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사람은, 본질 모드는
그 관심이 거두어 들여서
여러분, 느낌은 자기 눈이에요, 눈.
그 위치가 할 수 없이
본질은 위치가 없지만
할 수 없이 말로 하자면
현상 안에서는 그 위치가 자기 눈이에요.
그러니까 항상 보는 것이 스스로 깨어 있는 상태
보는 것
지금 제가 눈이라고도 표현했고
다른 말로 하면 보는 것
보는 것에 나의 관심이 딱 그쪽으로 가 있다.
이거를 전문용어로는 회광반조(回光返照)
의식을 돌려서 거꾸로 비춘다.
회_ 돌릴 회
광_ 의식 광
반_ 거꾸로 반
조_ 비출 조
회광반조(回光返照)
항상 자기의 관심에 초점이
회광반조해서
회광반조라는 말은 다른 말로
자귀의_ 자기에게 귀해서
요 자기 자신의 본질인 본래면목인
육체적으로 말하면 지금 눈
눈이 있는 이 자리
여기가 의식이다 이거에요.
그 의식이 이렇게 펼쳐져서
이 세계가 의식 안에서 이렇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니까 항상 관심이 여기에 딱 가서 산다
그러면 이거 놓치면
죽은 목숨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요걸 마음자리라고 불러요.
심지(心地)
마음자리
지금 눈에 있는 심안
마음의 눈을 다른 말로 하면
마음자리라고도 불러.
왜냐?
여기가 밝아지면 여기서 한 생각이 일어나요.
그 모든 것이 일어나는 자리
생각뿐만 아니고
저 소리도 여기서 일어나고
저 반짝이는 나뭇잎도 여기서 지금 일어나고
모든 것이 여기서 일어나기 때문에
지금 여기 심안에서 모든 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거를 마음자리라고 불러요.
심지(心地), 마음 땅, 한자로는.
그래서 지금 여기에 초점이 가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를 지금 화두라고 하니까
‘화두를 놓치지 않고 있다’ 이런 말로 표현을 하는 거예요.
진짜 화두는 요거기 때문에
자각 자체이기 때문에
각성 자체이기 때문에
화두 놓치면 죽은 목숨이라고 표현을 하는 거예요.
근데 실제로 해보면
생각의 습관이 워낙 완강하기 때문에
깨어 있어도 금방금방 조금만 방심하면 다시 덮쳐요.
그러니까 계속 깨어 있도록
자기 관심이 다른 데 안 가고, 계속 자기한테 있도록
그렇게 하는 것을 부동심(不動心)이라고 해요.
움직이지 않는 마음
부동심
이건 수행이에요.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부동심을 기르는 거예요.
움직이지 않는 마음
요 초점, 요 자리가 여러분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의 자리예요.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는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른 것도 아닌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그러니까 이렇게 언어적인 모든 상대성을 뛰어넘은 절대의 자리
그것을 부동심이라고 하고
다른 말로는...
이 부동심을 기르는 것을 정력(定力)을 기른다고
고요하게 우리 내 마음이 선정 상태
그 힘을 기른다.
이거 다시 한 번 더 실감나네요, 오늘따라.
오늘따라 또 실감나네요.
여기 집 가(家)자잖아요.
집 가자, 집 가자, 밑에 다리 족자
우리의 의식의 관심의 다리가
집을 나가서 밖에 나가는 게 아니라
지금 이 눈이 있는 요 자리가 의식의 자리인데
이게 집이에요.
그러니까 다리가 집을 나가는 게 아니라
집 안에서 딱 있다.
여러분의 생각의 다리가 요 자리
자기의 우리의 존재의 고향
존재 자체
여기에 딱 정착해 있다.
이게 지금 정력을 기른다.
선정삼매의 힘을 기른다.
공부하는 사람은 자꾸 이런 말을 듣고
자꾸 이쪽에 관심을 가지면
이제 관심 가지는 것 자체가 힘인 거예요.
그래서 자꾸 집으로 돌아오고
“아, 이거구나” 하는 딱 그게 와.
그러면 그때부터는 정말 여기서 앉아 있는 힘을 기른다, 이거예요.
생각에서 깨어 있는 상태를 지속시키는 힘.
길러야 돼요.
그걸 꾸준하게 길러 나가는 게
딱 지금 관심이
나의 의식의 무게 중심이
눈에 와 있어야 돼.
그래서 눈에 와 있으면
여기가 밝아져요.
이게 의식이에요.
자각이 일어나.
그리고 이 의식의 수정구슬 속에
삼라만상이 다 들어와 있어.
그러니까 모든 게 이 의식 한 덩어리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의식 자체는 본질이고
여기에 나타난 것은 전부 현상이고
현상은 생멸이고
의식 자체는 불생불멸이고.
그러니까 이것이 딱 분명해서
이 자리에서 깨어 있는 힘을 길러서
그 우리를 괴롭히는 번뇌망상으로부터 우리가 해탈하는 것
이것이 실천되는 것, 실현되는 것.
이게 지금 아주 에누리 없는 철저한
우리가 현상에서 사는 한은
현상계는 인과의 세계예요.
인과다, 이 말은
철저히 내가 하는 만큼 내가 발전한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점을 우리가 믿고
그리고 실제로 해내서
그리고 그 해내는 사람이
오늘 같은 경우에,
제가 오늘 약간 감동이 있어요.
눈물 흘리신 두 분 말고
누구라고 지적은 안 하겠는데
제가 아까 막, 이렇게 막 들어갈 때
한 분이, 한 분이 굉장히 나랑 호흡
같이 호흡하는 걸 제가 느꼈거든.
이 말귀를 알아들으시고
막 같이 지금, 같은 파동에서 움직이는 걸 제가 느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분이 한 분, 한 분, 깨어나는 분이 이렇게 계셔서
그러면 저도 기쁘잖아요.
당연히 그럴 거 아니에요.
제가 지금 여기 온라인으로 보는 분들은
제가 점검을 못해서
오프라인 분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딱 보면
같이 지금 ‘같은 주파수대로 움직이고 있는가?’를
제가 느낄 수 있잖아요.
그런 공명이 일어나잖아요.
오늘 제가 아까 이야기했을 때
딱 알아들으시고
공명을 일으키는 분이, 이 중에 계셔서
굉장히 저로서는 참 기쁩니다.
여러분 보세요.
공명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계가 현상계의 원리 중에 하나가
공명이에요, 주파수예요.
한 인간이 가장 진실한 주파수에 들어가 있으면
그 모든 주변이 같이 진실 돼 져요.
참 이게 묘한 게 있어요.
그리고 이 주파수에는 우리 알다시피
이 모든 거리를
주파수는 바로 뛰어넘잖아요.
‘무전을 친다’ 이 말은
그 주파수가 딱 맞으면
아무리 멀어도 이 거리를 뛰어넘어서 통한다는 소리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내가, 아니면 한 사람이
정말로 진실의 주파수를 딱 가지고 앉아 있으면
우주가 울린다 이거예요.
여기에는 시공간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정말로 한 인간이 진실되게 수행을 해서
자기 마음이
평소에는 생각에 시달리던 사람이
꾸준하게 노력해서 고요한 상태로 쭉 앉아 있으면
우주가 울린다 이거예요.
한 인간이 진실되게 자기 마음을 닦아서
어떤 청정한 경지를 이루면
이 우주가 호응한다고 봐요.
그래서 화엄신장이 다 움직인다고요.
신장님이, 혹은 수호천사가 움직인다고요.
그러니까 그런 하나의 원리하에서
우리가 공명해서
그래서 가피가 있다. 은총이 있다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실제로 우리가 노력하면
거기에 따른 이런 가피가 있어요.
/거리가 없는 자기 자신을
거리를 두고 대상으로 파악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점을 찍지 못한다./
그럼, 점을 찍으려면
어텐션을 밖이 아니라
자기 자신한테로 가져와야 된다.
거리가 없으니까
자기 자신한테로 가져와야 된다.
/대상으로 파악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각을 일으키고/
대상으로 파악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각을 일으킨다 이거예요.
/그리고 생각이 일어나면 즉시 주객이 분리되고
주객이 분리되면 거리가 생겨버린다.
거리가 없는 자기를/
제가 지금 ±0 라는 말로 표현했어요.
그래서 거리가 없는 자기를
거리를 두고 파악하려고 하기 때문에
깨달음이 실패한다.
절대로 대상화되지 않는 것을 대상으로 삼으니까
그 즉시 아득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본질은
현상계 안에서는
본질을 이거라고 물건처럼 잡을 수는 없어요.
그러면 잡으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놓으면 어떻게 돼요?
보세요.
내가 본질을 잡아야겠다.
그러면 본질을 잡으려고 하는 시도를 모두 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어떤 시도를 일으키지 않으면
저절로 이 자리로 돌아온다 이거예요.
이게 중요한 부분이에요.
내가 뭔가를 하려고 할 때는
자기랑 멀어진다.
근데 하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거꾸로 됐다는 사실을 깨닫고, 탁 놓아버리면
여기가 본질이다.
자기가 본질이다.
지금 자기, 지금 여기, 뭐라고 표현하든
지금 깨어있는 의식, 이거
이게 본질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여기가 딱 맞아야 돼.
그래서 /생각을 따라가지 않고 버티면 저절로 자각이 일어난다./
생각을 따라가지 않고 버티면
이걸 지라 그래, 지(止)
멈출 지(止)자, 멈출 지.
저절로 자각이 일어난다.
이걸 관(觀)이라고 해요.
그래서 불교 수행은 지관(止觀)이에요.
생각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 지
멈출 지자
그러면 저절로 자각이 일어난다.
이게 관, 지관
지관의 동의어가 정혜(定慧).
정_ 선정, 정
혜_ 지혜 혜.
생각을 따라가지 않는 게 [선정]이고
그러면 저절로 [자각]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지혜]예요.
지금 선정과 지혜
줄여서 정혜.
수덕사 꼭대기에 가면 선방이 있죠.
선방 이름이 뭐예요?
‘정혜사’잖아요. 정혜
선정할 때 정, 지혜 혜자
지관이든, 정혜든, 인도 말로는 사마타, 위빠사나든
지금 다 원리는 같다.
생각 따라 가지 않는 것.
그러려면 깨어 있어야 되죠.
생각 따라 가지 않는다. 이 말은 뭐예요?
여기, 이 눈동자의 자리
눈동자의 자리에 딱 있는다, 이거예요.
제가 지금 이 말 하고 나니까 소름이 쫙 끼치네.
여러분
心晴, 눈 目자의 푸를 靑자
눈 목자에 푸를 청 자를 쓰면 발음은 (청,晴), 정이에요.
인사동에 옛날 시계 고치는 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네.
그런 가게가 하나하나 없어졌네요.
인사동에 아주 옛날 시계들 고치는 집이 있었는데
그 가게 이름이 용정이었어요.
용의 눈동자
눈동자 정(晴)자에요. 이게.
눈동자 정자예요.
그러면 심정(心晴)이라고 그러면 마음의 눈동자
정확하게 이걸 말해요.
지금 여러분
제가 지금 오늘 내내 말하고 있는 게
우리의 육안의 자리에
실제로 있는 것은 ‘마음의 눈’이 있습니다.
그 마음의 눈의 이름이
심정이에요.
마음의 눈동자
여러분 심정이
판소리에서 발음하기가 어려우니까
심청으로 바뀌었어.
심정이란 말은 어디서 나오느냐?
판소리 심청가에서
심청이 어머니 곽 씨 부인이
심청이를 낳고 핏덩이를 낳고 일주일 만에 산탈이 나서 죽으면서
유언을 남기기를
“눈 못 보는 심학규 가장을
내가 삭바느질을 해서 지금까지 잘 시봉했는데
경제력을 가지고 있던 나는 죽고
앞 못 보는 이 심봉사하고
거기다가 핏덩이까지 안겨서 나는 죽으니까
이 부녀가 앞으로 살아갈 모습이 하도 애처로워서
내가 이대로 죽을 수가 없을 정도로 원통합니다.
그래서 제 마지막 소원은
이 아이가 당신의 눈이 되도록.
그래서 심정이에요.
심학규는 우리예요.
“이 아이가 얼른 커서 당신의 눈이 되도록
이름을 심정이라고 지어 주시오” 하고 죽어요.
그러니까 심청의 이름이 원래는 심정이에요.
마음에 눈동자.
마음은 의식이잖아요. 그죠?
의식의 눈동자가 이거다 이거예요.
여러분,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이것이
의식의 눈동자예요.
다시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이것이
의식의 눈동자예요.
이게 지금 의식이에요.
의식인데 의식이 한 개 눈 같아.
한 개 눈 같아, 이게.
한 덩어리 눈
의식의 눈동자예요.
그러니까 심청이라는 이름 자체가
깨달음의 당처인
이 마음의 눈을, 마음의 눈동자를 지금 말하고 있어.
그러니까 참, 심청가 들으면 눈물 나거든요.
근데 그 구구절절이 우리로 하여금
이 마음의 눈을 뜨게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하여튼 애처로운 스토리를 통해서
우리를 일깨우고 있어요.
우리의 자각을.
결국은 뭐 하라는 건가?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것이 의식이라는 이 사실
그냥 모든 걸 거두절미해버리면
지금 우리가 있는 이 공간 자체가
이게 지금 의식이라는 이 사실
그 중심은 여기다 이거예요.
이 공간의
360도 공간의 중심이
지금 여기다 이거예요.
여기에 지금 뭐가 있는가?
한 개 의식이 있고
한 개 의식이 이 파란만장한 이 세계를
여기다가 지금 드러내고 있다, 이거예요.
이게 지금 이 존재의 실상에
여기에 눈을 뜬다.
심학규는 우리고
심청이를 통해서
우리가 이 마음의 눈을 뜨는 스토리
이게 지금 심청가에요.
그러니까 한국인들은 얼마나 지금 이 복 받은
마음공부에 있어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그러면 저 보입니까? 저 보입니까?
제가 나타나는 공간이 있죠?
그게 여러분의 의식이에요.
다시
저 보입니까?
제가 나타난 공간이 있죠?
그게 투명한 여러분의 의식이에요.
이대로 그냥
아예 여기서 빨리 알아차려.
지금 저 보입니까?
제가 나타난 이 공간, 투명한 공간
이게 그냥 의식이라고요.
이게 한 덩어리, 딱 요거
게임 끝이라고요, 그냥.
지금 이 것.
그럼, 지금 이 한 덩어리 공간이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 여러분의 육안에 있는 그 자리에 이게 있어.
그걸 느껴보라 이거예요.
실제로는 내 눈이 있어야 되는데
희한하게 이 공간이 있다니까요.
안 그래요?
그거 이거 이거다. 이 공간 자체.
이게 마니주.
제가 네팔에 카트만두 갔을 때
그 시내도 좋았지만
시내를 굽어보는 언덕 위에 사원이 하나 있어요.
그 사원을 가려면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돼요.
계단 올라가는 게 힘들었던 기억이 나.
근데 그 카트만두에 올라가서
시내가 이렇게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에 다 올라가니까
사원 하나가 딱 있어요.
언덕 위에.
그리고 사원 벽에
이만한 눈 하나가
항상 두 눈은 없어요.
눈깔이 두 개는 없어
항상 하나만 있어.
그럼 그 모든 것이 굽어 보이는 언덕 위에 사원이 이렇게 있고
그 벽에 이 큰 눈깔 하나가 이렇게 딱 그려져 있어요.
뭘 상징하느냐? 이거예요.
지금, 지금 이거를 상징한다, 이거예요.
지금, 이 눈 하나가 세상이다, 이거예요.
우리는 지금 세상이라고 하지만
알고 보면
자기한테 와 있는 무한의 의식 덩어리 하나
의식 덩어리 하나
한 개 눈
이게 지금 딱 눈앞에 언제나 있었는데
이걸 놓쳤다 이거예요.
왜 놓쳤는가?
여기에 나타난 이 현상으로서의 사물을 보느라고
이 전체 한 덩어리 눈을 놓쳤다.
그러니까 이거를 다시 일깨우려고
눈 뜬 봉사인 심학규의 눈을 뜨게 해주기 위해서
관세음보살이 심청의 이름으로 와서
마음의 눈의 이름으로 와서
심학규의 눈을 뜨게 해주는 것, 그 스토리.
여기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우리가 왜 태어났는가?
요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해서
무엇이 마음의 눈인가?
지금 내 눈앞의 시야 전체
이게 한 개 의식이다.
누구의 의식입니까?
누구의 의식이에요?
여러분 눈앞에 있는 그 한 개 의식이
누구의 의식이에요?
자기다, 이거야. 자기.
그게 자기다 이거야. 자기
진짜 자기
김 아무개 말고 진짜 자기
이 진짜 자기는
동시에 석가모니기도 하고, 예수이기도 하고, 마호메트기도 하고
지금 김 아무개이기도 해요.
시공을 넘어서.
지금 이거 하나
지금 내 눈의 위치에 앉아 있는
이 거대한 투명한 이 공간 하나
이게 눈이다, 이거예요.
이게 지금 의식이다.
이게 지금 모든 존재
이게 존재다.
이게 생명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이것이 이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인연으로 일어난
갖가지 삼라만상의 현상으로서의 생멸하는 이런 존재자들,
그리고 한 개 존재
한 개 존재 속에
수많은 존재자들이
인연 따라 생겼다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
이 세계의 실상이다.
지금 그걸 우리가 깨닫자는 거예요.
그러니까 깨닫고는
여러분 오늘도 약간 우는 사람이 많네.
지금 뭔가 알아차렸어요. 그죠?
통하죠?
그러면 이 약간을 알아차려도
이건 핵폭탄 같아.
아무리 작아도
탁 터지는 순간, 알아차리는 순간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다음 문제는
이 많은 시간
앉아서 이걸 챙기는 거야.
눈만 뜨면 이거잖아요.
눈 감아도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를 모르고 살았다가 이제는 알았으니까
이것을 계속, 이제는 계속
“지금도 있네.”
확인 작업
“지금도 있네”
“지금도 있네”
“지금도 있네.”
요 지금도 있네, 점을 계속 찍어가는 것
그러면 이것이 힘이 콱 붙어서
어느새 생각은...
조주 스님이 그랬어요.
조주 스님이
“여러분이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지만
나는 망념이 없다.
유일하게 밥 먹을 때 약간 망념한다.
그 외에는 망념이 없다.”
이게 무서운 말인 거예요.
조주가 120살을 살았잖아요.
120년 살아서
고불, 옛 부처라고 하는 별명으로 불린 조주가 한 말이
그 평생을
20살 전에 깨달았거든.
그리고 100년 살았잖아요.
깨닫고 100년 살았어.
그 조주가 만 년에 한 소리가
“나한테는 망념이 없다.”
여러분,
정말로 우리가 노력을 하면
이 생각 없이 살 수 있어요.
정말로 이건 기적 같은 일이지만
필요할 때만 생각을 하면 돼.
그게 하는 소리가
“밥 먹을 때는 약간 망념한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필요할 때는 잠깐 망념을 일으킨다.
근데 보통은 망념 없이 산다.
이게 지금 참 깨닫고 100년을 산 조주가 남긴
하나의 정언이에요.
이게 우리도 실현할 수 있다, 이거예요.
첫 스타트는 빨리 알아채셔야 돼요.
지금 눈앞에 있는 이게
자기 의식이라는 사실을
제가 눈앞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내 몸도 포함되는 거잖아요.
내 몸도 포함되는 이 공간 자체가
한 개 의식이에요.
한 개 눈이야.
한 개 의식의 눈이에요.
이 의식의 눈 속에 모든 것이
지금 출현, 생겼다가
생멸 생멸, 인연 따라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거를 한 번 딱 먼저 알아차려야 돼.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계속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다져나가면
어항 속에
이 말, 어항 속에
어떤 느낌이 있냐면
여러분, 생각이 없는 건 아닌데
어항 속에 물방울 하나가 뽀르르르르르 올라가서 탁 터져서 나가.
생각이 그런 식으로 보인다 이거야.
별 영향을 안 끼친다 이거야.
생각이 안 나는 건 아니지만
그냥 어항 속에 물방울 하나가...
여러분 그런 거 보셨죠?
물고기가 안에서 입을 깜빡깜빡하면
물방울이 이렇게 올라오잖아요.
그렇게 보인다 이거죠, 생각이.
그전에는 이 생각이 덮쳤는데
덮쳐서 끌고 갔는데
이제는 그 맑은 투명한 어항 속에
생각이
물방울 하나가 보르르르 해서 탁 터져 나가는
그런 식으로 아무 일이 없다, 편안하다.
이제 그런 공부를 우리가 지금 하고 있습니다.
깨닫고 해탈하는
이 과정이 나에게서 실현된다.
이게 우리가 이번 생에 태어난 존재의 이유예요.
이걸 실현하자 이거예요.
자, 오늘도 시간이 어느새 이리 지나갔네요.
예 감사합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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