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손녀들이 이렇게 신체장애가 있으면 할머니로서 마음이 아프겠죠. 그럼 이 마음이 아픈 것의 근본이 어디 있을까? 이런 말이오. 마음이 아픈 것의 근본 원인이 어디 있을까? 본인이 생각해 보면 장애인 아이들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돼 있죠. 그러면 장애인 아이들을 가지면 왜 마음이 아프고 힘들까? 장애인은 좋지 않다. 이런 거 아니겠어요? 내가 좋지 않은 것을 가졌기 때문에 괴롭다는 거 아니에요. 신체가 장애면 좋지 않은 거냐? 나쁜 거냐? 이 말이오.
우리가 그렇다. 이렇게 생각한다. 바로 신체가 장애면 나쁘다. 이것이 중생의 생각이다. 어리석은 중생의 생각이다. 어리석은 중생의 생각 때문에 장애인은 나쁘다고 생각하고 장애인을 둔 것은 나에게 큰 괴로움이다. 또는 무슨 죄 받음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 또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의 가장 밑바닥에는 ‘장애인은 나쁜 거다.’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럼 장애인은 나쁜 것인가?
그럼 여기 있는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다 물어봐라. 장애인 좋다 하는 사람 누가 있느냐? 자기가 장애인인 거 다 싫어하고 자기 배우자로 장애인 좋게 맞아들일 사람 누가 있으며, 자기 자식 장애인 되기를 누가 원하느냐? 그러니 나쁘지. 좋으면 하지. 왜 안 해? 이렇게 얘기할 거 아니냐. 이거야.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다 중생이기 때문에 그렇다. 장애인이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중생이기 때문에 그렇다.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부처님의 근본 도리에서 본다면 모든 사람, 모든 사물, 모든 존재는 거기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 그것은 다만 그것일 뿐이다. 좋고 나쁨은 우리들의 마음에서 생겨나는 거다. 좋고 나쁨이 사물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물을 인식하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좋고 나쁨이 있다.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명 업식에 가려진 마음이다. 만약에 우리가 무명 업식이 벗어나지면 어떠냐? 그 맑고 청정한 마음에서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면 사람에게는 사물에게는 존재에게는 좋고 나쁨이 없다. 그것은 다만 그것일 뿐이다.
이것을 근본 교설에서는 연기라 했고. 또 무아와 무상이라고 했다. 대승 불교에서는 공이라고 했다. 제법은 공하다. 거기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 크고 작음도, 늙고 죽음도, 깨끗하고 더러움도, 일어나고 사라짐도 없다. 이 모든 분별은 우리들의 무명업식에 가려진 어리석은 마음에서 일어난 거다. 그러면 피부가 검다는 것은 그냥 사물의 하나의 특징입니다. 그건 그 사람이 나빴기 때문에 피부가 검은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피부가 검은 것도 아니다. 그냥 검은 빛깔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하나의 존재의 특징일 뿐이다.
피부가 희다는 것도 마찬가지고 피부가 누르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눈이 동그랗거나 눈이 작거나 코가 오뚝하거나 코가 납작하거나 그것은 사물의 생김새 하나의 특징일 뿐이다. 그 무슨 사람이 죄를 짓고 안 짓고 이런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분별이 검은 것은 나쁘다고 하고, 흰 것은 좋다고 하고, 큰 것은 좋다고 하고, 작은 것은 나쁘다고 하고. 눈도 크게 찢어지면 좋다고 하고, 적게 찢어지면 나쁘다고 하고.
그렇게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거다. 우리들의 인식에서 일어나는 거다. 그러니 이 장애도 마찬가지다. 사고가 나서 팔이 하나 부러졌거나 안 그러면 선천적으로 장애였거나 그것이 그 사람의 죄하고 관계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그렇게 태어났다. 그렇게 생겨났다. 그러면 키 작은 사람에 비해서 키 큰 사람이면 선반에 있는 물건을 내릴 때 유리합니까? 불리합니까? 유리다. 그 선반의 물건 내리는데 유리하다고 그것이 좋은 게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큰 코끼리는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선행을 많이 해서 덩치가 크게 됐고, 조그마한 쥐새끼는 전생에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조그맣게 태어났다. 이렇게 이해해야 된다. 팔이 하나 없으면 나쁜 것이 아니라 생활하는데 좀 불편하다. 키 작은 사람이 선반의 물건 내리는데 좀 불편하듯이. 그러면 키 큰 사람은 그냥 내리면 되고. 키가 작은 사람은 의자를 놓고 올라가서 내리면 되고. 아니면 선반의 물건 내릴 때는 키 큰 사람에게 부탁해서 내리고.
아주 마룻장 밑에 좁은 공간에 물건이 떨어졌으면 덩치 큰 사람은 못 들어가서 못 꺼낸다. 그럴 땐 누구를 시켜야 된다? 조그마한 어린아이한테 시켜서 가져오게 해야 된다. 이렇게 역할이 다르다. 큰 것은 그것에 맞게 사용하고 작은 것은 작은 것에 맞게 사용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장애면 불편하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개선하면 된다. 팔이 없다면 의수를 하고, 다리가 없으면 의족을 한다. 얼마 전에 제가 TV를 보니까 두 다리가 다 없는데, 요즘 기술이 발달해가지고 새로운 의족을 넣어서 100m 달리기를 10초 얼마에 하는 사람을 봤어요. 나는 두 다리가 멀쩡해도 15초도 뛰기 어려운데. 두 다리를 다 의족을 해서 10초 얼마에 달린다. 이거요.
휠체어를 타고 가는 사람은 더 빨리 간다. 이 사람은 휠체어가 아니고 의족을 해서도 그만큼 빨리 달린다. 전에는 일하는데 덩치가 큰 사람, 유리했다. 그러기 때문에 머슴을 들여도 월급이 많고 일당이 높았다. 이거야. 그런데 요즘은 기계를 갖고 하기 때문에 남자나 여자나 일당에 차이 없고, 포클레인 운전사가 덩치가 크다고 더 받고, 덩치가 작다고 적게 받는 게 아니다. 그러니 이것은 어떤 상황에서 불편한가?
선반 위의 물건을 내린다고 하는 상황에선 키 큰 사람이 유리하고 키 작은 사람이 불리하다. 그렇다고 키 큰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키 작은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이 말이오. 이런 상황일 때는 키 작은 사람이 키 큰 사람에게 부탁해서 물건을 내린다고 해서 키 작은 사람이 인생살이에 불리한 게 아니다. 이 상황에서는 부탁하면 된다. 다시 말하면 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을 도우면 된다. 이 말이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사다리를 놓거나 의자를 놓거나 해서 그것을 보완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신체장애는 건강한 사람들이 그가 불편한 거에 대해서 도움을 줘야 된다. 마치 키 작은 사람이 키 큰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선반의 물건을 내리듯이. 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을 위해서 선반 위의 물건을 내려 주듯이. 건강한 사람이 장애인을 위해서 그 조건에서 필요한 것을 도와주면 되고. 장애인은 필요한 것을 도움을 요청해서 해결하면 된다.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은 여러 가지 기술적인 개발을 통해서 해결하면 된다. 육체적인 장애는 그렇게 해결하면 된다. 그러니 우리가 정신적으로도 역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돌보면 된다. 병이면 치료하며 된다. 그러니 문제는 장애인 자식을 낳았다면 부모를 떠나서 오늘날 사회의 자연의 원리에서 건강한 사람이면 장애아를 돌봐야 된다. 부모라면 자식을 돌봐야 된다. 어린아이라면 어린아이를 돌봐야 된다.
건강해도 어린아이면 부모가 어릴 때 돌봐야 되는데. 장애가 있으면 어린아이라서 돌보는 게 아니라 장애이기 때문에 돌봐야 된다. 옛날에는 10명 애를 낳아서 10명을 돌봤는데, 그때도 힘들다고 아우성 안 했는데, 요즘은 하나나 둘 낳아놓고도 아우성을 친다. 그러니까 하나나 둘 낳아놓고 돌보다가 10명 낳아놓고 돌보는 것처럼 하나를 낳아도 장애인이라면 둘 셋을 낳아서 돌보는 만큼 돌보는 데 시간이 많이 든다.
그러면 지금 애기가 하나다. 장애인이다. 또는 둘이다. 하면 옛날 어른들을 생각해서 10명을 돌보는 마음을 내면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이게 다 욕심에서 빚어진 거다. 이것은 마치 부자가 되고 싶은데 부자가 못돼서 괴로운 것과 같고, 출세하고 싶은데 출세를 못해서 괴로운 것과 같고, 건강하고 싶은데 건강하지 못해서 괴로운 것과 같고. 우리 아들 좋은 대학에 넣고 싶은데 못 넣어서 괴로운 것과 같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피부가 희고 눈이 댕그랗고 머리는 노랗고 뭐 이런 애를 낳고 싶은데 그런 애가 낳아졌다고 괴로워하는 것. 이게 다 똑같은 중생의 잘못된 생각 때문에 생겨난 괴로움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런 공연히 인식을 잘못한 것을 자꾸 원인을 만들어서 ‘너는 전성에 무슨 죄를 지어 이런 애를 낳았다,’ 이렇게 가면 이것은 꿈속에서 헤매는 것과 같고, 허공의 헛꽃을 꺾으려는 것과 같다. 신체장애가 있는 아이를 둔 이것을 나쁘다는 인식을 하니까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나.’ 자꾸 이렇게 연결을 하게 된다. ‘하나님이 나에게 벌을 주었나.’ 자꾸 이렇게 연결하게 된다. 이것은 다만 장애일 뿐이다. 제법이 공한 도리를 알면 이런 생각이 다 없어진다.
이런 인연을 만났으면 내가 이 둘 관계에서 자식과의 관계에서 단순히 보통사람들 어른과 아이, 엄마와 자식이라고 돌보는 것을 좀 더 넘어서서 건강한 사람과 장애인 사이에서 돌본다. 는 역할이 하나 더 추가됐을 뿐이다. 그러니 이런 잘못된 인식에 근거를 두기 때문에 누가 괴로워지느냐? 본인이 괴롭다. 죄 아닌 것을 죄라고 그러고, 재앙 아닌 것을 재앙이라고 그러고. 이렇게 하니까 지금 본인이 과보를 받는다.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서 본인이 고통을 겪는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부처님 법에 귀의해서 법을 올바르게 알아야 된다. 반야심경 첫 구절만이라도 알아야 된다. 오온이 모두 공함을 밝게 비추어 보니, 모든 괴로움이 다 사라지도다. 한마디로 말하면 내가 착실히 산 거 하고, 내가 열심히 산 거 하고, 신체가 장애인 자식을 둔 거 하고 연관이 있는 게 아니다. 이거요. 내가 애기를 가졌거나 할 때, 내가 어리석어서 남편을 미워하고 괴로워하고 신경을 과다하게 쓰면 뱃속에 있는 아기가 다칠 수가 있다.
그래서 장애가 될 수가 있다. 이럴 경우에는 내가 참회를 해야 된다. 내가 마음을 나쁘게 먹어 가지고 애가 장애가 됐다. 그런 뜻이 아니라. 어리석어서 내가 내 몸을 상하게 하고 내가 내 자식 몸을 상하게 했다. 이것은 나의 어리석음이 나에게 고통을 가져온다. 이걸 참회하는 거요. 그게 아니고 유전적으로나 사고로 인해서 다친 것은 그건 누구의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오히려 불법을 아는 자는 이게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자식을 낳았나?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불법을 모르는 자는 이런 자식을 둔 것을 괴로워한다면, 불법을 안다면 보살의 마음을 내서 더 정성을 기울여서 돌보는 마음을 내는 게 부처님의 제자다. 제 자식이 아니라도 돌볼 아이들이 있으면 어른이 아이들을 돌보고, 제 자식이 아니라도 신체장애가 있으면 건강한 사람들이 그 사람을 도와야 된다.
부모가 자식을 돕는다는 것을 넘어서서 그러한 역할이 하나 추가됐을 뿐이지 거기에 무슨 다른 아무런 일도 없다.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고, 법의 근본을 꿰뚫어서 “아이고 내가 꿈속에서 강도를 만나 쫓겨 다니는 것처럼 헛거를 보고 내가 놀라서 괴로워했구나. 이렇게 눈을 번쩍 뜨고 정신을 차려서 이런 인연이 된 것을 오히려 기뻐하고 딸과 더불어 손녀딸들을 잘 돌보는 마음을 내야 된다.
자꾸 할머니나 부모가 스스로 어리석어서 괴로운 마음, 자기 어리석음으로 또 딸을 불쌍하게 보고 불쌍한 마음을 내면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더 큰 장애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니 이렇게 기도해야 된다.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어리석어서 법의 진실을 보지 못하고 복을 재앙이라 하고 그동안에 괴로워했습니다. 저도 관세음보살님처럼 작은 관세음보살이 되어 내 손녀딸들을 귀여워하며 잘 보살피겠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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