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 주체가 ‘나’이므로 구도의 목적은
당연히 ‘나’의 문제를 푸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문제는 또 무엇일까요?
그건 생로병사와 더불어 ‘나’의 존재 의미를 찾는 데에 있습니다.
쉽게 말해 ‘영생하는 무한 가치를 지닌 나’가 수행의 목표이고
이런 ‘나’에 걸맞은 존재가 바로 붓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문제를 풀 때
그 답을 미리 정해 놓으면 어떨까요?
원하는 답을 미리 상정하면 당연히 문제를 풀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부지불식중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해석해서 답을 꾸며내기 때문입니다.
이 얘기는 ‘붓다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는 한
참된 수행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상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행에 발을 들이면
그 과정과 결과가 왜곡되는 건 자명한 이치입니다.
자, 그렇다면 아상이 원하는 ‘나’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선 ‘나’는 영원불멸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현재의 ‘나’는 이리저리 살펴봐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이런 ‘나’를 가짜 ‘나’로 치부해 버리고
진짜 ‘나’인 ‘참나’가 따로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럼 ‘참나’가 어디에 있을까요?
가짜 ‘나’가 사라지고 난 바탕에 이벤트처럼 짠! 하고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논리가 너무 단순하면 거짓말처럼 느껴져 세뇌나 최면이 잘 안 됩니다.
그래서 그럴싸한 비유가 필요한데, 가장 많이 통용되는 예시가 바로
‘얼음과 바닷물’입니다.
얼음이 현재의 ‘나’입니다.
에고(ego)가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는 가아(假我)의 상태입니다.
얼음(에고)이 녹으면 현재의 가아(假我)는 사라집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나’가 녹으면서 바닷물과 하나가 되어버렸으니까요.
‘나’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바다’ 전체가 된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바닷물의 일부가 얼어서 현재의 ‘나’처럼 된 것 뿐이지
원래 ‘나’는 바다라는 얘기입니다.
이런 비유를 들어 가아(假我)가 사라지면
저절로 우주의식과 하나로 합쳐지고
그래서 (나 = 붓다)라는 공식이 나오게 됩니다.
정리하면
얼음과 바다가 둘이 아니듯
‘나’와 ‘전체’역시 둘이 아니며
따라서 진짜 나의 모습은 삼라만상 그 자체가 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힌두교의 아트만(참나) 사상입니다.
아상이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만들 때
이보다 더 심플하고 비전 있게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스테디셀러가 된 것은 필연입니다.
그렇다면 싯다르타의 無我는 무엇일까요?
적잖은 불제자들은 無我가 얼음(假我)에 기준을 둔 명제라고 합니다.
얼음이란 인연에 따라 물 분자들이 엉켜 있는데
이것들이 녹으면 얼음이라고 할 것이 없어집니다.
그것이 우물에 흘러가든 바다로까지 이어지든 상관없이
얼음의 범위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이처럼 싯다르타는 얼음에 해당하는 현재의 ‘나’가 없다는 의미에서
無我라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얼음은 無我여도 바다는 有我이기에
싯다르타의 無我는 참나와 같아지게 됩니다.
관점을 얼음에 두느냐 바다에 두느냐에 따라
無我 혹은 有我가 되는 것이지요.
이런 논리로 여래장 사상이 등장하고
결국 佛性이 받아들여지면서 불교와 힌두교가 같아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싯다르타는 현재의 ‘나’만 가리켜 없다고 말했을까요?
아니면 현재의 ‘假我(얼음)’가 녹은 뒤에 나타나는 전체의식(바다)마저 없다고 말했을까요?
전자라면 힌두교의 표절이고
후자라면 전형적인 유물론이 될 것입니다.
가히 진퇴양난에 걸리지 않았겠습니까!
싯다르타는 힌두교의 참나를 완전히 부정했습니다.
그렇기에 불교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싯다르타는 유물론을 철저히 거부했습니다.
그렇기에 불교가 지탱하여 오늘에까지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힌두교도 아니고 유물론도 아닌 그 중간의 자리가 있을까요?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자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유아가 아니면서 단멸도 아닌 중간 자리가 안 보이니
불교의 역사는 시종일관 무아 찾기 게임이었습니다.
그러다 1920년대에 이르면서 상황은 돌변합니다.
양자역학에서 소립자의 세계를 관측하면서
상태중첩이라는 놀라운 현상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관찰의 순간까지 상반되는 두 현상이 공존한다는 사실은
당시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전 인류의 사고 체계를 일시에 무너뜨렸습니다.
정과 반이 합으로 있는 미시 세계의 발견은
고전 물리학과 현대 물리학을 나누었고
오늘날의 온갖 문명의 길을 만들어내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원점으로 돌아와서
힌두교의 유아와 유물론의 무아(단멸)의 가운데가 있을까요?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유아와 무아가 상태중첩으로 공존한다는 명제가 나올 것입니다.
이 얘기는 유아도 무아도 답이 아니게 됩니다.
유아와 무아의 경계가 없는 중도인 것이지요.
결국 나의 유무 문제는 양자역학으로 풀면
유이무나 비유비무가 됩니다.
그렇다면 양자역학의 상태중첩이
싯다르타가 말한 무아의 중도가 맞을까요?
나가 있다는 힌두교나
나가 없다는 유물론보다
양자역학의 견해가 좀 더 정답에 가까운 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소립자의 세계가
현상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태중첩의 유이무나 비유비무는
정답을 얻기 위한 매우 중요한 징검다리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현대물리학 덕분에
중도를 향한 발판을 얻었습니다.
이제 수행자들은
과학이 만들어준 계단에 발을 올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상태중첩의 너머에 있는
고차원 존재를 탐구하면 됩니다.
바로 실존(제1원인)말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현대물힉에서 쏟아지는
생생한 법문들을 놓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상태중첩보다 더 단순한 5차원 구조
여기에 싯다르타의 깨달음이 숨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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