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실생활에서는 특정한 상황이나 그런 일이 닥쳤을 때, 머리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전도몽상이라든지 직장에서 상사와 말썽이 있었을 때는 머리로는 내가 그런 안경을 끼고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구나. 그리고 주인이 바뀌었구나, 물건을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구나.
그렇게 하고 있는데, 막상 그런 상황이 되면 실천이 잘 안 되고 그냥 지식으로만 남아 있는데,
예전에 뜨거운 주전자를 손으로 잡았을 때, 어떻게 하겠느냐? 선택이다, 당연히 놓아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생활에서 조그마한 사소한 거 하나라도 바꾸기가 참 힘든 거 같습니다. 조금이라도 좀 더 그런 방법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뜨거우면 놔라 해서 스님이 뭐라고 그러노?
“놔라” 하니까, “안 놔집니다.”
그러면 “들고 있어라.” 이러잖아.
스님이 언제 “놔라.” 이렇게 가르키드노.
뜨겁다니까 “놔라.” “안 놔집니다.” “그럼 들고 있어라.”
“손 데잖아요.” “그럼 손 데라.”
“손 데기 싫은 대요.” “그럼 놔라.”
“놓기 싫은데요.” “그럼 들고 있어라.” 이런 얘기에요.
그래서 자기가 답을 안다는데, 자기가 실천이 안 되면 “안 되는구나.” 그러면 되지 뭐, 어려운 일이라고.
인생에 정답은 없다니까.
스님이 늘 얘기하는데 인생에 정답은 없다.
인생은 그냥 선택이다.
이러고 싶으면 이렇게 하고,
저러고 싶으면 저렇게 하는데,
그 선택에는 뭐가 따른다? 과보가 따른다.
과보를 안 받으려고 그러지.
선택은 하고.
돈은 빌리고 싶은데 갚기는 싫다.
이게 지금 문제요.
그래서 선택이 어려운 거요.
돈을 빌리면 당연히 갚아야 된다면 빌릴까 말까, 괴로울 일이 뭐가 있어요.
그런데 빌리고는 싶고 갚기는 싫고,
이 둘 사이의 갈등이란 말이오. 전부 다.
그러니까 애는 데려다 키우고 싶고, 밥해주려니 힘은 들고, 말 안 들으니까 보기 싫고, 예를 들면 이렇게 갈등이 생기는 거 아니오. 안 보면 갈등이 안 생길 텐데. 안 보려니까 또 불쌍하고, 불쌍해서 또 밥해주니까 또 집착이 생기고. 그러니까 그건 선택이라는 거요.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되고, 갚기 싫으면 안 빌리면 되고, 그런데 처음에 모르고 빌렸으면 갚기가 싫으면 요번 거는 갚고 다음부터는 빌리지 마라. 이 얘기니까, 안 놔지면 들고 있으면 된다는 거요.
하하하.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결혼 안하고 이렇게 혼자 사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일까? 그게 잘못된 거요. 결혼을 해서 살든,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살든, 그건 각자의 뭐라고? 선택이에요.
혼자 산다고 특별히 훌륭할 것도 없고, 둘이 산다고 특별히 나쁠 것도 없고,
반대로 둘이 산다고 특별히 훌륭할 것도 없고, 혼자 산다고 특별히 나쁜 것도 없는 거요.
자기 인생의 선택이에요.
자기 뭘 먹을 거냐? 그건 식성이에요. 무슨 옷을 입을 거냐? 그건 취향이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누워서 자면 보통 사람이고, 앉아서 자면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건 누워서 자든 앉아서 자든 그 사람 잠버릇이에요. 그런 걸 신비하게 생각하니까 여러분들 인생이 피곤한 거요.
그러니까 애를 많이 낳아 키우든 적게 낳아 키우든, 남의 애를 데려다가 키우든 자기애만 키우든 자기 선택이오. 자기 인생을 그렇게 사는 걸 어떻게 해. 그런데 남한테 해를 주면 안 된다.
그러니까 남을 때리거나 죽여서는 안 된다.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지마는
남을 죽이거나 때릴 권리는 없다.
내가 이익을 추구할 권리가 있어요.
“야, 저 자식 너무 욕심 많다.” 그렇게 욕할 필요가 없어요.
누구나 다 사람은 자기 이익을 추구할 권리는 있어.
그러나 남을 손해 끼칠 권리는 없다.
그래서 남의 물건을 뺏거나 훔치지 말라는 거요.
누구든지 다 자기 인생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 즐거움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데, 나 즐겁자고 남을 괴롭힐 권리는 없다.
“아, 저 여자하고 한번 껴안아 봤으면 좋겠다.” 나는 좋을지는 몰라도 그 여자는 괴롭단 말이오. 그래서 성추행이나 성폭행은 하지 말라는 거요.
누구나 다 말할 권리가 있고 자유가 있어. 그러나 말로 남을 괴롭힐 권리는 없다. 그러니까 욕설이나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거요.
내가 술을 먹든 뭘 먹든 그건 내 자유요. 그러나 내가 술을 먹고 취해서 남을 괴롭힐 권리는 없다. 그러니까 술 먹고 취하지 말라는 거요. 그게 뭐 어려운 일이에요.
우리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같이 사니까, 남에게 손해를 끼치면 상대도 손해를 보고 살려고 안 그럴 거 아니오. 그럼 내가 상대의 물건을 뺏었으면 지도 손해 안 보려니까 내 물건 가져가니까, 나한테 나중에 손해가 생긴다는 거요.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되는 거 하고 이치가 똑같다는 거요.
그런데 우리는 빌리고는 싶고 갚기는 싫어.
그래서 부처님한테 가서
“안 갚는 방법 없어요? 부처님.”
“돈 조금 내고 절 좀 해라 그럼 안 갚게 해줄게.”
이게 지금 종교라는 거요. 그래서 내가 이
종교가
어리석음을 조장한다.
목독을 받고 싶은데요. 그럼 조금씩 저축을 해야 될 거 아니오. 복을 지어야 복을 받지. 복은 안 짓고 “복 주세요.” 그런단 말이오. 그냥 달라니까 조금 미안하니까 돈 몇 푼 갖다 넣고, 구부려 절 좀 하고 달라는 거요.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왜 그런 일을 할까?
뭣 때문 그런 부당한 짓을 할까?
여러분의 어리석음이 그런 것을 만든다.
그러니까 성인의 가르침은
그런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거지
그걸 조장하는 게 아니란 말이오.
그러니까 자기가 선택하고,
돈을 빌렸으면 빌릴까? 말까? 나한테 물을 필요가 없어요.
내가 빌리라 말라고 가르치나?
“빌리고 싶니?” “그럼 갚을 각오를 해라.”
“갚기 싫은데요.” 그“럼 빌리지 마라.”
이게 성인의 가르침이에요.
이치를 가르쳐주는. 뭐 어려워요.
그리고 혼자 살면 그건 자기 선택이오. 혼자 살고 싶으면 혼자 살고, 둘이 살고 싶으면 둘이 살고, 애 낳고 싶으면 낳고 안 낳고 싶으면 안 낳고.
그런데 둘이 살면서 애를 안 낳겠다. 그건 의논이 되어야 됩니다. 혼자 살면서 애기 안 낳는 것은 내 맘대로 결정하지만, 둘이 살면 상대는 애기 낳고 싶고 나는 안 낳고 싶으면 어떻게 될까? 그걸 내 맘대로 하면 상대에게는 고통을 주는 거 아니오. 그건 의논해야 되요.
그런데 어떤 여자가 결혼해 놓고
“나 애기 안 낳을래.”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요. 의논해서 상대가
“낳겠다.” 하면 그럼 내가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헤어져줘야 된단 말이오.
남편이 저기 딴 나라로 발령이 났는데
“난 안 따라 갈래.” 그러면 헤어져줘야 된단 말이오. 딴 사람하고 살도록.
그게 예의가 없는 거요. 그거는. 사람이 같이 약속을 해서 사니까 서로 의논을 해서 약속을 지켜야 될 거 아니오. 약속을 못 지키면 그러면 약속을 파해야 된단 말이오, 서로가.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혼을 하든, 결혼을 하든, 저는 관여 안하잖아. 그건 여러분들의 선택이니까. 그러니까 결혼 했으니까 “이혼 하지마라.” 이런 얘기 한다고 생각하면 잘못 생각하는 거요.
내가 혼자 사는 사람이 저희야 둘이 살든 헤어지든 내가 무슨 상관있어? 그래서 여러분들은 저한테 스님이 답을 준다. 아까도 자꾸 저분이 얘기해서 얘기하는 거요.
저는 답을 준적은 없습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어요.
선택하고 과보를 받는 거요.
저는 그렇게 선택하면 이런 결과가 온다. 이 얘기만 하는 거요.
그걸 어떻게 할 건지는 자기가 결정하는 거요.
제가 왜 남의 인생에 결정을 해줍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꾸 제가 정답을 준다. 정답을 주면 저 앞에다 즉문즉설이라고 써야 되요? 즉문즉답이라고 써야 되요? 즉문즉답이라고 써야 되잖아. 왜 즉문즉설이라고 썼겠느냐. 인생에 답이 없는데 어떻게 답을 줘요.
자,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인생을 지혜롭게 살면 괴로움이 적어지고,
어리석게 살면 괴로움이 많아지는 거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 괴로움이 적고 즐거움이 많도록 살고 싶지 않아요?
“나는 안 그래요. 난 괴롭고 싶어요.” 그럼 그렇게 살라는 거요. 그래서 제가
“오, 그렇게 되면 이런 괴로움이 생기는데, 오, 그렇게 되면 이런 문제가 생기는데.” 이 정도 얘기하면 대화 하다가
“알았습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결정해서 가는 거요.
그래서 “스님이 뭘 해준다.” 이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스님한테 고맙다 해도 고마운 것은 내가 해줬어요? 지가 한 거요? 자기가 한 거요. 나한테 고맙다 해서 내가 해줬다고 착각하면 안 된 건 다 누가 책임져야 된다? 내가 책임져야 돼.
“스님 때문에 아들 대학에 들어갔어요.” 그래도 내가 하나도 반갑지가 않아요. 왜? 그걸 내가 받아들이는 즉시 떨어지는 건 다 누구 때문에 떨어졌다. 스님 때문에 떨어진 게 되잖아. 그러니까 떨어진 게 나 때문에 떨어진 게 아니면, 합격한 것도 나 때문에 합격한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 얘기를 듣고 자기가 그런 결정을 하고, 그런 선택을 하고, 그런 과보를 받았기 때문에 그 분은 괴로움이 줄어든 거요. 저는 다만 “쥐약 들었다.” 이런 얘기이상 해 본적이 없어요. 먹든지 말든지, 그건 여러분들이 알아서 사는 거요.
자, 실천이 안 되면 그냥 “안 되구나.” 이러면 되요. 아시겠어요. 되면 “되는구나.” 안되면 “안 되구나.”
안 되도 사는데 지장 없어요.
괴로움이 좀 많지.
덜 괴롭고 싶으면 하면 되고
하기 어려우면 괴로움을 좀 받으면 되요.
뭘 어렵다고 그래?
법륜스님 법문 안 듣고도 이제까지 인생 잘 살았어요? 못 살았어요? 잘 살았어.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법륜스님 법문대로 안 된다고 자기를 괴롭힐 이유가 뭐가 있어요. 전 지구 70억 인구 중에 제 강의 듣고 유튜브 듣는 사람 몇 명쯤 될까? 아무리 많아도 100만 명 안 넘을 거요.
그럼 100만 명 제외한 70억 인구가 나쁜 사람들이고 잘못 사는 거요? 그들도 다 잘 살아요. 나름대로. 그래서 그렇게 중요한 거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제 얘기를 듣고
그렇게 해보니 도움이 된 사람은 그렇게 하면 되고
그렇게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은 안 하면 되고
했으면 좋겠는데 잘 안되면 그냥 안 되는 대로 살면 되요.
법륜스님 얘기대로 안 된다고 괴로울 일이 뭐가 있어요. 그렇게 생각 안하면 나중에 법륜스님이 죽었다면 섭섭해지는 거요.
‘법륜스님이 내 인생에 뭘 줬다’ 이렇게 생각하면
“좀 더 살아서 나를 도와주지 왜 빨리 죽었노.” 이래서 섭섭한 거요.
내 죽은 게 섭섭한 게 아니에요. 그럴 수준의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래서 “스님 오래 사세요.” 그러면 내가 농담을 그러지. “누구 좋으라고. 내가 왜 너 좋으라고 오래 살아줘야 돼.” 어떻게 생각해요. 내가 알아서 죽을 때 되면 죽는 게 낫지.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오래 살아야 돼? 그렇게 까지 이타심이 많은 사람 아니에요. 그렇게 하면 오해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건 돕고,
도움이 되는 건 되는 거고,
안 되는 거는 안 되는 거고 이런 거요.
그러니까 스님한테 너무 큰 기대를 걸어도 실망하게 되는 거요. 여러분들도 너무 자식한테, 남편한테, 아내한테, 세상에 너무 그렇게 기대를 걸지 마세요. 첫째
자기 똑바로 살아야 돼.
우선 내가 똑바로 사는 게 제일 중요해.
'법륜스님 > 즉문즉설(2018)'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제 1398회] 시동생의 아이를 키우게 됐어요. (0) | 2018.06.11 |
---|---|
법륜스님의 희망세상만들기_내 아들 돌리도~~ (0) | 2018.06.08 |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제 1396회] 늦깎이 댄서의 꿈을 이루고 싶어요. (0) | 2018.06.04 |
법륜스님의 희망세상만들기_태어날 우리 아기를 위한 당신의 선택 (0) | 2018.06.01 |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제 1395회] 난치병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의 자세 (0) | 2018.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