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 세상에 사물을 보면 모든 사물은 다 생겨났다가 사라지죠. 그렇습니까? 예.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이것을 뭐라 그러냐 하면 생멸이라 그래요. 생멸. 생긴 것은 다 사라지게 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서 생겼느냐? 어디에서 시작이 됐느냐? 여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죠. 그 가운데 하나가 창조설이오. 하나님이 창조했다. 그러면 사라지게 되면 멸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여기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 중에 하나가 종말론이오. 죄를 지은 자는 영원히 지옥의 불구덩이에, 선한 자는 영원히 천국에 간다.
그럼 불교에서는 어떻게 보느냐? 불교에서는 눈을 감고 보면 생기고 사라지는 게 있는데, 눈을 뜨고 보면 생기지도 안하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렇게 말해. 눈을 감고 본다. 이게 범부중생이오. 어리석은 자가 보면 생기고 사라지고, 깨닫고 보면 사실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게 무슨 말이다? 불생불멸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얼음을 놔뒀는데 녹아서 없어지죠. 그럼 어린아이는 그걸 보고 ‘엄마, 얼음이 없어졌다,’ 이래요. 그리고는 뭐라 그거냐 하면 ‘엄마, 여기 물이 생겼네.’ 이래요. 그런데 어른은 그걸 보고 얼음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물이 생긴 것도 아니고, 다만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됐다. 얼음이 그 모양이 변했을 뿐이다. 그러니 없어진 것도 아니고, 생긴 것도 아니다. 변화를 알지 못하면 생멸이 생멸관이 생기고, 변화를 알면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닌 줄을 알게 된다.
아침에 밖에 나가서 동녘을 보면 해가 뜨고, 저녁에 서녘에 보면 해가 집니다. 해가 뜨고 해가 진다고 생각을 할 때는 왜 뜰까? 왜 질까? 의문이 생겨요.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신이 아침에 불을 붙이고, 저녁에 불을 끈다. 이렇게 생각해.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정말 그럴까? 그래서 동산에 올라가 봤더니 그 밑에 해가 있어. 또 조금 더 가 봤더니 그쪽에도 해가 있어. 조금 더 가봤더니 거기도 해가 있어. 붙이지를 않아. 그런 줄 알고 서산에 올라가 봤더니 더 따라가서 봤더니 해가 계속 있어. 해는 지구를 돈다.
그런데 더 연구를 해 보니까, 해가 지구를 도는 게 아니고, 지구가 돌뿐이다. 지구가 해는 가만히 있는데, 지구가 뺑뺑뺑뺑 돌다 보니까, 지구에 사는 우리 눈에는 지구에 가려 해가 보였다 안보였다, 보였다 안보였다, 보였다 안보였다 하니까, 해가 뜬다 진다 하는 착각이 생겼고, 조금 더 살펴봐도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처럼 착각이 일어난다. 사실은 해는 뜨는 것도 아니고 지는 것도 아니다. 그럴 때 범부중생은 자기관점에서. 자기 경험을 중심으로 해서, 그걸 객관화 시켜서, 해가 뜨고 진다 이렇게 말하는 거고
우리가 지구 밖에 나가서 보면, 해가 뜨고 지는 게 아니고, 해가 지구를 도는 게 아니고, 지구가 스스로 돌기 때문에 그런 착각이 생겼다. 그러니 해는 뜨는 것도 아니고, 지는 것도 아닌 줄을 알게 되면, 해가 왜 뜨느냐? 해가 왜 지느냐? 이런 질문은 생기지 않는다. 그런 질문에는 대답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뜨고 지는 것이 객관적인 거 같지만, 뜨고 진다는 것은 우리들의 착각에서 생기는 거요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 사실인거 같지만, 착각에서 깨면 어떠냐? 생긴다. 없어진다 하는 것이 우리들의 관념에서 일어나는 거요. 그런데 이거는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얘기를 해도 정신 나갔나, 아침에 나가봐라. 해가 뜨지. 나만 그러냐? 딴 사람 다 봐도 해가 뜨는데. 자기가 돌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중심에 놓고 볼 때는 자기가 돈다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어. 그래서 지구에서 나와야 ‘오~ 지구가 돌구나.’ 하는 거를 알 수 있어. 우리가 자기로부터 나와야, 이걸 아상이라 그러는데, 아상에서 벗어나야 ‘어~ 내 착각이구나.’ 이렇게 알 수가 있어.
그러니까 창조니 종말이니 하는 거는 굉장히 연구를 잘해가지고 참 나름대로 해서 노력은 했는데. 착각을 기초로 해서 이유를 달은 거다. 그러기 때문에 이 깨달음이라는 건 착각에서 깨는 거지, 착각을 사실화하고 원인을 찾는 게 아니다. 여러분들이 꿈에 도둑놈을 만났다. 아무리 도망을 가도 그 놈의 강도가 내 뒤에 따라오죠. 온갖 노력을 해도 벗어나기가 어려워. 하~ 관세음보살님 좀 살려달라고 간절히 빌었더니, 관세음보살님이 나와서 딱 숨겨줬어. 그럴 때 아이고 살았다. 관세음보살이 너무너무 고맙죠. 도둑놈 너무너무 밉죠.
그런데 눈을 딱 뜨니 꿈이야. 눈을 뜨고 보면 미워할 강도도 없고, 고마워할 관세음보살님도 없어. 그래서 미혹한 중생에게는 친한 이와 미운 이가 있고. 눈을 뜬 보살에게는 친한 이와 원수가 따로 없다. 어떤 사람이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갔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어져 물에 빠졌어. 그래서 허우적대. 살려달라고 막 아우성이야. 이 사람은 굉장히 후회가 되죠. 바다에만 안 나왔으면 안 빠졌을 텐데. 그죠? 이 사람은 두 번째 사람이오. 다시는 바다에 안가. 바다에 빠질 일이 없죠. 이 사람 굉장한 사람 갖지만 이 사람도 자유가 없지. 왜? 바다에 못나가잖아. 물에는 안 빠질지 몰라도 바다에는 못가 보잖아.
세 번째 사람은 배를 크게 만들어서 바람이 불래면 불어라. 까짓 것. 파도야 칠래면 쳐라. 그리고 바다에 가서 놀아. 굉장한 사람이죠. 첫 번째 사람은 살려고, 놀라고 바다에 갔다가 물에 빠져 죽겠다고 우성치는 거요. 여러분들이 지금 행복 하려고 결혼을 했는데, 그 남편 그 마누라 때문에 죽겠다고 아우성치면, 이런 사람이오. 자식 날 때는 좋을라고 났어요? 괴로울려고 났어요. 좋을려고 났는데 애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이것도 범부중생이오. 사업을 벌일 때는 돈 벌려고 벌렸는데, 날리고 본전 생각날 때. 이것도 범부중생이오.
자기가 선택해서 회사에 취직해서 회사를 욕하고 못살겠다. 자기가 돈 벌려고 종업원 채용해놓고 종업원 말 안 들어서 못살겠다. 이런 사람은 다 배타고 바다에 놀러 갔다가 물에 빠져가지고 허우적대는 사람이오. 이게 범부중생이오. 두 번째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오. 바다에 안 나가 버려요. 빠질 일이 없어. 결혼 안 해버려. 자식 안 낳아버려. 사업 안 해. 종업원 채용안해. 안 해버려. 어디로 간다? 사람 없는데, 산으로. 숲으로 가버려. 머리 깎고 혼자 달랑 살아.
그러면 바람이 불 태면 불어라. 상관없잖아. 그지? 세상이 엎어지든 자빠지든, 아우성치고 이렇게 괴로워한 거 보면 고소한 거요. 그래가지고 딱 사는 게 요게 현명한 사람이오. 요게 스님들이란 말이오. 여러분들이 스님들 보면 부럽죠? 허우적대다가 보면 ‘아이고, 내 팔자야. 내가 어쩌다가 애래 됐노.’ 싶은 거요.
그런데 세 번째가 뭐냐? 성인이오. 보살이오. 큰 원력의 배를 타고 세상에 살아. 세상에서 어울려 살아도, 결혼해도, 마누라 때문에 괴롭다. 안 그래. 마누라가 상말을 하면 지랄을 해도 끄떡없어. 남편이 술을 먹고 개구신을 쳐도 상관없어. 애가 뭐 어떻던, 상관없어. 그러니까 세상에 몸을 두고 있어도 세상에 휩쓸리지 않아. 범부중생은 세상에 때가 묻는 사람이오. 현인은 까마귀 노는 곳에 백노야 가지마라에요. 보살은 연꽃처럼 진흙탕에서 자라도 때 묻지 않듯이 세상에 있어도 때가 안 묻어. 술꾼하고 있어도 술 안 먹고, 거짓말쟁이와 같이 있어도 거짓말 안하고, 게으른 사람하고 같이 있어도 부지런하고. 도무지 구애를 안 받아.
그런데 이걸 철학적으로 얘기하면 첫 번째가 (일 사)자를 써서 理法界사법계라 그래. 여러분들 고상해 지는 거요. 화엄경 도리요. 불경에서 제일 어려운 게 화엄경이잖아. 두 번째 세계가 뭐냐? (리치 리)자를 써서 理法界리법계요. 첫 번째가 현상의 세계, 두 번째가 본질의 세계, 이때는 이 세계와 저 세계는, 이건 어리석은 세계, 저건 현명한 세계. 딱 별개의 세계. 이건 지옥이고 이건 천당이고. 그런데 이 세 번째 세계가 뭐냐? 리사법계야. 리와 사가 걸림이 없이 둘이 아닌 세계.
바다와 육지가 나누어졌는데, 이거는 바다에서도 좋고 육지에서도 좋아. 이걸 반야심경 논리로 하면 첫 번째 세계는 색의 세계, 두 번째 세계는 공의 세계, 세 번째 세계는 색즉시공의 세계다. 그런데 네 번째 세계가 또 있어. 이 네 번째 세계는 때를 묻히는 사람이오. 때가 뭇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가서 때를 묻혀. 남의 때를 자기에게 묻히고 남을 깨끗하게 해 버려. 해녀가 조개 따러 물에 풍덩 뛰어들었다. 이 학생 한 번 얘기해봐. 물에 빠졌나? 안 빠졌나? 빠졌어? 구제하러 가야 되겠네? 구하러 가야 되잖아. 안 빠졌어? 그럼 육지에 있어?
해녀가 조개 따러 물에 들어갔을 때는 현상을 보면 물에 빠졌죠? 내용을 보면 빠졌어요? 안 빠졌지? 자기 볼일 보러 갔잖아. 그러니까 이게 첫 번째 세계하고 겉으로는 똑 같애. 둘 다 물에 빠졌어. 그런데 첫 번째 사람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이고, 네 번째 사람은 조개를 따, 첫 번째 사람은 옆에 사람 도둑질하면 지도 따라 도둑질 해. 도둑놈이 둘이 되. 그런데 네 번째 사람은 옆에 사람 도둑질할 때 자기도 도둑질을 같이 하는데 이틀 있으면 저 도둑놈이 도둑질을 안 해버려.
그러니까 어떤 스님이 ‘아주 도가 높다.’ 여기 어느 스님, 어느 스님. 있죠. 도 테스트 한 번 해 볼까? 전부다 머리를 길러가지고, 딱 사복을 입혀서, 전부 건축공사판에 일용직 노동자로 한 번 붙여보자. 어떻게 하는지. 하루, 이틀, 열흘, 백일 붙여 놓으면 어떻게 할까? 그냥 거기 물에 섞어가지고 술 먹고, 오입하고, 모처럼 머리 기르고 노동자니까, 내가.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난 이건 죽어도 못하겠다 하고 때려치우고 가버리는 사람도 있을 거고. 느그야 술을 먹던지, 오입을 하고 다니든지 말든지. 나는 내 대로 사는 사람 있을 거고.
그런데 첫 번째나 두 번째, 세 번째가 이 세상에 무슨 도움이 되겠나? 세상에 내려오면 세상에 섞여버리고, 아니면 세상에서 도망가 따로 살거나, 세상에 있어도 세상 속에서 지만 깨끗한 거요. 그런데 이렇게 똑같이 같이 노가다를 하는데, 그 노동자들이 뭔가 그 사람한테서 배울게 있다 이거야. 그 노동자들의 삶이 바뀐다 이거야. 그럴 때, 이게 이 세상의 유의미하겠죠? 그런데 우리 이렇게 테스트하면 몇 사람이나 이렇게 될 수 있을까?
우리가 헛된 도를 구하면 안 돼. 이 헛된 도가 뭐냐? 상에 집착 하는 거요. 그 머리모양, 그 옷 모양, 그 지식, 그 지위, 그 이름, 법륜스님이라고 하는 이름, 머리 깎은 모양, 가사장삼이라는 모양, 뭐 안 먹는다 하는 그런 거, 책 썼다 하는 지식. 이런 것으로 어쩌구 저쩌구 하면 안 돼. 그런데 집착하면 우리는 진실을 보지 못한다. 그러니 이 네 번째 경지에 오면, 이 첫 번째하고 두 번째하고 큰 차이가 있어? 하나는 바보같이 바다에 가서 빠지고, 살려달라고 아우성 치고, 다른 하나는 바다에 안 나가니 얼마나 현명해요. 바다에 빠진 사람은 육지에 있는 사람보고 부러워하죠? 자기인생을 후회해.
그런데 첫 번째 두 번째 보면 돌다 갇혀 있죠. 반쪽짜리잖아. 그러니 세 번째 사람은 바다에도 마음껏 다니잖아. 그런데 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사람의 공통점이 뭐요? 물에 안 빠지는 거요. 아무튼. 행복은 물에 안 빠지는 거요. 그런데 첫 번째 사람은 안 빠져야 되는데 빠졌으니 죽을 맛이고. 두 번째 사람은 안빠질려고 바다에 안가는 거고. 세 번째 사람은 바다에 가도 안 빠져. 자랑스러워. 그런데 네 번째 사람은 물에 안 빠져야 된다, 하는 이것도 놔 버렸어. 그럼 이게 무슨 뜻이냐? 이 사람은 바다에 가도 좋고 안가도 좋고. 바다에 갈 때 작은 배도 좋고, 큰 배도 좋다. 이 사람은 풍랑이 쳐도 좋고 안쳐도 좋고. 배가 뒤집혀 물에 빠져도 괜찮아. 안 빠지면 안 빠지는 데로 좋고, 빠지면 뭐 한다? 빠진 김에 조개를 줍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다 유용하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다 유용하다. 그러기 때문에 첫 번째 사람은 재앙이 많아. 물에 빠져 아우성치면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쳐. 온 갖게 다 재앙이야. 네 번째 사람은 온 갖게 다 가피야. 이 세상에 자기에게 일어나는 게 부처님가피가 아닌 게 하나도 없어. 이래도 가피고, 저래도 가피고. 이것도 좋은 일이고. 저것도 좋은 일이고. 물에 안 빠지면 안 빠진 데로 잘 놀다 오고, 빠지면 빠진 데로 조개 주워오고. 빠지는 것도 가피고 안 빠지는 것도 가피야. 그러니까 부처님의 가피가 늘 가피 속에 살아. 가피 좀 주세요. 이렇게 할 필요가 없어. 늘 가피의 바다 속에서 사는 거요.
이걸 철학적으로 뭐라 그러냐? 사사무애의 법계다. 이래 말해. 사사무애 법계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똑같이 얼굴을 가지고, 똑같이 밥 먹고 사는데, 그 사는 세계가 이렇게 서로 다른 네 종류가 있다. 이렇게 분류한 게 화엄경에 네 가지 법계에서 四法界觀사법계관이라 그래. 가장 핵심 된 사상이오. 여러분들은 어디 속해요?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거는 첫 번째 단계 사람은 두 번째 단계를 부러워하고, 두 번째 단계를 위대하다고 생각해.
그런데 두 번째 단계에 가보면 역시 한계가 있어. 그래서 한 단계 더 넘어가면 어디로 간다? 세 번째 보살의 단계로 가. 그런데 사실은 그것도 완전한 자유는 아니에요. 완전한 자유로 가려면 네 번째 단계로 가야 돼. 그런데 네 번째 단계는 이렇게 돌아갈 것 없이 첫 번째 단계에서 바로 갈 수도 있어. 물에 빠져서 ‘살려 주세요’ 하면 첫 번째 단계고, ‘물에 빠진 김에 조개 줍자’ 이러면 뭐가 된다? 바로 네 번째 단계요.
남편이 술 먹어서 못 살겠다, 이러면 첫 번째 단계고, 아~ 이 남자 내가 치료해야 되겠다. 이러면 몇 번째 단계다? 네 번째 단계요. 애가 장애가 낳아가지고 ‘내가 전생이 무슨 죄로 이런 애 낳았나?’ 이러면 첫 번째 단계고. 어떤 사람은 남의 집 애, 장애를 모아다가 돌보는 복 짓는 사람 있지. 그런데 내 애 돌보는 거 아무것도 아니죠. 그죠? 이런 애가 생긴 짐에 뭐하자? 장애자 수용소 하나 만드는 거요. 어차피 나도 하나 보니 다른 애들도 몇 애 더 데려와서 돌보자. 이렇게 탁 한 생각 바꿔버리면 뭐가 된다고? 네 번째 단계요.
이러면 머리 안 깎아도 해탈 할 수가 있고, 이혼 안하고도 해탈 할 수가 있고. 술 한 잔 먹고도 해탈 할 수가 있어. 이건 내가 안 가르쳐 줘야 되는데. 이게 한 생각 돌이킨다 그래. 한 생각 딱 돌이키면 바로 가버려. 이거를 과학적으로 얘기하면 우주공간이 휘어져있다 그러죠. 그래서 빛이 우리가 눈에 볼 때는 직선으로 오는데, 빛이 직선으로 오지 굽어서 오는 거 아니죠. 그러나 우주 공간이 휘어져 있기 때문에 공간을 따라 온다. 그런데 그 휘어진 공간이 안쪽으로 이렇게 통과 하면 바로 와 버려요.
여기서 북극성에서 여기까지 빛이 오려면 천백 년이 걸리는데. 그 이면의 소위 블랙홀을 통해서 그 쪽으로 오면 즉시 되. 즉 지구가 둥근데 둥근 줄 모르고 평면인줄 알고, 이 보살 하고 나하고 등을 맞대고 있으면, 뒤로 가고 앞으로 가면 어때요? 저쪽으로 가면 나는 이쪽으로 가면 영원히 멀어지죠. 그죠? 영원히 멀어져. 그래서 최고로 멀어질 때가 언제고? 더 이상 뒤로 못나갈 때요. 더 이상 뒤로 안 나가져. 이때가 둘이 제일 멀어지는데. 더 이상 뒤로 안 나가질 때가 언제일까? 둘이 등을 맞대고 있을 때요. 이 말 이해하세요?
둥근 지구에서 하나는 이리로 가고, 하나는 이리로 가가지고 점점점 멀리가, 더 이상 뒤로 안 나가져. 돌아보면 등을 맞대고 있어. 제일 멀 때가 제일 가까울 때요. 그런데 뒤로 돌아봐야 되. 앞으로 보면 제일 멀고, 뒤로 돌아보면 제일 가까워. 왜 그러냐?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져. 평평하면 이런 일이 안 벌어져.
그것처럼 한 생각을 돌이키면 즉시 이렇게 되. 그래서 중생이 깨달으면 부처가 되고, 부처가 어리석으면 중생이 된다. 부처중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돌아보면 부처고 앞을 보면 중생이고 이래. 길가다가 돌부리에 탁 채서 넘어졌다. 재수 없지. 그래 생각하면 중생이야. 탁 넘어지자마자 ‘야~ 돌이 여기 있었구나. 오늘 내가 넘어져 무르팍을 깨므로 해서 이 돌을 발견했지. 이 돌을 발견하므로 이 돌을 캐낼 수가 있지. 만약에 내가 안 넘어지면 이 돌이 있었는지 몰랐을 거 아니야.
그러면 이쪽으로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넘어졌겠어. 그죠? 그러니 내가 넘어지므로 해서 이 돌을 알게 되고, 이 돌을 캐내므로 해서 수십수백명이 넘어질 거를 다 막아내니까. 오늘 잘 넘어졌나? 못 넘어졌나? 잘 넘어졌어. 넘어져서 무르팍을 깨서, ‘아야’ 하면서도 슬픈 게 아니라 뭐하다? 기쁘다. 그런데 나만 생각하면 어떠냐? 재수가 없고, 일체 중생을 생각하면 잘된 일이야.
그래서 이 분상에서는 실패가 곧 성공이야. 그런데 우리는 실패가 곧 좌절이고 절망이지. 현실에서 함 봐라. 노무현이가 국회의원을 부산에서 출마해서 떨어졌으니 대통령 됐지 걸렸으면 대통령 됐겠나? 안됐겠나? 안됐지. 그렇게 생각 안 해? 그죠? 떨어지니까 사람들이 욱 해가지고 밀어붙인 거 아니오. 그런데 그때 좌절하느냐? 요령을 따라 가느냐? 그렇지 않느냐? 큰 차이가 있는 거요. 결과적으로 잘 돼 버린 거요. 그런다고 여러분들이 길을 가면서 일부러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그래서 이 해탈 지도를 아는 사람은 특별히 따로 법수행 할 게 없어. 그냥 살면 되. 넘어지면 뭐하고? 넘어진 짐에 돈 줍고, 안 넘어지면 안 넘어진 대로 빨리 가고. 아무나 하고 결혼해도 괜찮아. 나보다 나은 사람이면 어때요? 잘 만났고, 나보다 못한 사람이면 뭐 한다? 보살 행 하고. 복 짓고. 아무 문제가 없어. 함부로 하는 거 하고 틀려. 자기가 최선을 다하되 그 결과에 전혀 구애 받지 않아. 결과는 이래 나와도 저래 나와도 다 유리해요.
그렇게 보면 지금 남자 다 잘 만났어? 못 만났어? 다 잘 만났어. 잘 만났다 하는 건 뜻이 조금 틀려. 다 잘 만났어. 이래 만나든 저래 만나든 거기엔 다 공부거리가 참 많아. 애기가 어쨌든 다 잘났어. 부부간에 갈등이 있으면 이걸 통해서 한 생각 돌이키면 어때요? 공부거리가 되. 애기가 문제가 있으면 공부거리가 되. 내가 낳아서, 내 식대로 키웠는데, 내 맘에 안 든다? 모순 아니오. 그죠? 그런데 이게 왜 이런지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 저거 누구 닮았나? 이래. 스님 닮았나? 내 닮았다, 이거야. 내 닮았는데 왜 내 맘에 안 들까? 이렇게 연구를 해 들어가면 그 아이로 인해서 자기를 알게 되.
이런 분상에서 세상을 살 때는 세상은 그냥 한바탕 놀이야. 넘어지면 일어나면 되. 모르면 물어서 알면 되고. 틀리면 고치면 되고, 잘못했으면 뉘우치면 되고. 오~ 잘못됐네. 고쳐. 잘 봐야지 이러면 끝이야. 아이고 나는 왜 이럴까? 이건 좌절이지. 이것도 지 잘났다는 얘기야. 자기는 실수할 수 없는 사람인데 실수했어. 실수한 자기가 자기를 용서를 못해요. 그래서 자기를 미워해. 그래서 후회하는 게 되. 후회하는 거는 부정된 마음이오.
애들보고 자전거 하나 사줘 봐라. 두 번, 세 번 넘어진다고 안타 드나? 아니죠? 무르팍 깨져가면서 계속 타잖아. 넘어지는 게 곧 뭐 하는 거다? 타지는 거지. 넘어지는 게 타지는 거요. 그런데 그 넘어지는 게 타지는 게 되는 이유는 뭘까? 게는 넘어지면 일어나서 또 타고, 넘어지면 일어나서 또 타고. 넘어져서 무르팍을 깨면서도 인상 쓰면서 일어나 재미로 타. 그러니까 그게 타지는 거요. 자전거를 발로 차버리든지. 안타면 안 넘어지니까 안타든지. 그럼 못 타죠. 이게 인생의 큰 차이오. 이게 낙관적이냐? 비관적이냐? 하는 거요. 낙관적이라는 거는 막연히 잘되겠지 하는 게 낙관적이 아니라, 다만 할 뿐이오.
아까 광주에서 법회 하는데 이래 질문했어. 기도하는데 기도가 무지무지 하기 싫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 내가 하지 마라 그랬어. 안 하면 어떻게 될까? 안 하면 지 꼬라지대로 사는 거고. 자기 생긴 꼬라지대로 살겠다면 안 해도 되. 그런데 자기 삶을 좀 변화시키겠다면 해야 되. 생긴 꼬라지대로 살겠다. 그러면은 그냥 살면 되요. 괴롭지. 그러니까 괴로움의 과보가 따른다. 그런데 안 괴롭도록 살겠다, 그러려면 조금 고쳐야 되. 고치려면 수행을 해야 되. 어떻더라도? 하기 싫더라도 뭐해야 된다? 해야 되. 하기 싫은데 어떻게 합니까? 그냥 해요. 어떻게 그냥 하는 거요. 그냥.
하고 싶은 날도 뭐하고? 하고. 하기 싫은 날도? 하고. 하고 싶고, 하기 싫고 하고는 상관없이 그냥 해 버려야 되. 그게 공부요. 하고 싶은 날 하는 게 공부가 아니오. 하고 싶은 날 하고, 하기 싫은 날 안 하는 거는 업대로 사는 거요. 하고 싶든, 하기 싫든, 하기로 했으면 해버리는 거요. 그러면 이게 고쳐 져버려. 그리고 어떤 날은 절이 하고 싶어서 절이 잘되고, 어떤 날은 절이 하기 싫어서 그냥 염주 돌아가는 게 그냥 ??같애. 그러면 이 날은 기도가 잘되고, 이 날은 기도가 안됐다. 이리 평가하는데, 전혀 그건 잘못된 생각이오.
그건 이날은 절이 잘되고, 이 날은 잘 안됐다고 평가 하는 거는 몰라도. 기도는 이날이나 저 날이나 똑같이 다잘 된 기도야. 아시겠어요? 오르막 올라갈 때나, 내리막 올라 갈 때를 보고, 오르막 올라갈 때는 길을 못 가고 내리막 갈대는 잘한 거 같지만, 어차피 갈 길에 오르막도 가는 길이고 내리막도 가는 길이오. 그러니까 살면서 이런 일이 생겨도, 저런 일이 생겨도, 다 내 인생이오. 그렇게 딱 보고 살면 사는 게 괜찮아. 다 내 원하는 대로 된다. 이런 얘기가 아니라, 내 원하는 대로 되든지 안되든지 중요한 게 아니야. 원하는 게 될 때도 있고, 원한 게 안 될 때 있고 그래. 세상은 원래 다 되는 거 아니오.
원하는 게 되면 돼서 좋고, 안되면 안 되는 것도 좋고 그래요. 여러분들은 법륜스님이 뭐하면 다 잘되는 줄 알아? 부처님 가피를 줘가지고. 그렇지 않아요. 나는 내가 원하는 데로. 순간순간 된 게 거의 없어. 내가 북한 갈려고 그러니까 한국정부가 못 가게 해서. 한국정부가 가라 그래서 갈려고 그러니까 북한에서 오지 마라 그러고. 그런 것처럼 뭐 하나도 그것 시작할 때 지지 받고 찬성 받아서 되 본적이 없어. 북한 돕기 할 때 신도들도 다 반대 했어. 그때 한 1/3은 떨어졌을 거요. 특히 부자들. 배운 사람들.
그런 것처럼 안 되는 게 잘되는 거요. 그 도리만 알면 살기가 좋아. 뭐가 잘되는 거라고? 안 되는 게 잘되는 거야. 그런데 여러분들은 되는 것만 잘된다. 이래 생각하기 때문에 안 돼. 그래서 여기 질문에 조금 문제가 있는데, 불생불사라는 건 그런 거요. 생도 없고 사도 없어. 좋은 일도 없고 나쁜 일도 없어. 이것도 일이고 저것도 일일 뿐이야. 한번 만에 올라가지면 올라가는 거고. 한번 만에 못 올라가면 한 번 더 올라가는 거고. 어차피 한번 만에 올라가고 한번 만에 올라가고, 열까지 올라가나. 하나를 가지고 열 번 시도해 올라가나 마찬가지요. 개수가 몇 개 올라가면 더 좋다, 하는 양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니까 그건 성공이고 이건 실패 같지.
한번만 올라가지면 다음 거를 가지게 되고. 한번 만에 못 올라가지면 그 올라가는 연구를 해야 되. 그런 생각, 사고로 인생을 사는 게 뭐라고? 불생불사야. 생도 없고 사도 없어. 그러니까 올해만 생각하면 싹이 트는 거는 시작이고, 잎이 지는 거는 끝이지만. 내년도 보면 어때요? 잎이 지는 게 시작일 수도 있지. 어떻게 생각해? 그래서 하루살이는 내일이 있는 줄 모르고, 일년초는 내년 봄이 또 있는지 몰라. 아시겠어요? 그런데 다 보는 사람은 내일도 있고, 내년 있고, 그런 거요.
육신을 나라고 생각하니까 ‘나고 죽는다.’ 이러지. 조금만 더 넓게 보면 ‘나고 죽는 일이 없어.’ 그게 불생불사야. 그런데 그거를 난다 죽는다, 생긴다 사라진다, 좋다 싫다, 잘된다 안 된다, 이렇게 보니 뭐가 발생한다? 고가 발생한다. 그래서 뭐다? 생사고. 이렇게 말하는 거요. 생사, 생멸관에 빠지면 고가 발생하고, 불생불멸인줄 알면 고가 사라진다. 이런 얘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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