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응보를 제시하는 업(業) 이론은
불교와 힌두교의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신도들은 어떡하든 선행을 쌓으려 하고
수행자들은 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음공부에 전념하게 됩니다.
수행자들에게 있어서 업은
수행의 방향을 알려주는 일종의 나침반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업은 구체적으로 수행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요?
첫 번째, 수행의 업을 쌓아 그것이 이생에서 내생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두 번째, 업의 힘을 줄이기 위해 탐진치 삼독을 없앱니다.
세 번째, 업의 근원인 생각을 뿌리째 없애거나 끊어 냅니다.
이처럼 업은 수행과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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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업이란 것이 실제로 있을까요?
화엄경 해보면 나의 실체가 없듯 업 역시 그 실체가 없다고 합니다.
업을 있다고 보면 있고 없다고 보면 또한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업의 영향을 부풀려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그 업을 어떡하든 잘 짓기 위해 마음을 담는다는 명제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거울에 빗대고 그것에 붙은 탐진치의 때를 닦는다는 개념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이것이 모든 수행의 공통분모라는 마음공부입니다.
인류가 수행을 시작하고 나서 단 한 사람도
마음공부에 대해 이견을 제시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마음공부는 수행의 절대적 과제로 통영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공부에 집중하면
그 구조상 수행의 시간이 거의 무한대로 늘어나게 됩니다.
마음을 한 점의 티끌도 없이 닦기 위해서는
영원한 시간 동안 수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건 깨끗하다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 자체가 번뇌와 망상이 인데 무엇을 어떻게 담는다는 것일까요?
비유하자면 허공에서 때를 닦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마음은 모형의 허공과 같아 닦는다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닦는다는 것만큼 괴상망측한 것도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마음을 담는다는 것은
가치관을 올바르게 정립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리 판단이 반듯해서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견식이 생긴 것입니다.
/나만 보지 않고
우리를 보면서 판단할 수 있는 가치관/
이것이 마음이 닦인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종교인들 가운데는 효녀 심청처럼 순하고 선한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정말 마음이 거울처럼 깨끗해 보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속한 종교가 핍박받았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시한폭탄을 허리에 두르고
자폭을 감행하거나 그러고 싶은 생각이 굴뚝처럼 치밀어 오릅니다.
조금 전에 봤던 맑고 깨끗한 그들의 마음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이처럼 마음이 닦여 있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어떤 대상이 아니어서 얼룩 찌거나 닦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늘 그 모습 그대로 청정히 존재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탐진치를 털어낸다는 것은 역대극 희론입니다.
/나를 포함한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가치관을 키우면/ 그것이 진짜 마음공부가 됩니다.
이 얘기는 직접 공부가 마음공부라는 얘기입니다.
잡지 식만 가득 쌓아 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철학 공부와 올바른 가치관의 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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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세상에는 마음공부 타령이 그치질 않는 것일까요?
사람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채찍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신앙입니다.
신앙으로 길들이면 사람들이 로봇처럼 변하게 지배자의 구미에 딱 맞습니다.
그런데 지적 수준이 좀 높은 분들은 신앙이 여간해선 주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마음공부입니다.
마음공부는 탐진치를 제거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런데 잘 따져보면 마음에서 탐진치를 지우면 지울수록 조직에 대한 순응도는 높아집니다.
그 권력을 탐하지 않고 권력에 억압의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권력에 대항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되니까요.
이는 마치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설과 일치합니다.
그 원죄라는 것이 불교나 힌두교에서는 탐진치 3독인 것이지요.
이렇게 사람들을 문제가 있는 존재로 놓고 출발해야
조직은 번성하게 됩니다.
사실 탐진치라는 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눈앞에 칼이 놓여 있다고 칩시다.
이 칼을 보고 좋다 나쁘다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칼은 쓰기에 달렸으니까요.
탐진치 역시 똑같습니다.
탐진치를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데에 쓰지 않으면 됩니다.
가령 탐을 구도욕이나 청사진의 설계의 쓰고
진을 아상을 타파하는 동력으로 삼고
치를 겸허하고 양보하는 하심에 활용하면 되는 겁니다.
즉 탐진치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쓰는 사람의 가치관의 달린 것입니다.
자신의 이성적 수준을 높이면
마음공부는 저절로 됩니다.
그런데 그럴 생각은 않고 탐진치를 없애려고 마음을 헤집는다면
이것이 도리어 마음에 흙탕물을 일으키는 꼴이 됩니다.
가령 3살 때부터 마음공부에 전념하는 유교의 사대부들이 어떠하며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친 종교인들의 마음이 어떠하며
마음을 전문적으로 닦는다는 수행자들의 마음이 어떠하던가요?
사실 평범한 사람들과 차이가 없으며, 어떤 면에서는 훨씬 못하지 않던가요?
이런 점 때문에 노자가 세상에서 말하는 선이란 것이
사실은 선이 아니다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 선행이나 양심을 강조하면 그것과 반대되는 개념도 따라붙어
사실상 효과가 없게 되고
심지어 작위에 의해 더 안 좋게 변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렇기에 신앙이나 마음을 강조하기보다는
지적 가치관을 바로잡고
철학적 소양을 쌓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입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탐진치를 없애려 하시나요?
탐진치 때문에 중생이 되었다는 말을 믿으시나요?
/탐진치는 없앨 대상이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냥 두면 청정한 마음을
자꾸만 휘젓지 마시고
있는 그대로 놔두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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