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09)

즉문즉설_법륜스님(제31회) 다양한 수행법

Buddhastudy 2010. 12. 7.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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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거사님.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서울 갈려면 어디로 갑니까? 그러니까 부처님이 동쪽으로 가세요 그랬어요. 그랬더니 밑에 시자가 듣고 아~ 서울은 동쪽으로 가면 되겠다. 알았어요. 그 다음 사람이 와서 또 물었어요. 서울 갈려면 어디로 갑니까? 하니까 시자가 속으로 아 동쪽이야. 나도 알아.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서쪽으로 가세요. 이랬어요. 그러니까 시자가 깜짝 놀랐어요. 아 서울 가는 길은 동쪽만 있는 게 아니라 서쪽도 있구나. 내가 하나 밖에 몰랐구나. 두 개 다 알았다 이거요.

 

그래 다음 사람이 와서 또 물었어. 서울 갈려면 어디로 갑니까? 이러니까. 야 동쪽이냐 서쪽이냐 좀 헷갈려요. 어느 걸 대답할까? 그런데 부처님이 북쪽으로 가라 이래요. 아니 어 또 있었네. 이렇게 된 거요. 그래서 자기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동쪽도 있고 서쪽도 있고 북쪽도 있고 아 남쪽도 있겠다. 이 생각을 했어요. 다음 사람이 와서 또 서울 갈려면 어디로 갑니까? 하니까. 이제 딱 추리를 해서 이 번엔 남쪽이다 이랬더니. 부처님이 동쪽으로 가라 이래요. 또 안 맞았어.

 

그래서 캬~ 불법은 너무 어렵다. 왜 이렇게 복잡하노? 동쪽이면 동쪽이고. 서쪽이면 서쪽이지. 하나면 딱 좋지. 그런데 첫 번째 와서 물은 사람은 인천 사람이 와서 물었어. 동쪽이죠. 두 번째는 춘천 사람이 와서 물었어. 서쪽이죠. 세 번째 사람은 수원 사람이 물었어. 북쪽이죠. 네 번째 사람은 부천 사람이 물었어. 또 동쪽이오. 그럼 이럴 때, 무조건 동쪽이면 동쪽, 하나로 정해주는 게 맞겠어요? 인연을 따라서 방향이 다르겠어요. 인연을 따라서 방향이 다르겠죠.

 

그러니까 거사님은 지금 무유정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금강경의 핵심이 뭐요? 무유정법이죠. 무유정법이라는 것은 정함이 있음이 없다. 정함이 있음이 없다는 뜻은 서울 가는 길이 없다는 말도 아니고.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서울 가는 방향은 아무렇게나 가면 됩니까? 안됩니다. 그럼 서울 가는 길은 없습니까? 아닙니다.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 지는 거요. 그러니까 이게 공의 도리란 말이오. 이것을 반야심경에서 말하면 색이 공한 도리는 한길만 있는 줄 알았더니 정해진 길이 없다. 이게 색이 공한 도리고.

 

정해진 길이 없다고 그러니까 길이 없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오. 인연을 따라 길이 또 있어. 이게 공이 색한 도리란 말이오. 그래서 색즉시공이오. 공즉시색이라 그러고. 또 금강경에서는 무유정법이라 그러고. 법성게에서는 불수자성 수연성이다.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아니하고 인연을 따라 이루어진다. 하는 도리란 말이오. 그러니까 거사님은 아직도 정한법의 경지에서 바라보니까. 이게 맞나? 저게 맞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요.

 

내가 병원에 갔는데 의사선생님이 운동부족입니다. 운동 좀 하세요. 이랬어요. 그래 운동을 해야 되겠는데 무슨 운동을 할까요? 그래서 축구선수한테 물으러 갔어. 무슨 운동하면 좋을까요? 축구선수는 축구하라 그래. 농구 선수한테 물으니까 농구하라 그래. 조깅하는 사람한테 물으니까 조깅하라 그래. 당연한 거 아니오. 그렇게 대답하는 게. 그러니까 그건 인연을 따라 이루어지는 길이다.

 

이런 도리를 아시면 스님이 염불하라 하면 저 사람은 축구 선수가 축구하라 그러면 이해가 되요 안되요? 되죠. 농구선수가 농구하라 그러면 이해 되요 안 되요? 되지. 그럼 농구 선수가 축구 하라 그러겠어? 그러니까 우리는 그것을 긍정을 한다고 해서 그것만 있는 길도 아니고. 부정을 한다고 해서 틀린 게 아니에요. 이런 도리를 알으셔야 고민을 넘어설 거요.

 

일념으로 정진을 하는데. 일념으로 하나만 선택해서 정진을 한다는 말도 맞지만은. 또 그렇게 정진할 때. 어떤 스님에게 물으면 아니라 그럴 거요. 아니라 그럴 때 깨쳐야 되요. 여러분들은 자꾸 남의 말을 따르잖아요? 이 길로 가라 그러면 이건 줄 알고 가다가. 그거 아니라 그러면 헷갈리고. 그러면 안 되요. 기라 그러든 아니라 그러든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이런 건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예를 든다면 내가 김치를 좋아한다고 딴 사람은 라면을 좋아해. 왜 김치 먹지 라면 먹냐? 이것도 안되지만은. 나는 김치만 좋아하니까 세상사람이 라면을 먹든 국을 먹든 나는 김치만 먹는다. 음식이 왜 김치만 먹어야 되는 법이 어디 있어요? 김치 먹다가 라면 먹다가 이것저것 섞어 먹어도 되고. 김치만 먹어도 되고. 상관 없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내 공부가 안 됐으면 니 공부부터 하라고 얘기 하는 거고. 내 공부만 하면 된다 그러면 남도 보살피라고 얘기 하는 거요. 고개가 뻣뻣한 사람은 절을 하세요 그러죠. 절만 하면 되는 줄 알면 뭐라 그래요? 절만 한다고 되나? 이렇게 말해요. 그럼 절 하기 싫은 사람은 아~ 절할 필요 없겠다. 이렇게 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제나 상을 짓는 것을 깨뜨리는 게 법입니다. 상이 상이 아님을 아는 거지. 거기다 또 다른 상을 세우면 안 된다.

 

그래서 만상은 일상으로. 일상이 뭐요? 일상을 세우면, 하나의 상을 세우면, 이미 두 개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금강경에 뭐가 있어요? 일상무상분이 있죠. 하나의 상이란 상없음을 말하는 거다. 그런데서 세우고 없어짐이 자유로워야 됩니다. 그래야 이게 대화가 자유로운 거에요. 냉정할 때 냉정하고, 따뜻할 때 따뜻해야 되는데. 따뜻해야 됩니까? 냉정해야 됩니까? 이래.

 

어린아이에게는 따뜻한 사랑이 필요하고. 사춘기 애들에게는 냉정한 사랑이 필요하다. 끊을 때는 끊는 게 필요하고. 포용할 때는 포용하는 게 필요한데 이걸 정해 놓을 수가 없어요. 배 아프다 찾아 왔는데. 밥을 못 먹어서 배 아프다 그러면 밥 줘라 이렇게 얘기 하고. 밥을 많이 먹어서 배 아프다 하면 하루 굶어라 이렇게 말하는 거지. 굶어라. 밥 먹어라. 이렇게 정해 놓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하면 되느냐? 그 얘기는 아니에요. 이런 도리를 알아야 중도가 되고. 자유로워진다. 자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