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을 일심(一心)으로 발견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가, 거지든 거지가 아니든, 남자든 여자든, 중이든 중이 아니든
막론해 놓고, 말입니다.
아까도 얘기한 바와 같이, 동자 얘기를 했듯이
사람은 다리 절름발이가 돼서는 아니 됩니다.
즉 무심(無心)과 유심(有心)이 절름발이가 돼서는 아니 됩니다.
동시에 같이 돌아간다는 자체를 아셔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본과 마음 내는 거와 육신이 움죽거리는 거와 동시에 돌아가죠?
어디 따로따로 돌아갑니까? 눈과 귀가 따로따로 돌아갑니까, 어디? 얼굴이?
그러니까 이것을 동시에 악과 선도 거기 놔라.
악한 거는 놓고
'선하게 이끌어줄 수 있지 않느냐.' 하고 놓고
선하게 돌아가는 거는 감사하게 놓고
모든 거를 한군데다가, 놓는 것이
자기가 공해서 본래 없는 것인데, 따로 없다 이 소립니다.
없는 게 없는 게 아니라 따로 내가 없는데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이거는 잘못돼 돌아가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나만 따로 독불장군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더 불어 같이 돌아가고 있죠.
그러니까 그것을 완벽하게 알 때까지는
모든 것을 '내가 따로 없으니까' 하고 거기다 놔라 이겁니다.
그게 죽는 방법입니다.
두번째는, 내가 따로 없는 반면에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 모두가.
안 그렇습니까?
공생(共生)이며 또는 공체(共體)며 공용(共用)이며 공식화(共食化)하고
그냥 모두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간다 이겁니다.
그 도리를 완전히 알게끔 하려면
자기 겉으로, 이론적으로, 학술적으로 알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으로써 '한마음 속에서 모든 게 들이고 내는 그 무쌍한 이 만법이
그대로 더불어 돌아가는구나!' 하는 거를, 둘이 아니게 말입니다.
그거를 진심으로써 자기 속으로 확철히 알려면
거기다가 또 놓고 돌아가야 하니까
또 두 번째도 죽어야 한다 이 소립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을 하지 말라.' 이 소리가
'죽어야 한다.' 이 소립니다.
세 번째도,
같이 돌아가면서 서로가 인연에 따라서
이 손수건을 쥐었으면 손수건을 들고만 있는 게 손수건이 아니라
땀을 씻는 겁니다.
응? 어디를 씻든지.
그러면 나와 수건과 인연이 마주쳤기 때문에
씻을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건 발전의 작용입니다, 발전의 작용!
그렇기 때문에 나툰다고 하는 겁니다. 나툰다!
예를 들어서 목이 마르면 이거를 먹고
땀이 나면 손수건을 들고
말소리를 내려면 이거를 들고
야, 모든 일체 만 가지가, 만물이 다 내 아님이 없이 나투면서 돌아간다는 얘깁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거를 알려면 또 놓고 가야 된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한 번도 죽어야 하고
두 번도 죽어야 하고 세 번도 죽어야
구경경지에 이르를 수가 있다.
그러니 내가 죽지 않는다면
천체 모두가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이치도 모를 거고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는 그 원리가
바로 공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거를 알리기 위해서
한 번도 죽어야 하고, 두 번도 죽어야 하고, 세 번도 죽어야 한다 이런 말을 했던 겁니다.
아까도 그렇게 얘기했지 않습니까?
부처님과 동자가 얘기를 했는데
“차이가 없습니다.” 했습니다.
부처님 발과 그 어린 동자의 발과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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