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는 세 명의 스승으로부터 깨달음에 이르는 몇몇 수행법을 익혔다.
첫 번째는 고행을 통한 위빠사나로 진아를 찾는 수행이고
두 번째는 불이의 마음으로 절대에 이르는 수행이고
세 번째는 무소주하고 일체무애하여 해탈하는 수행이었다.
이 세종류의 수행법 외에도
싯다르타는 다른 세 곳의 수행법을 곁눈으로 보고 잠시 따라 한 적이 있었다.
호흡법이나 기도, 요가의 차크라 운용 같은 것인데
잠시 해 보고는 깨달음과 거리가 있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따라서 그가 세간의 수행법에 관심을 가진 것은 총 여섯 가지이고
그 가운데 세 명의 스승은
실제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싯다르타가 그동안 체득한 깨달음의 경지
그건 간략히 진아(본성), 반야, 절대, 무아, 해탈이었다.
이 다섯 가지 명제는 오늘날까지 깨달음의 척도나 법방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처럼 큰 의미를 지닌 경지임에도 싯다르타는 애써 그것들을 부정했다.
고차원 생각이 정교하게 만들어낸 허상으로 규정지은 것이다.
‘영혼이 정화되고 자유로운 의식을 얻게 되는 건 틀림없다.
하지만 분명 그 이상의 경지가 있을 것이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이룬 진아나 절대, 그리고 해탈.. 등을
능가하는 경지가 있을 것으로 믿었다.
아니 믿었다기보다는 채워지지 않는 구도욕 때문에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부턴 홀로서기이다.
왜냐, 앞선 세 스승을 능가하는 수행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테니 말이다.
싯다르타는 이후 6년 동안 수행에 매진하게 된다.
과연 그는 여태껏 자신이 이룬 경지보다 더 높이 오를 수 있을까?
만일 그렇게 해서 뭔가를 성취한다고 해도
그것이 더 이상의 경지가 없는 무상정등각임을 어찌 확신할 수 있을까?
싯다르타는 갠지스강을 건너 바이샬리 서편 숲으로 갔다.
그곳에서 삼림이 우거져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곳을 찾았다.
음식은 숲에서 구할 수 있는 열매나 풀잎, 뿌리 같은 것을 뜯어 생식했다.
어쩌다 그곳을 지나던 목동이나 나무꾼들로부터 공양을 받게 되더라도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 것만 취했다.
싯다르타는 야윌 대로 야위어 뼈만 앙상한 몰골이 되었다.
그는 도대체 어떤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인가?
싯다르타는 행여 자신이 놓친 것이 있을지 몰라
세 명의 스승에게 배운 바를 점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진아와 절대, 그리고 해탈의 경지에서 한 생각을 일으켜
그것의 온전함을 진단했다.
수차례 하여도 그렇게 이룬 경지가 뭔가 알 수 없는 미진함이 있었고
그것이 뭔가에 대한 화두를 잡았다.
선정과 화두, 이 두 가지가 그가 홀로 한 수행이었다.
아무튼 그 당시 싯다르타의 수행이 너무나 혹독하여
이를 본 수행자들은 하나같이 그가 고행에 매진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하루는 첫 번째 스승인 밧가와가 바아샬리 지역을 찾았다가
싯다르타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신의 제자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싯다르타를 보거라.
나를 떠나 두 명의 스승을 더 섬겼지만 모두 실패하고
결국은 내가 가르쳤던 고행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싯다르타의 수행은 겉으로 보면 철저한 고행이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서 이는 구도의 바람을 아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고
싯다르타는 더욱 야위어져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하게 보일 정도가 되었다.
방광대장엄경에 의하면
싯다르타의 몸은 부서진 집의 서까래처럼 갈비뼈가 드러나고
등뼈가 튀어나온 것이 마치 대나무 마디와 같았고
눈은 우물처럼 움푹 들어갔고
피부는 쭈글쭈글한 것이 말라비틀어진 육포의 형상이고
손을 들어 먼지를 털면 몸의 털이 우수수 떨어졌고
배를 문지르면 등가죽에 가서 닿았다고 한다.
이처럼 싯다르타는 목숨을 바쳐 가며 수행에 정진했다.
하지만 그에게 더 이상의 깨달음은 없었다.
진아와 절대, 그리고 해탈을 능가하는 경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철저히 무너져 내렸다.
‘죽을 때까지 정진해도
아니 내생에 또 그 내생에 태어나 정진해도 기약이 없는 길이다.
아, 정녕 더 이상의 경지는 없는 것인가!’
싯다르타는 자리를 털고 간신히 일어났다.
기력이 극도로 쇠한 그는 니란자라 강으로 가서 몸을 씻었다.
수행자가 몸을 씻는 것은 고행을 중단하는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이를 지켜본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실망이 매우 컸다.
늘상 자신들에게 고행의 본을 보여 왔던 싯다르타가 아니었던가.
기력이 너무 없었던 싯다르타는 몸을 씻은 뒤 강가에 쓰러지듯 누웠다.
이대로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상태였다.
그런 그에게 강변 마을에 사는 수자타라는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유미죽을 싯다르타에게 공양했다.
싯다르타는 참으로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었다.
기운을 차린 싯다르타는 무턱대고 발걸음을 옮겼다.
텅 빈 그의 마음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번뇌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실로 더 이상의 경지는 없는 것인가!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이 갈증은 무엇인가.
궁극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마저 버려야 하는가.
나는 익히 그런 마음조차 버려 해탈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렇게 이룬 해탈이 실존이라는 확신을 얻지 못했다.
실존에 대한 온전한 자각이 없이 어찌 참된 깨달음이라 하겠는가.
아,... 실존, 그것은 영원토록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란 말인가!’
싯다르타는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이제 자신은 선택해야 한다.
환속하여 부친의 뜻에 맞춰 살아갈지
아니면 세 명의 스승으로부터 배운 경지에 안주하며 수행자로서 살아갈지를...
양쪽 길 모두 마지못해 가야 하는 불편한 길이었다.
싯다르타는 더위에 지쳐 나무 그늘 밑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무성한 잎을 늘어뜨리고 있는 보리수나무 아래였다.
바로 이 대목부터 기존 힌두교 수행과 구별되는 불교의 놀라운 법방이 시작된다.
싯다르타는 세상에 없던 전대미문의 수행법으로 무상정등각을 성취하게 되니 말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가장 중요한 싯다르타의 성불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경전 어느 곳에도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크게 왜곡되어 불법을 훼손하고 있다.
싯다르타가 보리수나무 아래에 좌정할 때의 굳은 결심과
중도로써 수행에 임했다는 방법론이 대표적인 왜곡이다.
방광대장엄경에 보면
싯다르타가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으면서
“내가 이제 무상의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면
차리라 이 몸을 부숴버릴지언정
이 자리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라고 말하며
스스로 굳게 다짐했다고 한다.
바로 이 장면이 금강발원으로 알려진 대목이다.
다이아몬드처럼 굳건한 깨달음에 대한 원력,
여기서 싯다르타의 수행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이런 다짐은 세 명의 스승을 떠나 홀로 선 이후
매일 같이 빠지지 않고 했다.
그랬던 다짐을 새삼스럽게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할 이유가 뭐가 있으랴.
만일 싯다르타가 그렇게 발원했다면 그는 무상정등각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 온전한 깨달음은 그런 작심과 발언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왜곡인 중도는 앞서 언급한 바가 있다.
그런데 방광대장엄경에 보면 중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나온다.
“비구들아,
너희들은 마땅히 두 가지 치우친 길을 버려야 하리라.
내가 이제 너희들에게 중도를 설할 터이니 바로 듣고 부지런히 닦을지니라.
중도란
바른 소견, 바른 생각, 바른말, 바른 행위,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기억, 바른 선정이니라.
이름하여 팔정도로서 이와 같은 법을 일러 중도라 하느니라”
불교의 태동과 함께 시작된 핵심 교리인 팔정도가
곧 중도이고
깨닫는 방법이란 얘기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바른 생활을 실천하면 깨닫게 된다’는 평범하고 단순한 얘기이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왜 임제가 고함을 치고, 덕산이 몽둥이를 휘둘렀는지 십분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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