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우리가 하루를 시작할 때 흐리멍덩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거 하고, 맑은 정신으로 시작하는 거 하고, 같은 하루인데 내가 느끼는 행복도는 다릅니다. 날씨는 똑같지만, 오늘 일기예보 딱, 보고 준비해간 사람은 비가와도 괜찮고, 안 와도 괜찮고 그래요. 비 오면 우산 펼쳐들면 되고, 비 안 오면 접어서 들고 다니면 되니까. 준비된 사람은 “비가 오려면 와라.” 이런 마음이에요. 그런데 준비 안 된 사람은 비 오면 큰일 나.
인생도 그래요. 내가 기도한다고 오늘 갑자기 좋은 일 생기고, 기도 안한다고 나쁜 일 생기고 그건 아니에요. 기도하는 사람한테나 안하는 사람한테나, 기도 하는 날이나 안하는 날이나, 생길 일은 생기고, 안 생길 일은 안생기고 그래요. 그런데 기도를 하는 사람은 준비된 사람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가 감당할 능력이 있다. 이미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에. 그런데 준비가 안 된 사람은 어떤 일이 일어나면 허우적대게 된다. 이거요.
옛 말에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이런 얘기 있지 않습니까? 호랑이한테 물려간다는 그런 급박한 일이 발생해도 정신만 딱, 차리면 살 길이 열린다. 이처럼,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가 지혜롭게 대응하면 다 극복할 수가 있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우리가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눈뜨자마자 1시간 기도하는 거요. 오늘은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1시간 기도하는 사람만 모이는 자리에요. 자, 오늘은 누가 얘기를 시작할까요?
어떻게 바라보기는 그냥 바라봐야지. 그냥 바라본다. 좋아하구나 싫어하구나 마음이라는 게 시뚝빼뚝하구나. 이렇게 일어나는 데로 알아차리면 되지. 그 사람은 내 똑같은 사람인데, 내가 좋아했다가 미워했다가 이랬다가 저랬다 하니까, 왔다갔다하는 거 누구다? 그 사람이다? 나다? 그래. 너 자신인데, 나의 뭐다? 마음이. 마음의 뿌리는 뭐다? 업식이에요. “아, 내 업식이 이렇구나. 내 업식이 이렇구나.” 이렇게 알면 되지.
많이 올라오면, 그걸 뭐, 그런 마음이 올라오면 된다 안된다가 없어요. 일어났는데 되고 안 되고, 안된다고 그런다고 안 일어납니까? 아니에요. 그건 일어나는 거니까, “아, 내 업식이 이렇구나. 사람을 분별 하구나. 내가 분별심이 많구나.” 이렇게. 이게 분별심이 많으니까 내 수행자가 이래선 된다, 안 된다. 자꾸 이렇게 단정하지 말고, 자기를 자꾸 규격지어서 자꾸 하려고 하지 말고, 이렇구나. 하고 알면 돼. 나라는 존재가 이렇구나.
그 나라는 존재가 내 본질이 아니고, 내 업식이에요. “이렇구나. 아, 내가 사물을 이렇게 보고 마음을 이렇게 내고 이렇게 대응하구나.” 저런 사람 보면 “이런 마음을 내구나. 그게 이런 것이 현재의 나의 업이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면 되요.
그렇지 뭐. 알아차리고 바꾸고 싶으면, 이러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할래? 바꾸겠다하면 노력을 해야지.
그러니까 화가 나는데, “화가 나구나.”하는 걸 먼저 알아차려야 될 거 아니야. 화내는 게 좋으면 계속 화를 내면 되고, 화내는 게 나한테 안 좋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다음에는 이럴 때, 화를 안내야지. 이렇게 다짐을 해보지. 또 화가 나면 그래도 화가 나구나. 자꾸 반복하다보면, 조금 줄어들지.
분별심이라는 거는 자기 기준에 의해서 일어나는 거요. 옳다 그르다. 맞다 틀렸다는 자기 기준, 기준이 있어야 옳고 그름이 있지, 기준이 없으면 옳고 그름이 없어. 내가 서 있어야 앞이 있고 뒤가 있고 동이 있고 서가 있고 남이 있고 북이 있고 이러지. 내가 없으면 동서남북이 없잖아. 어디를 기준으로 동서남북을 할 거요? 우리가 서해라는 건 중국을 기준으로 하면 동해에요. 해가 뜨니까 동해고, 우리는 해가 지니까 서해에요.
같은 바다를 한 사람은 동해라 그러고, 한 사람은 서해라고 이렇게 말하는 거요. 같은 대전을 놔놓고 부산 사람은 북쪽에 있다 그러고, 서울 사람은 남쪽에 있다 그러고 그래. 그러니까 그건 분별은 기준이 있단 말이오. 기준으로부터 온갖 분별이 생기는데, 그 기준이 뭐요? 각자 자기 기준이오. 그러니까 그 분별은 객관적이지 않아. 자기가 기준이니까. 기독교인은 기독교인 기준으로 분별을 하고, 불교는 불교 기준으로 하고, 무슬림은 무슬림 기준으로, 한국 사람은 한국사람 기준으로.
한국사람 기준으로 하면 안중근은 애국자고, 일본 사람은 얼마 전에 테러범이다. 이렇게 말했잖아. 자기 기준으로 그렇게 말하는 거요. 그러니까 이 분별은 객관성은 없어. 내가 이렇게 분별하구나. 나는 이렇게 보구나. 그러지 그게 맞다 틀렸다고는 할 수 없어. 그런 생각이 드는 거는 뭐, 어쩔 수 없어. 자기가 중심이니까. 자기가 세계의 중심이니까. 그러나 그걸 맞다고 할 수는 없다는 거요.
그러니까 그걸 고집할 거는 없다는 거요. 그런 게 일어나는 거는 현실이니까 받아들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고집할 수는 없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느꼈다. 그게 마음 나누기 아니오. 좋아. 그런데 이게 옳다 이렇게 주장하면 안 된다는 거요. 아무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건 자기 주관이기 때문에. 자기 주관이라는 거는 자기 기준이라는 거요. 기준 깃발을 자기가 쥐고 있다 이 말이오. 자기가 기준으로 얘기 하는 거요.
둘이 길을 갈 때 한 번 보세요. 남편은 앞에 가고 아내는 뒤에 가면 남편은 자기 기준으로 “뭐하느라 꾸물딱 대노 얼른 오지.” 자기 기준으로 그렇게 얘기하잖아. 아내는 자기 기준으로 “뭐한다고 그렇게 서두르노?” 이렇게 한다고. 다 각자 자기 기준이라니까. 그러니까 뒤에 사람이 늦은 사람이 기준을 잡으면 앞에 사람은 빠르다 그러고, 앞에 사람을 기준으로 하면 뒤에 사람은 느리다 그래. 빠르고 느린 건 본래 없어. 그건 누구를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빠르다, 더디다 이런 말이 생긴다. 이 말이오.
이 세상에 모든 우리가 쓰는 분별은 다 어떤 기준을 두고 생기는 거요. 그러니 객관적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는 없어. 우리는 객관이 없어. 다 주관이야. 그래서 그 기준을 놔버린 상태에서는 무유정법이다. 이렇다. 저렇다 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상황, 그 조건에 딱 처하면 기준을 잡으면 오른쪽이 있고 왼쪽이 생기고, 앞이 생기고 뒤가 생기고, 옳은 게 있고 그른 게 있고, 맞는 게 있고 틀린 게 있고, 선이 있고 악이 있고, 이런 게 생겨. 기준을 잡으면 기독교인 기준으로 잡으면, 불교인 기준으로 잡으면, 나를 기준으로 잡으면.
그런데 그거는 그런 건 이해는 되지만, 그걸 고집할 만한 아무 근거는 없어. 자긴 자기 기준으로 자꾸 그렇게 말 할 수는 있어. 그러나 그럴 때, “제가 볼 때는 이렇습니다.” 하면 괜찮아. “저는 이렇게 느꼈습니다.” 괜찮아. 그러니까 그런 분별은 일어나지만, 분별을 움켜쥘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러니 이렇게 할 때는 “내가 이런 기준을 갖고 있구나. 내 까르마가 이렇구나.” 이렇게 자각하면 돼. 고집 안하면 점점 약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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