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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T PARK] 인간은 왜 사회적동물인가? — '출산의 딜레마'가 제시하는 과학적 근거

Buddhastudy 2021. 5. 17. 19:06

 

 

어떤 수행자가

집도 버리고, 재산도 버리고, 명예도 버리고, 애욕도 버리고, 다 버리고 도를 이루기 위해서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아무도 안보는데서 내 맘대로 공부를 하겠다. 이래 가지고

마을로부터 한 이삼십리 떨어진 산골짜기로 혼자 드갔어.

그래가지고 정진을 하러 드갔는데

우선 혼자 있으니까 비가 오니까 비를 맞고는 못 살잖아, 집을 지어야 되잖아 그죠?

산에 나무해다가 천막 지어야지

그면 또 뭐가 있어야 한다?

먹을 것도 있어야 되잖아 그죠?

마을까지 내려와서 삼십리길을 걸어 내려와가

또 먹을 걸 얻어가

삼십리길을...

공부를 할 시간은 없고 집수리 하고

이렇게 하는 동안에 몸을 무리해 가지고 병이 났어.

그래서 의사 처방이 뭐냐? 몸을 좀 보할라면

우류를 하루에 한컵씩 먹어야 된다.

그래서 마을에 내려와 우유 한컵 얻어먹고 올라가고

마을에 내려와 우유한컵 먹고 올라가니까

도저히 공부할 시간이 안나.

그래서 연구를 했어.

염소를 한 마리 먹이면 왔다갔다 안해도 되지 않냐 이거야.

그래놓고 젖을 짜먹고 이제 왔다갔다 안하는데

이놈의 염소를 또 도망가니까 찾아와야지, 또 메놔야지 풀어줘야지

공부할 여가가 없는 거요. 이 염소 때문에.

그래서 할 수 없이 염소를 봐줄 목동을 하나 구한거요.

염소를 봐줄 목동을 하나 구해놓으니깐

인건비를 또 구해야 돼.

그러니까 탁발다니는 일이 이 사람 먹을 것까지 구해야 되니까

탁발 다니다가 시간 다 보내.

그래 가지고 또 생각을 냈어.

차라리 이러느니 여자를 데려와서 같이 살면

좋은 아이디어다 싶어 여자를 데려와서 같이 살았어.

그니까 인제 월급은 안 줘도 돼.

그래서 이제 공부하려고 했는데 애가 생겼어.

식구가 하나 더 늘어난 거야.

그래서 그 멀리 도망을 가서

그 깊은 산중에서 결국은 결혼해서 애 낳고

하루하루 먹기 위해서 허겁지겁했데요.

 

이게 인생이에요.

 

--

이것이 인생이다.

수행하러 깊은 산속에 들어갔다가

, 음식, 의사, 가축, 목동, 아내가 필요했고

결국엔 아이를 가져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삶을 살았다는

법륜스님의 이 이야기는

마음과는 다르게 결국 인생 닥치는 그 순간순간을 모면하며

살아가기 바쁜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 인간은 결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작정하고 수행을 위해 출가한 이들조차 먹고살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고

사실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주인공들조차 혼자서 모든 의식주를 해결하지는 않죠.

인간은 오랜 옛날부터 가정을 부족을 사회를 또 국가를 이루며 함께 지냈습니다.

인간은 분명 사회적동물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사회적동물이라는 명제에는 어떤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일까요?

놀랍게도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사회적동물입니다.

우리가 인간의 출산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그 과학적인 근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출산은 다른 동물에 비해 유달리 큰 고통과 위험을 수반합니다.

유전적으로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친척인 침팬지의 경우만 해도

산도의 넓이가 새끼를 출산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혼자서 출산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골반 내부의 공간이 새끼의 머리보다 충분히 넓어서 그저 자궁 속에 있다가 그대로 산도를 타고 나오면 되는 것이죠.

이렇게 비교적 큰 골반, 큰 산도를 가지는 유인원이나 원숭이의 경우

대개 새끼를 낳을 때는 중력의 도움을 받기 위해 쪼그려 앉게 되는데요

산도 밖을 나올 때, 새끼 얼굴은 어미의 얼굴 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미는 손을 뻗어 새끼가 얼마나 나왔나 스스로 확인도 하고 또 잘 나올 수 있도록 가이드합니다.

새끼가 완전히 빠져나오면 어미는 측각 새끼를 끌어안아 얼굴이나 몸에 붙은 점액 등을 제거하게 되죠.

 

인간의 출산에 비해 원숭이는 뭔가 비교적 편안해 보이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넓은 산도를 가진 스스로 출산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산도는 그 크기가 신생아의 머리보다도 더 작습니다.

산도보다 큰 머리가 통과하려면 산모의 골반은 벌어져야 할 수밖에 없는데요

이는 그 자체로도 큰 고통이며 좁은 산도는 산모와 태아 모두에게 있어 큰 위험이기도 합니다.

 

의술이 발달하지 않는 시절에는 수없이 많은 산모들이 이러한 출산 과정에서 사망하였으며

21세기 현재에도 제왕절개 시술이 불가능 하다는 등

열악한 환경에 처한 개발도상국에서는 연간 30만명의 산모들이

임신과 출산의 과정에서 사망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류가 후손을 남기는 이 중요한 순간에서

목숨을 건 위험을 감수했던데는 동시에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 진화적 압력이 존재했기 때문인데요

그 한가지는 큰 뇌 용량이고,

다른 하나는 직립보행이었습니다.

 

큰 머리의 아기를 원활하게 출산하기 위해서는 골반이 넓어야 합니다.

하지만 넓은 골반으로는 직립보행을 할 수 없습니다.

 

침팬지와 사람과 비교해 볼까요?

넓은 골반을 가지 침팬지는 인간과 같은 완전한 직립보행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임시적으로 두 발로 걸을 때보면 침팬지는 넓은 골반으로 인해 양쪽 다리가 벌려있고,

하지만 인간은 비교적 좁은 골반으로 인해

양쪽 다리고 중력 방향으로 똑바로 서게 되어

골반의 움직임도 줄어들고 무게중심도 잘 잡을 수 있죠.

 

그렇게 두 발로 서게 된 인간은 큰 뇌와 자유로워진 양손을 이용해 도구도 만들고

혼자서 혹은 함께 사냥도 하면서 서서히 먹이사슬의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었죠.

 

하지만, 큰 뇌용량과 직립보행이 양립하게 된 그 대가로

인간은 좁은 골반, , 좁은 산도를 통해 목숨을 건 위험한 출산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회적인 동물인 이유는

이 위험한 출산을 혼자서는 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서 산도보다도 더 큰 태아의 머리가 통과하기 위해서

산모의 골반이 벌어진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렇게 산모의 몸도 출산을 위해서 변하지만

태아 또한 그 좁은 공간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몸을 맞춰줘야 합니다.

 

우리가 아주 좁은 통로를 지날 때는

어떻게든 지나가기 위해서 이리저리 돌리면서 몸을 맞추게 되죠.

이렇게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고양이들조차 본능적으로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맞추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좁은 산도를 통과하기 위해서

태아 또한 머리를 맞추려고 회전하게 되는데요

이 회전으로 인해 신생아는 원숭이의 경우와는 반대로 산모의 등 쪽을 바라보게 되면서 나오게 됩니다.

 

이때 반쯤 누운 자세로 있는 산모는 원숭이와 같이 팔을 뻗쳐서 스스로 아이를 받기도 힘들 뿐더러

이런 상태에서 섣불리 아이를 빼낸다거나 품으로 안으려 했다가는

아이의 목이 꺾여, 매우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즉 인간은 탄생의 그 순간부터 본인을 받아줄 다른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죠.

손을 뻗기 힘든 반쯤 누운 자세,

자칫 품으로 안으려 했다간 크게 다칠 수도 있는 등을 보면서 나오는 태아.

그리고 골반이 벌어지는 극한의 고통까지.

 

이렇게 인간은 신체의 그 구조 자체로 인해

혼자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곁에서 누군가 도와줘야 하죠.

 

인류학적 조사에 따르면

역사상 혼자서 아이를 낳는 사회는 지금까지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최근 서구사회에서는 전문가의 도움 없이 집에서 아이를 낳는 사례가 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분만 경험이 있는 가족이나 친척, 혹은 친구들과 함께 하는 공동의 작업이죠.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