앎의 영역입니다.

수학의 공리보다도 명확해서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무식을

몰라로 감추는 위선을 언제까지 하실 작정인가요?

 

사람들의 눈을 속여

몰라로 자존감을 높일 수는 있지만

인생은 짧고 당신의 수행은 허망하게 끝이 날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진리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