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수행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할까요?”
이렇게 질문한다면
스님들은 이구동성으로 마음을 비울 것을 권합니다.
마음을 어떻게 비우냐고 물으면
으레 그렇듯 탐진치를 꺼내 듭니다.
탐진치가 마음을 오염시키니 이것들부터 처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탐진치를 없앨 수 있는지 되물으면
그때 매우 중요한 불교 수행법을 하나 꺼내 듭니다.
그것이 바로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 (四聖諦)입니다.
사성제는 간략히 말해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黃)을 끊어 열반에 이르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착(着)'입니다.
이란 외계에서 들어오는 정보에 마음이 움직여
그것에 철썩 달라붙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탐스런 사과가 눈에 들어오면
그것을 먹고 싶은 마음이 동하면서 그 정보에 붙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여인을 마주한다면
그 정보가 마음에 엉켜서 정신줄을 놓게 됩니다.
사실 하루 일상을 되돌아보면
이처럼 마음에 이 발생하는 경우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만큼 번뇌망상도 깊을 수밖에 없고요.
따라서 외계에서 들어오는 정보에 달라붙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탐진치도 없고 마음은 저절로 비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육을 떼려는 것도입니다.
탐진치에서 벗어나 마음을 비우려는 것도 일종의 인 셈이지요.
그래서 에 신경 쓰지 않고 외계에서 들어오는 정보와 그에 따른 마음의 반응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착의 세계에서 한발 물러나서 정보를 객관화하는 것입니다.
이런 수행이 바로 위빠사나입니다.
수많은 수행법이 있지만 이만큼 체계화되고 유효한 수행은 드뭅니다.
그래서 불교의 핵심 수행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고요.
그렇다면 위빠사나 수행을 지속해 나가면 착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의식의 객관화'를 통해 주관 세계에서 벌어지는 의 광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상당한 수준의 고요함과 청정한 의식세계를 이룰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런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열릴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수양이 되어 고고한 인품을 갖는 것과
깨달음이 직결되는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깨달음은 시종일관 아느냐 모르느냐'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탐진치를 없애서 고요한 마음을 얻으려고 할까요?
다시 말해 번뇌 망상을 없애서 열반에 이르려는 이유가 뭘까요?
그건 나가 최고로 잘되고 싶어 하는 욕망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내 마음을 가장 평온한 상태로 만들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가 있다는 전제를 깔고 일어나는 제반의 마음 현상을 가리켜 아상이라 합니다.
결국 아상이 마음의 평화인 열반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열반에 이르러도 한 가지 불안한 게 있습니다.
그건 열반이 영원토록 유지되느냐는 의문입니다.
그래서 열반에 해탈이나 깨달음을 연결 짓게 됩니다.
자신이 이룬 평온한 마음이 영원히 불변하고
그래서 붓다라는 등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결국 '나'를 최고의 존재로 만들고 싶은 我相의 놀음에 의해
열반과 해탈, 그리고 깨달음이 꾸며지게 됩니다.
그러니 탐진치를 없애 선정에 이르고
더 나아가 열반에 이르러 해탈해 봤자
죄다 我相의 장난에 놀아난 꼴이 됩니다.
연기를 아무리 잘해도 연기자인 것처럼
我相에 의해 꾸며진 깨달음은 실제 깨달음이 아니니까요.
물론 훌륭한 인품에 무소유의 실천, 자비심의 발현 등으로
타인의 귀감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我相의 발현일 뿐 깨달음과는 별개의 차원입니다.
我相이 좋은 방향으로 표출하는 것과 깨달음은 마땅히 구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불교의 깨달음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그건 아주 단순합니다.
바로 '궁금함에 있습니다.
그걸 불교식으로 '이 뭐꼬?'입니다.
가령 돌멩이를 하나 집어
들고 도대체 이것이 뭐냐고 묻는 겁니다.
돌멩이를 알려면 그 구성 성분을 알아야 하는데
요즘은 과학 덕분에 누구나 잘 압니다.
그런데 그 구성 성분들이 어디서 왔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끝까지 추적해서
첫 번째 근원자, 다시 말해 '제1원인까지 나와 주어야
돌멩이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1원인은 돌멩이뿐만 아니라
'나'를 비롯해 삼라만상의 근원이기에
돌멩이를 아는 순간 나도 덩달아 알게 됩니다.
결국 돌멩이 하나를 들고 '이 뭐꼬?' 했더니
그 궁극에 이르러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돌멩이가 궁금하지 않나요?
아니면 적어도 '나'는 궁금하지 않나요?
바로 이 궁금함이 불교의 첫 단추입니다.
그리고 이 궁금함을 놓지 않고 끝까지 이어가는 것이 수행인 것이고요.
그런데 수행자들은 궁금함을 가지고
자꾸만 나를 돋보이는 데에 이용하려 합니다.
그래서 '본질적 의문을 '몰라'로 지운 상태에서
또 다른 초월적 '나'를 만들어 냅니다.
다시 말해 '이 뭐꼬?'에
본성이나 참나, 불성 같은 것을 붙여서
붓다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궁금한 것으로 시작을 해도
중간에 我相이 원하는 쪽으로 교묘하게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이것이 한국 불교의 간화선이
그 시작은 반듯했음에도
중도에 휘어져 我相 놀음으로 귀결된 이유입니다.
아무튼 이 뭐꼬?'를 가지고 끝까지 나가면 됩니다.
'뜰 앞의 잣나무이는
'無자 화두이든
나는 누구인가?'이든,
그것도 아니면 돌멩이 하나이든
일체 상관없습니다.
그 어떤 것이 되었든
'이 뭐꼬?'를 통해 존재의 비밀을 밝혀낼 때까지
휘어지지 않고 정진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나'가 잘 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가 잘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너무 궁금해 미치겠는데
거기에 나가 들어설 자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존재의 실체가 너무 궁금하지 않나요?
존재란 무엇인가?
이 비밀을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인데
거기에 '나'가 어떻고, 탐진치가 어떻고
착을 끊어 열반에 이른다는 말들이 왜 나오는 걸까요?
我相의 교묘한 장난질에 그만 속고
'이 뭐꼬?'로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이 뭐꼬? 역시 중간에 '몰라'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줄기차게 존재의 비밀을 밝힐 때까지 정진해야 합니다.
사실 궁금하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가 궁금하질 않으니
'몰라'의 삼천포로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당신은 아직도 착을 끊어 열반에 이르고자 하나요?
그렇게 해서 이룬 열반이 언제까지 버틸 것으로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해서 만든 해탈이 언제까지 온전할 것으로 생각하시나요?
부질없는 我相의 놀음에서 벗어나
'이 뭐꼬?'의 화두를 끝까지 잡아보는 건 어떠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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