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3)

법륜스님의 하루_ 중생구제를 위해 파계를 하는 게 바람직한 가요? (2023.07.08.)

Buddhastudy 2023. 10. 19. 19:23

 

 

 

원효대사가 파계를 하여 사사무애법계를 이루었다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조개가 줍고 싶어서 일부러 물에 들어간다면

그건 욕구를 쫓아가는 일이지 수행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귀족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면

그 신분에 맞는 수준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데,

굳이 파계를 하면서 중생을 구원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원효대사가 처음으로 경전을 읽고 공부를 했을 때는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지

구체적으로 중생을 구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는 것처럼 경전을 공부하면서

중생을 이렇게 구제해야 한다’, ‘중생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한 거예요.

 

대승불교는 중생을 구제하는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효대사는 중생을 불쌍히 여겨 자비로 섭수해야 하고,

자기를 헌신해서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사상적 공부만 한 겁니다.

 

누가 더 불쌍한가를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신라시대에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천민들이었습니다.

원효대사는 천민들이 불쌍하니

그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을 뿐

본인은 귀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천민 동네에 갈 일도 없었어요.

오히려 그런 곳에는 가면 안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문화가 그랬어요.

귀족이니까 그런 곳에 가면 안 되고

스님이니까 그런 곳에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신라시대의 불교는 귀족 중심의 불교였기 때문에

중생들과는 동떨어진 지식 불교였습니다.

대안대사는 그런 생각에 갇힌 원효대사를 데리고

천민들이 사는 동네에 간 겁니다.

원효대사는 거부감이 있었지만

천민들은 불쌍한 사람들이니까

그들이 사는 동네에 가는 것까지는 감수를 했어요.

대안대사라는 위대한 스승이 가니까

자기도 거기까지는 따라간 거죠.

 

그러나 대안대사가 술집에 들어갈 때는

이건 아니다하는 생각이 들어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러자 대안대사가 뒤돌아서 나가려고 하는 원효대사의 등에 대고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여기 마땅히 구제받아야 할 중생을 두고

어디에 가서 별도의 중생을 구제한단 말인가?”

 

원효대사가 돌아와서 생각을 해보니

천민 동네에 사는 사람들과 그 술집의 주모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두고 나는 여기에 오면 안 된다하며 외면을 한 자신이

중생 구제에 대한 온갖 이론을 말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걸 자각하게 된 겁니다.

 

생각과 말로만 중생구제를 외쳤지

정말 구제받아야 할 사람을 만났을 때는 도망가는 자신을 발견한 거예요.

 

내가 이론에만 밝고 사상으로만 이해했지

실제 행동으로는 안 되는구나

이렇게 깨닫고 나서

원효대사는 승복을 벗고 활동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원효를 숨기고

어느 절에 들어가서 부목 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부목 생활을 하면서

그곳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자기보다 후배들인 데다가 지식이 그리 깊지가 못했어요.

 

원효대사는 비록 승복을 벗고 부목으로 지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온갖 사상에 대해 잘 아는 원효였던 겁니다.

그런데 스스로는 그 모순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다른 스님들이 공부하는 얘기를 듣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건 아니다하고 말을 내뱉고 말았습니다.

결국 신분이 들통날 상황이 되니까

원효대사는 도망을 갈 준비를 했습니다.

 

그곳에는 방울스님이라는 천대받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신분도 천민이고, 몸도 불편하고, 행동도 품위가 없으니까

절에 있는 다른 스님들도 방울스님을 무시하고

심지어 절에 있는 하인들도 방울스님을 무시했어요.

 

그런데 원효대사는 방울스님을 존중했습니다.

방울스님을 불쌍하게 여겨서 존중한 것이지

방울스님이 어떠한 경지의 수행자인지를 꿰뚫어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원효대사가 절을 도망쳐서 나가려는데

그때 방울스님이 방문을 열더니

원효, 잘 가시게!’ 이렇게 한 마디를 던진 겁니다.

 

그제야 원효대사는 깨달았습니다.

자기는 그저 불쌍해서 방울스님한테 잘해줬지만,

방울스님은 자기가 원효대사인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예요.

 

원효대사는 방울스님이

어느 정도의 수행력을 가진 사람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지만

방울스님은 원효대사가 신분을 숨기고 부목생활을 하고 있다는 걸

간파하고 있었던 거죠.

 

그때 원효대사는 자기가 앞서 깨달았다고 느낀 것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불쌍한 천민들을 외면한 걸 반성하고

앞으로는 천민들을 불쌍히 여기고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방울스님도 불쌍히 여겨서 자기가 구제를 하겠다고 한 겁니다.

 

그러나 방울스님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겉모양만 보고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구제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지,

실제로는 방울스님이 자기보다 수행력이 훨씬 더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방울스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방울스님은 나에 대해 훤히 알고 있었던 거예요.

 

이때 원효대사는 대안대사가 한 말의 의미를 새롭게 깨치게 되었습니다.

여기 마땅히 구제받아야 할 중생이라는 말은

천민들을 뜻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나는 여기에 오면 안 된다하며 그곳을 부정한 곳이라고 구분 짓고,

옳고 그름을 구분 짓고,

깨끗하고 더러움을 구분 짓는 나의 어리석은 마음이 바로

여기 마땅히 구제받아야 할 중생이라는 말의 의미였던 거예요.

그 어리석은 마음을 보고 깨치는 것이

곧 중생구제라는 거죠.

 

과거에 대안대사의 말을 듣고 자기 나름대로 반성은 했지만

여전히 중생과 부처를 구분하고

세간과 출세간을 구분하고

내가 저 사람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일으켰던 겁니다.

 

그런데 방울스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중생이 마음 밖에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구분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어리석은 내 마음이 곧 중생이라는 걸 깨달은 거예요.

중생심을 알아차리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게 곧 중생구제였던 겁니다.

 

이것이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유심(有心) 사상입니다.

중생이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다는 겁니다.

부처도 마음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한 생각 어리석은 마음을 내면 중생이고,

한 생각 밝은 마음을 내면 그게 곧 부처입니다.

 

원효대사는 이것을 깨우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시비분별하는 마음을 놓아버리고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전에 깨달은 내용은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을 나누는 깨달음이었다면,

이제는 깨달음이니 깨닫지 못함이니 하는 것도

떠나버린 깨달음을 증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천민촌에 들어갈 때도

그들을 구제하러 간 것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구제할 게 없었습니다.

내 마음이 맑아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그냥 숲이었고,

그냥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이 불쌍하다느니 구제해야 한다느니

이런 생각을 이미 떠나버린 상태에서 천민촌으로 들어간 겁니다.

 

그렇게 천민촌에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그들이 나를 보면서

유명한 원효대사가 왔다하고 분별심을 냈습니다.

 

내가 그들을 외면한 것은 내 문제지만,

그들이 나를 떠받드는 건 내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들은 어리석은 분별심으로 나를 그렇게 대우하는 것이니까요.

이때 나는 너희들과 친구를 하러 왔는데

너희가 나를 안 받아주는구나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들을 탓하고 있는 겁니다.

 

저 사람들이 왜 나를 안 받아줄까하고 생각하면 그들이 문제가 되지만,

일체유심조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면 이 역시 나의 문제입니다.

, 나에게 붙어 있는 유명한 원효

그들에게 장애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명한 원효를 버리고 나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이죠.

유명한 원효라는 껍데기를 버리는 행위가

파계의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저 승복을 벗고 다니는 것으로는 부족했고,

천민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파계였습니다.

파계를 하면 사람들이 완전히 배제를 하기 때문에

기존에 가진 기득권을 한 번에 내려놓을 수 있었어요.

 

물론 이러한 동기를 갖고 원효대사가 그러한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하는 건

우리가 원효대사의 삶을 보고

그렇게 해석한 것이지,

실제로 원효대사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누구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결과적으로 원효대사의 파계는

천민들과 친구가 되는 데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원효대사가 파계를 함으로 인해 기득권 사회에서는 원효를 아예 지워버렸고,

천민들은 그를 친구로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이러한 경지를 화엄경의 표현을 사용하여 말한다면

사사무애법계라고 하는 겁니다.

 

원효대사가 승복을 벗고 어느 절에 가서 보살행을 한 것은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의 경지이고,

파계를 하여 천민들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어 간 것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의 경지에 비견될 만합니다.

 

이 중에 어떤 것이 낫고 못한 건 없습니다.

굳이 구분을 한다면 사법계(事法界), 이법계(理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이렇게 네 가지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길을 갈 것인가는 각자 선택을 하면 됩니다.”

 

, 이해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