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굉장히 유복하게 자랐는데
아버님이 친구분과 동업을 하면서 크게 망하셨고
그로 인해서 좌절하셔서 알코올중독이 되시고
가정 폭력과 도박도 하셔서 어려운 시기를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굉장히 열심히 살면서 나름대로 어려움을 극복했다고 생각했고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해서 딸아이를 하나 두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남편이 IT분야의 직장을 다니다가
언제까지 월급으로 먹고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퇴직하기 전에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사업이란 얼마든지 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반대를 하다가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서
더 이상 반대를 못 하고 동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싫어하는 동업을 남편이 시작했는데
사람의 불안감이라는 게 적중했는지
지금 동업자와 안 좋은 관계가 되었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용서했다고 생각을 했는데
힘들어지니까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다시 생깁니다.
신랑이 동업을 한 것에 대해서도 속앓이만 하고 있고, 늘 불안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용서하고, 신랑을 탓하지 않으면서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질문자는 어릴 때부터 쭉 가난하게 사는 것이 좋아요?
아니면 한 번 편안하게 살아보다가 가난해진 게 좋아요?
어느 게 더 좋아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태어날 때부터 쭉 가난하게 살래요?
초등학교 때까지 한 번 부자로 살아보다가 가난하게 살래요?
그런데 뭐가 문제예요?
지금 가난하게 살지만
어릴 때 나도 한 번 부자로 살아봤다는 것은 좋은 거예요.
어떤 사람이 결혼을 했다가 이혼을 해서
다시 결혼을 했다가, 또 이혼을 하고
결혼을 했다고 하면서
저한테
‘스님, 저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결혼을 세 번이나 할까요?’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답했습니다.
‘스님은 결혼을 한 번도 못 해봤는데,
당신은 무슨 복을 지었길래 결혼을 세 번이나 했나요?’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어떤 사람은 한 사람 하고도 못 살아봤는데
세 사람을 바꿔가면서 살아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평생 한 사람하고 살아야 한다’ 이렇게 정하니까
바꿔가면서 사는 것이 나쁜 일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안 정하면
요즘 같은 좋은 세상에 이 사람하고도 살아보고
저 사람하고도 살아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연애하다가 애인이 다른 데 가버리면 좋은 일이에요.
그 사람이 계속 내 옆에 붙어 있으면
그 사람밖에 못 사귀고,
내가 애인을 두고 다른 사람을 사귀면
바람을 피운다고 비난을 받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알아서 가버리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약간 아쉽긴 하지만
다른 사람을 사귈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그것처럼 질문자의 고민도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이에요.
어릴 때 한번 잘 살아봤잖아요.
질문자는 아버지한테 고맙게 생각해야 돼요.
아버지를 잘 만났으니까 어릴 때 한번 잘 살아 볼 수 있었던 겁니다.
잘난 아버지 덕분에 질문자는 잘 살아본 경험을 갖게 된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가 술 먹고 알코올 중독에 빠져서 도박을 하다가
일찍 돌아가셨으니 잘 되었잖아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질문자는
‘어릴 때는 잘 살았는데 가난해졌다’,
‘아빠가 술 먹었다’,
‘아빠가 죽었다’
이렇게 뭐든지 문제로 삼고 있는 겁니다.
질문자는 극복할 방법을 물었지만
스님이 들었을 때는 극복할 일이 없어요.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에 극복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면 좋겠어요.
‘나는 어릴 때 초등학교까지 잘 살아봤다’
‘가난하게도 살아본 경험이 있다’
‘술 먹고 도박하는 아버지 밑에서도 살아봤다’
이렇게 여러 가지 경험을 했다고 받아들여 보세요.
이런 것은 다 소중한 경험이에요.
스님이 이렇게 여러분과 즉문즉설을 할 수 있는 것도
온갖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질문자는 이런저런 경험을 해보고
지금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어 있어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되는 거예요.
어릴 때 아버지가 사업 실패한 것이
마음에 상처가 되어 있기 때문에
남편이 아직 실패하지도 않았는데
질문자는 계속 ‘실패할지도 모른다’, ‘갈등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고통을 겪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남편이 사업에 실패해 봤자 무슨 별일이 있겠어요?
어릴 때 아빠가 사업에 실패를 했는데도
질문자는 지금까지 잘 살았잖아요.
지금은 아이도 아니고 어른이 되었는데
남편이 실패하는 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혼해 버리고 다른 사람하고 살아도 되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당신이 사업을 한번 해보고 싶다니까 해 봐.
그러나 잘못되면 당신하고 끝이야.
잘 되면 같이 살게.’
전전긍긍하지 말고
이렇게 배짱 있게 나가면 됩니다.
지금 아무 문제가 없어요.
질문자가 어릴 때 받은 마음의 상처가 재발해서 생긴 문제에 불과하니까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됩니다.
현실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동업을 하게 되면 장단점이 있습니다.
자금이 부족할 때 사업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관계가 틀어져서 갈등을 겪을 위험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업이 못 되면 서로 책임을 물어서 헤어지고
사업이 잘 되면 서로 가지려고 싸우게 됩니다.
그런 위험이 있으니까
동업을 안 하면 되는데, 왜 동업을 할까요?
동업을 안 하면 사업을 시작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예 시작을 못 하는 것보다는
위험 부담을 안고 해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동업을 하게 되는 겁니다.
동업을 싫어하는 것도 질문자가 가진 트라우마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극복을 한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절을 하면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렇게 해보세요.
질문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보다 많은 경험을 해본 거예요.
많은 경험을 한 것은 좋은 겁니다.
예를 들어
설악산에 등산을 갔다가 개울을 건너가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신발을 벗기가 싫어요.
할 수 없이 신발을 벗고 개울을 건너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이 ‘내가 업어서 건네줄게’ 해서
신발을 벗지 않고 건너간 사람도 있겠죠.
신발을 안 벗고 건너 간 사람은 기분이 좋겠죠?
그런데 설악산 정상에 올라가서 돌아보면
방금 전에 신발을 벗고 개울을 건넜든
신발을 벗지 않고 업혀서 건넜든, 무슨 차이가 있어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기분이 좋은 것은 그때뿐입니다.
신발을 벗고 건넜어도 다시 신어야 하잖아요.
지나고 돌아보면 차이가 없습니다.
산을 오를 때 가파른 길로 갔다가 절벽을 타고 올라가나
완만한 길로 올라가나
올라온 뒤에는 과거는 그냥 하나의 추억이고 경험일 뿐이에요.
여기로 올라가면 어떻고, 저기로 올라가면 어때요?
지금 중요한 것은 정상에 왔다는 것입니다.
‘내가 신발 벗고 왔지’, ‘가파른 길로 올라왔지’
이것은 다 과거의 추억이고 경험일 뿐입니다.
내가 지금 여기 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예요.
어렸을 때 잘 살아도 봤고
아버지 사업이 실패해서 가난하게 사는 경험도 해봤고
애 먹이던 아버지가 죽었으니까 잘 됐고
혼자 살려고 했는데 남자 하나 만나서 결혼까지 해봤잖아요.
남편이 사업에 실패한다면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봤듯이
실패한 남자를 데리고 살아봐도 되고
또 요즘 같은 세상에 이혼을 해도 됩니다.
옛날에는 결혼해서 헤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같이 살아도 되고, 헤어져도 되는 좋은 시대인데
왜 그렇게 눈물을 질질 짜고 그래요.
아무 문제없습니다.
‘나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런저런 경험을 하고 살았을 뿐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
질문자가 동의를 안 했는데 남편이 동업을 했으면,
남편을 탓할 거예요?
동의를 했고 안 했고를 따질 필요가 없어요.
지금 중요한 것은
망하면 망한 대로 살고
흥하면 흥한 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동의를 했다’, ‘내가 동의를 안 했다’
이런 것은 이미 지나간 얘기입니다.
아무 쓸데없는 것을 질문자가 붙들고 있는 거예요.
동의를 했는지 여부는 지금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 잘 되면 잘 되는대로 살고
안 되면 또 안 되는 대로 새로 시작하면 되죠.
안 죽고 사는 것만 해도 다행인 줄 알아야 합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에 와서 살아본 것만 해도 좋은 일이잖아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태어나서 한국 안에서밖에 못 살아보는데,
여러분들은 일본까지 와서 한 번 살아보잖아요.
일본에서 사는 게 힘들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돼요.
늙어서 한국에 가면 사회 보장 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굶어 죽지는 않아요.
스님 같은 사람이 도와주기도 하고, 누구든 도와주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잘 먹고살겠다고 바라면
좀 곤란해요.
잘 먹고살려면 노력을 해야 됩니다.
먹고살 수 있는 정도에 만족할 수 있다면
세상이 다 뒷받침을 해주기 때문에 걱정할 게 없어요.
한국이나 일본에 태어난 사람은
최소한 먹고살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먹고살 수만 있으면 된다’
이렇게 마음을 먹으면 아무 걱정이 없어요.
사회 보장 제도가 다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처럼 ‘먹고살기만 하면 됐다’ 하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저는 개인 방을 갖지 않는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옷도 그저 남이 버린 것을 주워서 재활용을 해서 입습니다.
요즘 멀쩡한 옷을 버리는 게 많으니까 얼마든지 구할 수 있고
신발도 남들이 버리는 것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요.
옛날처럼 굶주리거나 헐벗을 일도 없고, 길거리에서 자야 할 일도 없어요.
요즘은 잘 곳이 없으면 재워주는 시설도 있잖아요.
부처님은 나무 밑에서 잤는데 뭐가 문제예요?
여러분들은 너무 잘 살려고 하니까 걱정이 생기는 겁니다.
저처럼 잘 살겠다는 생각을 안 하면 아무 걱정이 없어요.
그래서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걱
정해 봤자 특별히 잘 되지도 않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그냥 아이 데리고 재미있게 살면 좋겠어요.
엄마가 계속 울고 걱정하면
아이한테 우울증이 생깁니다.
질문자는 나이 들어서 우울증이 왔지만
엄마가 슬프게 살면 아이는 어릴 때부터 우울증에 걸립니다.
사춘기 때 벌써 우울증 증상이 나타나요.
요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우울증 증상이 심한 경우가 많습니다.
모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거예요.
그래서 일본에는 ‘히키코모리’라고
은둔형 외톨이로 사는 청년들이 많잖아요.
밖에 안 나가고 방 안에 있는데
이건 다 부모의 영향을 받은 겁니다.
부모가 건강하고 밖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면
아이들은 우울증이 안 생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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