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떻게 공부를 해야 되는가?
어떻게 정견을 해 나가고
어떻게 공부를 바르게 해야
잘못된 공부, 시간 낭비하지 않고 지름길로 가는 공부를 할 수 있는가?
그 얘기를 지금부터 해보겠습니다.
선에서는 만공스님이 승려들 보고
선방에 앉아서 열심히 정진하는 승려들 보고
뭐라고 하셨냐면
“너희들은 그렇게 번뇌망상을 떨어 가지고는 깨닫지 못한다.
공부하지 않는 공부를 해야 깨닫는다.
근데 그렇게 공부하고 있으니 안 되지”
그러니까 선방에서 막 그냥 10년씩 참선하는 스님이
“공부하지 말라고 그러면은 중생이 되는 거고
공부해야 깨닫는 건데
공부하지 않는 공부를 하라고 하시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러니까 너는 그 분별부터 내려놔라.”
이거 아니면 이건데, 어떡하라는 얘기입니까?
또 들고 왔잖아.
정 아니면 반인데
그 합을 모르는 거야.
근데 우리가 얼마나 그런 짓을 많이 해요.
이거 아니면 이건데.
이거 아니면 이거라는 게 다 자기 분별 아니에요?
그래서 공부하지 않는 공부라는 게 뭔가?
여러분, 공부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무위죠.
공부한다라는 것이 유위라면.
근데 “나는 지금부터 무위로 있겠습니다” 하면
그게 무위가 돼요? 아니면 유위가 돼요?
자기는 무위라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유위야
이렇게 하겠다는 거니까.
그럼 진짜 무위는 어떤 게 무위냐?
유위다 무위다 하는 게 다 잊어버려져야 무위예요.
유위다 무위다 이런 걸 다 놔버려야 진짜 무위야.
근데 “난 지금부터 무위 공부하겠습니다.”
“공부하지 않는 공부를 하겠습니다”라는 공부를 또 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게 다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여러분은 또 이제 질문을 하실 거예요.
“아니 그렇다면은 그런 생각을 일체 안 하면
그냥 바위나 돌멩이처럼 멍때리고 있으라는 얘기 같은데
그럼 무슨 공부가 됩니까?”
이렇게 질문하실 수 있잖아.
이렇게 살살 꼬시면 이렇게 넘어온단 말이야.
그럼 또 이거 아니면 또 이거야.
공부하지 않는 공부예요.
그러니까 무위도 아니고 유위도 아닌 거예요.
그 무위도 아니고 유위도 아닌 게 있습니까?
있죠.
이제 그거를 발견해 내야 돼.
왜냐하면 무위다 유위다라는 것은 사실은
다 여러분의 생각이기 때문에.
예를 들면
여기 칠판이 있죠. 하얀 칠판이 있잖아.
여태까지 이 칠판이 여기 있었다라는 거를
여러분들이 느끼고 있었어요?
아니면 제가 이러니까 이제 와서 이렇게 들어왔어요?
이제 와서 들어왔죠.
그러면 지금 이렇게 하니까
이거는 유위가 됐죠. 뭔가를 드러냈으니까.
아까는 무위였죠.
그러면 무위도 아니고 유위도 아닌 게 뭐냐 하면
이 칠판이 여기 있다라는 거를
여러분은 알기 시작했잖아요.
그런데 이 칠판을 의식하지 않아도
이제는 이 칠판이 여러분의 의식 안에 들어왔어요.
여러분이 칠판을 쳐다보면서
이 칠판 위에 글씨를 쓰고, 이미지를 그려도
이 캔버스인 칠판은 여러분의 의식 안에 있어요.
그것이 공부하지 않는 공부예요.
이거는 어떻게 해서 일어나느냐면
여러분의 의식 안에는 무엇을 알고 있는
앎이 항상 있어요.
**!
여러분은 내가 손드는 걸 봤다고 분별합니다.
근데 사실은 그 말 속에 뭐가 있냐 하면
여러분들이 이걸 아는 앎이 있기 때문에, 의식 속에
그래서 이 일이 실제 있는 것처럼 여러분에게 인식되는 거예요.
앎이 있기 때문에
**!
이거에 대한 여러분의 앎이 있기 때문에
이게 이름은 뭔지 몰라도 그래서 이게 여기 있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이 어떤 큰 집에 들어갔는데
그 집에 아직 뭔가 있었지만, 여러분이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면 그것이 여러분의 의식 세계 속엔 없어요.
앎이 선행되지 않는 그런 경험이라는 건 없어요.
모든 경험의 본질에는, 경험 인식의 본질에는
앎이 먼저 있어요.
여러분이 자기 아버지나 엄마를 볼 때
“이 사람이 우리 아버지구나 엄마구나” 생각해야
아버지 엄마가 돼요.
아니면 바로 압니까?
생각 이전에 바로 알죠.
그게 앎이에요.
이제 이 앎이
여러분 잘 생각해 봐요.
여기 칠판도 앎이고, 저기 지붕도 앎이죠.
그리고 여기 바닥도 앎이죠.
이 바닥이라는 이름이 시작하기 전에 앎이 먼저 있어야
바닥이라는 이름이 시작할 거 아니에요, 그죠?
여기 사람들이라는 앎이 있죠.
그럼, 이 방 전체가 뭐예요?
그냥 앎이야.
이 앎에 경계가 있나요?
그래서 이건 하나의 앎만 있는 거예요.
그러면 나의 앎과 너의 앎이 경계가 있나요?
그래서 이 앎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 자리를 부처라고 하는 거예요.
자, 지금부터 10분 쉬고, 두 번째 시간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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