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의 여러 기록에 나오는 선문답들은
대부분 스승과 제자, 선사와 학승, 스님과 납자 사이에
주고받는 가르침과 헤아림의 대화들입니다.
하지만 상당한 부분이
같은 수준에 이른 스님들끼리
서로를 짚어보고 시험하는 이야기로도 이루어졌는데
선사들 사이의 선문답은
오히려 팽팽한 긴장 때문에 검객들의 일합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남전 선사가 암자에 살고 있을 때
어떤 스님이 찾아오자,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산으로 들어갈 것이니
조금 이따 차와 밥을 가져다주게”
그 스님은 즉시 응낙했다.
그러나 남전 선사가 산으로 올라간 후
그 스님은 암자의 가구들을 죄다 부셔서 불을 지피고는
그 옆에서 네 활개를 벌리고 낮잠에 들었다.
남전 선사가 얼마 후에 돌아와 보니
그 스님이 잠이 들었기에 그 옆에 누워서 함께 잠을 잤다.
얼마 후 그 스님은 잠에서 깨자 훌쩍 떠나버렸다.
남전 선사는 몇 해를 살다가 여러 대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처음 이 암자에서 살 때
영리한 중 하나를 보았는데, 아직껏 다시 보지도 못했다.”
암자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가구를 다 때려 부수고 잠을 자는 중이나
자리 비운 사이에 다 부서진 것을 보고도
부순 사람 옆에서 같이 잠을 자는 사람이나, 대단합니다.
같은 느낌과 뜻을 알지 못하면 이러기는 어렵습니다.
차와 밥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집기를 부수어 불을 떼버려도 상관없는 상황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흔적도 남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작업할 때였다.
황벽이 괭이질을 하고 있는데
임제가 빈손으로 오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괭이는 어디 있느냐?”
“어떤 이가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가까이 오너라. 너와 함께 이 일을 따져 봐야겠다.”
임제가 곧장 가까이 가자 황벽이 괭이를 세우며 말했다.
“이것은 천하의 누구도 집어 갈 수 없다.”
임제가 손을 뻗어 괭이를 잡아당겨 세우면서 말했다.
“어찌하여 도리어 제 손아귀 속에 있습니까?”
황벽은
“오늘은 울력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고는 곧 절로 되돌아갔다.
뒷날 위산이 앙산에게 물었다.
“괭이는 황벽의 손에 있었는데, 어떻게 하여 임제에게 빼앗겼을까?”
앙산이 말했다.
“도적이 소인이긴 하나, 지혜는 군자보다 낫습니다.”
황벽은 임제가 일 나가면서 괭이가 없다고 타박한 것이 아니라
슬쩍 떠본 것입니다.
임제는 여지없이 대듭니다.
어떤 이가 가지고 갔다.
이제 본 심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황벽이 임제를 불러 세웁니다.
황벽이 천하의 그 누구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그것이라고 곡괭이를 세웁니다.
곡괭이가 졸지에 법신불이 되었습니다.
임제는 곡괭이를 뺏어와 화신불을 만듭니다.
어찌 여기 이렇게 있습니까?
소인의 도적 행세가 군자보다 나은 지혜라는 앙산의 대답은
울력할 곡괭이를 제자에게 넘기고 빈손으로 들어가는 황벽이
아무도 모르게 미소 짓는 것을 알지 못한 때문일 겁니다.
대사가 하옥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천태에서 옵니다.”
“내가 언제 그대에게 천태를 물었는가?”
“화상은 어찌 용두사미가 되십니까?”
“오늘은 내가 실패했구나.”
하옥은 ‘어디서 오는가?’를
이미 선으로 받아 ‘천태에서 온다’고 대답합니다.
대사가 천태를 묻지 않았다는 말조차 낭비라고 합니다.
대사가 인정합니다.
질문이 한마디를 넘기지 않습니다.
마조 아래에서 수행하던 남전과 귀종, 마곡이
혜충 국사를 뵈러 며칠 걸어가던 중에
남전이 길바닥에 커다란 원상을 하나 그려놓고 말하길
“한마디 일러라.
바로 이르지 못하면 국사를 친견하러 갈 수 없다”
귀종은 원상 안에 주저앉았고
마곡은 원상을 향해 색시 같은 가벼운 합장을 했다.
그러자 남전이 말했다.
“그대들이 그렇게 이른다면 국사를 친견하러 갈 수 없다.”
귀종이 남전에게 일렀다.
“이게 무슨 수작인가?”
원상 법문은 혜충국사가 처음으로 선문답으로 썼다고 합니다.
남전이 이를 알고 가는 길에 질문을 던졌던 것이죠.
그리고 같이 가던 동문수행 귀종과 마곡이
남전의 요청에 앎을 드러냅니다.
그러자 남전이 또다시 국사를 친견하러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처음 낸 문제와 같죠.
못 이르면 갈 수 없고, 일렀더니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남전은 한 번 더 문제를 낸 것입니다.
오히려 갈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뉘앙스였을 것입니다.
같이 가전 도반들이 이미 원상을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자 귀종이 수작 떨지 말라고 합니다.
다 알고 있으니 그만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후대의 원오 스님은 이 장면을 두고
“한 사람이 북을 치니, 세 사람의 성자를 얻었네”라고 말합니다.
위산이 앙산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밭에서 옵니다.”
“밭에는 몇 사람이나 있던가?”
앙산이 땅바닥에 가래를 꽂고는 합장을 하고 섰다.
“남산에서 많은 사람들이 띠를 깎더구나.”
앙산은 가래를 뽑아들고 가버렸다.
사형과 사제는 빈틈을 보이지 않고 서로를 시험합니다.
사람이 몇인지를 묻자
가래를 땅에 꽂아 무심수행을 내비칩니다.
위산이 한 번 더 수작을 걸어
잡초를 뽑는 시시한 일 따위가 아니냐고 하자
가래를 뽑아 가버립니다.
탐원이라는 제자가 마주 앞에다가
일원상을 하나 그린 뒤에 그 위로 나아가 절을 하고는 섰다.
마조가 말했다.
“너는 부처 노릇을 하고 싶은 것이냐?”
“저는 눈을 비벼서 헛꽃을 만들 줄 모릅니다.”
“내가 너만 못하구나.”
제자는 대답이 없었다.
“스승님, 눈을 비벼 만든 헛꽃이라고
마음 놓고 또 비비면 눈병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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