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중도론20. 공(空)을 알면 얻게 되는 깨달음의 4단계

Buddhastudy 2023. 5. 31. 19:41

 

 

 

2) 유와 무의 잣대

 

대저 찌그러지고 불규칙한 벽돌로는 집을 올릴 수 없다.

마찬가지로 모호한 언어를 가지고 진리를 논리적으로 알아 갈 수 없다.

그렇기에 가장 분명한 언어인 유와 무를 측정 도구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유와 무가 적용될 수 없는 예외의 경우를 가정해 X에 해당하는 공을 덧붙이게 된다.

 

그런데 공이 알 수 없는 X라 해서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몰고 가서는 안된다.

지금 당장 답을 풀지 못해서 X인 것이지

그것의 실체가 불분명한 것은 결코 아니다.

 

 

용수가 지근 회쟁론에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성하며

고정된 실체가 없는 공이다라고 쓰여있다.

 

이 뜻을 풀어보면

여러 유들이 계속해서 이합집산을 하기에 그 실체가 없고

그래서 공이라는 얘기이다.

공을 유무와 다른 어떤 존재 형태로 본 것이 아니라

유무가 변화하는 과정에 생겨나는 머무름이 없는 현상 정도를 가리키고 있다.

 

반야심경의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역시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불법의 정수로 꼽을 만큼 유명한 구절이지만

공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하여 본질이 호도되어 있다.

 

오온개공도 예외는 아니다.

대개 색수상행식의 오온이 합성되어 나를 이루어지만

그 실체가 없어 공이다라고 해석하는데

이렇게 되면 공은 독자성을 잃어 유와 무에 종속되고 만다.

 

결과적으로 공을 기치로 세울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된다.

이러니 공론은 허무주의만을 양상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불교는 본체를 부정한다.

이것이 무아와 연기로 대표되는 불교 사상이다.

그런데 본체를 부정하면 영생이나 열반도 없고

이런 것을 떠나 존재하는 의미도 없다.

무아에는 그 어떤 가치도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멸되지 않고 남아 있는 불성이 필요한데

이렇게 되면 힌두교에 편승하는 꼴이 된다.

초기 불교의 무아를 따르자니 앞이 안 보이고

그렇다고 진아로 바꾸자니 불교의 존립 근간이 허물어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용수의 공이 등장한다.

물론 용수는 제3의 존재 형태로서의 공을 주창했지만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무아와 진아의 편 가르기를 무마하는 수단으로서의 공을 받아들였다.

문제를 풀기보다는 문제를 모호하게 해서 감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고

색수상행식의 오온개공이다.

 

 

공을 비롯해 유와 무 같은 양자 모순의 것들은

어떤 이유나 수식을 써서 답을 내리면 안 된다.

그건 머리로 억지로 짜 맞춘 것이지 체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학에서는 정답 못지않게 풀이 과정을 중시하지만

화두참구에서는 직관에 의한 자각을 강조한다.

 

그래서 유무공 화두를 풀 때

‘~하기 때문에라는 풀이 과정이 들어가면 답을 맞히고도 정답이 아니게 된다.

다시 말해 실상이 없는~’ ‘본체가 없는~’ ‘텅 비어 있는~’ 같은

XY가 없다는 식의 구조가 되면 안 된다.

 

또한 유와 무가 양립하지만

중도에서 보면 원융무애하다라는 식의 표현 역시 부적절하다.

수행자들이 유무공 화두를 놓고

이론적으로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도 잘 모르겠다고 하소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존재를 인정하면서 본체를 부정하기 위해 모호한 표현을 쓴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사고가 길들여지면 평생도록 언어의 분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냐, 논리적 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혹자는 불법 자체가 언어의 분별을 뛰어넘고 있기에 무리하게 논리를 따지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논리의 초월은 더 이상 논리가 적용될 수 없는 한계점에서 저절로 발생한다.

의심과 논리로 충분히 따질 수 있는 사안을 미리부터 불립문자를 운운하며 건너뛰게 되면

그야말로 용두사미가 되고 만다.

 

 

돌이켜 보면 수천년 동안 본체의 유무에 관한 문제로 다투어 왔는데

그건 마치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잡으려는 것과 같다.

영원히 그것을 반복해도 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뭇 철학의 관건은 삼라만상의 시작점을 찾는 것이다.

바로 제1원인이다.

이 부분을 다루지 않고

제법무아, 제행무상, 불생불멸, 불변수연, 색즉시공, 불상부단, 불일불이, 불래불거 등을 입에 담는 것은

전혀 소득이 없는 일이다.

튼튼한 열쇠를 놔두고 지푸라기로 자물쇠를 따려 해서야 쓰겠는가.

 

어떤 화두이든 유무공 열쇠를 가지고 논리를 따져야 한다.

가령 색즉시공에서 색을 공이라고 하지 말고

먼저 색이 유인지 무인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불법의 근간이라는 연기를 말할 때도

연기의 주체와 대상에 해당하는 것들의 실체가 유인지 무인지를 가려야 한다.

연기는 본체는 부정하지만 존재 자체는 인정한다.

그러므로 그 존재의 유무만은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화엄경의 핵심 사상인 일체유심조의 마음 역시

유인지 무인지 답을 내려야 한다.

만일 마음이 유이지만 실체가 공하여 무이다라고 한다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논리 상실의 늪에 빠지게 된다.

무조건 수식이나 설명을 빼고 유와 무만으로 답을 내야 한다.

 

서양철학의 존재론에도 유무의 잣대는 유효하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삼라만상의 본질은 신이라고 했다.

1원인으로서의 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만물을 움직인다고 한다.

이런 경우에도 그 신에 유와 무의 잣대를 써서 분석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 신이 유이면 자존의 근거를 대고

신이 무이면 창조의 근거를 대면 된다.

 

이렇게 유무를 가지고 제1원인을 진단하면 삼라만상 그 어떤 것도 답을 찾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저절로 제3의 존재 형태인 공으로 초점이 모여진다.

이때부터 공을 화두로 잡으면 된다.

 

 

공이 뭐꼬?

어떻게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공이 존재할까?

어떻게 유이면서 동시에 무인 공이 성립할까?

(삼라만상 모든 것이 마음의 자굥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얘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일체유심조를 강조하면 할수록 주관에 갇히고 마음신앙에 빠질 우려만 커지기 때문이다.

가령 육조혜능이 펄럭이는 깃발을 보며

저건 바람이나 깃발이 움직인게 아니고

그대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바람이 불어 깃발이 움직인 객관적 사실을 부정하고 마음 현상으로만 보게 되면

지독한 관념의 늪에 빠지게 된다.

바람과 깃발, 그리고 마음을 있는 그대로 관하고

그러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생겨나서 어떤 원리로 존재하느지에 대한 진리적 탐구가 중요하다.)

 

공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5차원 실존은 고사하고 4차원의 터럭도 잡을 수 없다.

그래서 유무공 화두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얼마 전 한 수행자를 만나 도담을 나눈 일이 있었다.

그는 공의 이론에 대해 막힘이 없음에도 자신이 깨닫지 못한 이유를 궁금해했다.

실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데 어찌해서 그에게 깨달음이 열리지 않는 것일까?

그건 단적으로 말하면 공을 모르기 때문이다.

 

공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공은 앞서 언급한 유무와 제3의 존재 형태인 X에 있지 않다.

유와 무와 X는 공을 깨닫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그것들에 달통해도 그건 아는 것이 아니다.

그냥 어떻다고 상상하는 것일 뿐이다.

공을 제대로 알게 되면 그와 동시에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깨닫게 된다.

 

->

너무 당연하여 그것에 대한 머무름이 일어나지 않음->

그냥 있게 됨->

깨달음

 

이상의 공식은 매우 빠르게 일어난다.

그래서 공을 아는 순간이 곧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