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중도론21. 간화선 '화두 수행'의 함정!

Buddhastudy 2023. 6. 1. 19:49

 

 

 

(3) 논리와 반야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90여 개의 선방에서 2천여 명의 수행자들이 화두를 잡고 있다.

그들은 하루 평균 3~4시간의 수면만을 취하며 조주선사의 무자 화두에서부터

이 뭣꼬, 만법귀일, 일귀하처, 정전백수자, 구자불성, 마삼근, 같은

무려 1700여 개에 이르는 공안에 수행의 성패를 맡기고 있다.

 

이들이 닦고 있는 간화선은 반야에 역행하는 매우 독특한 수행법이다.

진리를 구하려는 마음엔 나가 있고

그렇기에 아무리 반야를 증득해도 실상을 보지 못한다.

이에 간화선은 반야의 반대인 모름을 가치로 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화두이다.

 

화두의 답은 없다.

없기 때문에 모르는 의식에 머물게 되고 점차 진리를 알려는 나가 사라진다.

이렇게 해서 무아에 이르면

구름이 걷히며 달빛이 드러나는 것처럼 실상을 깨우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르는 것으로 도통을 하면 무지렁이가 될 우려가 크다.

간화선이 무아에 이르는 매우 효과적인 수행인 것은 맞지만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경지엔 깨달음이 없다.

앞서 말했듯 마음이 편해지고 생로병사를 받아들일 여유가 생긴 정도를 제외하곤 특별한 진전을 찾기 어렵다.

 

 

간화선에선 교종의 경전 위주의 수행을 가리켜 의심과 분별로 인해 아상을 자극하게 된다고 말한다.

허나 논리적인 의심을 한계점까지 이어 나가는 과정을 생략하면 안 된다.

그렇게 끝까지 의심하여 도저히 답을 얻을 수 없다는 절망에 처참히 무너져 봐야 한다.

그래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앎도 모름도 지워져 버린 의식 상태에서 그냥 있는 상태가 조성된다.

반지름이 내려져 있는 그대로의 상태, 여기서 새로운 수행의 전기가 싹튼다.

그렇기에 앎의 과정을 건너뛰고 모르는 과정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

간화선의 화두는 사안을 정확히 봤지만, 앎과 모름의 순서가 뒤바뀜으로써 수행의 방향이 틀어지고 말았다.

 

 

이 점을 보다 분명히 알기 위해 뇌과학 쪽의 연구 자료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익히 알듯이 우리의 뇌는 좌우 대칭으로 나뉘어져 있다.

우뇌는 외부의 정보를 주고받으며 하나의 유기체로 존재한다.

그래서 우뇌는 아무리 나와 남으로 구분하려 해도 그것이 안 된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나의 범위를 인식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불법에서 말하는 불이의 절대 상태와 같다.

 

이에 비해 좌뇌는 우뇌로 흐르는 정보들을 언어화해서 분석하고 처리한다.

특히 시간으로 배열해서 미래를 예측하는데, 이때 이득과 손실의 결과를 수시로 내놓는다.

이렇게 유불리의 선택에 의해 반응하는 정보의 흐름을 일러 나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좌뇌의 가아와 우뇌의 무아가 둥글어가며

정보의 이합집산 속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좌뇌의 기능을 끄고 우뇌만 활성하면 깨닫게 되지 않을까?

실제로 좌뇌에 뇌출혈을 비롯한 이상 증후로 인해 붓다의 해탈을 이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불법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선지식 못지않은 깨달음을 얘기한다.

그렇다면 우뇌가 과연 무상정등각까지 우리를 인도할 수 있을까?

 

 

대개 수행은 좌뇌가 조장하는 아상을 멀리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그리고 좌뇌의 아상을 억눌러 그 기능을 못하게 하면 꽤 높은 의식의 경지에 도달한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얻어진 경지가 환각이나 몽상 또는 호르몬의 이상 분비에 의해 꾸며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거듭 말하지만 제1원인을 논리적으로 확증하지 못하면

설사 최고의 경지를 맛보았다고 해도 무상정등각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수행자들이 그토록 떨쳐 버리려 하는 좌뇌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쪼개고 분석해서 논리적으로 답을 구하는 좌뇌는

잘만 사용하면 지혜를 키우고 무한한 반야를 증득하는 보물이 된다.

 

그래서 선지식들이 하나같이 정혜쌍수를 강조하는 것이다.

일찍이 승찬은 신심명에서 도를 깨닫는 건 어렵지 않다.

이것저것 분별하며 논리적으로 따지는 버릇만 없애면 된다고 하였다.

좌뇌의 논리가 우뇌의 순수 공조를 손상시킨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그 논리가 궁극에 이르러 산산조각이 나면

오히려 우뇌의 미진함을 채워주는 퍼즐이 된다.

그래서 고만고만한 깨달음이 아닌 붓다의 무상정등각을 꿈꾼다면

결코 좌뇌의 논리적 사유를 포기해선 안 된다.

 

이처럼 진리에 대한 논리적 사유는 깨달음의 문고리까지 쭉 연결된다.

문고리부터는 논리가 끊어지지만, 그렇더라도 목적지 부근까지는 오지 않았는가?

논리의 고속도로를 이용하지 않으면 대부분 출발 지점에서 맴돌다 인생을 다 소비하고 만다.

그럴진대 어찌 모름을 기치로 걸고 논리를 등질 수 있겠는가.

 

혹자는 간화선으로서 얻어지는 무아의 경지를 발판 삼아

더 높은 단계의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모름에 중독되어 논리적 사고가 떨어지는 부작용이 적지 않다.

또한 무아에 심취되어 무상정등각에 대한 발원이 약화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실제로 간화선으로 득도했다는 수행자들을 보면

자족의 풍류를 읊으며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기에 간화선은 어떤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교과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위빠사나의 보조 수단 정도라면 크게 문제 될 건 없을 것이다.

 

 

논리적 사유 체계를 갖추지 못한 수행자는 선을 해선 안 된다.

세속에 나아가 착실히 학문을 익히며 사고의 힘을 키우는 것이 먼저이다.

봄볕을 받으며 처마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강아지만큼 고요한 선정도 보기 드물다.

하지만 강아지에겐 깨달음이 없다.

왜냐, 논리적 사유 체계가 없기 때문이다.

 

서양 철학자들이 꼽는 최고의 논리학자 중 한 명이 누구이던가?

바로 대승불교를 일으킨 용수가 아니던가.

용수의 중론을 보면 형이하는 물론이고 형이상을 논리적으로 풀어 5차원 실존(1원인)까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런 이유로 그를 일러 세존과 같은 무상정등각을 성취한 보살로 추앙하고 있다.

용수가 이렇게 세존과 같아진 이유는 바로 논리에 있다.

논리를 빼면 용수의 저술은 한낱 불쏘시개일 뿐이다.

 

 

잠에 풀 빠져 있는 사람을 깨우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소리로써 청각을 자극하는 것으로 붓다가 주로 쓰는 법이다.

두 번째는 흔들어서 촉각을 자극하는 것으로 보살이 주로 쓰는 법이다.

 

용수의 논리는 바로 후자에 해당한다.

잠을 일으킨 중생의 분별은 용수의 논리를 타고 들어가면 부서지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문제는 대부분 논리의 궁극까지 가지 못하고 중도에 튕겨 나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유무공 화두를 통해 논리의 힘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

 

 

필자는 얼마 전 용수의 논리가 수행자의 분별을 산산이 조각내서 견성을 이루게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도저히 깨질 수 없다고 봤던 도해라는 수행자가 논리의 공격에 이러저리 흔들리다가 어느 순간 아상이 화르르 무너지며 실존의 눈을 번쩍 뜨게 된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설법 위주로 전개되어 온 중생구제의 큰 틀이 일시에 허물어지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것을 지켜보면서 붓다의 대중화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논리의 힘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다.

이런 논리가 분별을 야기함으로써 수행의 방해가 된다는 주장이 있음을 안다.

하지만 진실로 논리의 경이로운 세계를 접하면 그런 우려는 사라질 것이다.

 

 

****

 

앞서 팔만대장경을 몇 글자로 줄이면 [정신 차려 잘살자]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더 줄여 한 글자로 압축하면 바로 []이다.

공은 가히 불법의 정수이며 깨달음의 문고리이다.

따라서 유무공 화두를 필히 잡아야 한다.

 

이 화두를 일찍이 용수가 중론에서 제시한 바 있다.

그는 논리적으로 매우 깊게 설명했는데, 너무 방대하다 보니

수행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그래서 용수의 유무공에 제1원인(실존)을 결부해서 일모의 군더더기도 없는 화두의 정수를 뽑아내었다.

따라서 이것만 풀면 용수의 지혜를 가져갈 수 있다.

 

라이터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연료와 부싯돌, 그리고 엄지손가락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불을 붙여 보자.

연료는 이미 구비되어 있다.

바로 불성이다.

 

엄지손가락(반지름)의 사용법에 대해서는 익히 설명했다.

그것을 내리면서 그냥 있는 상태를 이루면 된다.

하지만 설사 그런 있는 그대로의 상태가 되더라도 깨달음의 불을 켜기 위해서는 부싯돌이 필요하다.

부싯돌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유무공 화두이다.

그래서 이것은 불을 밝히는 도구라는 의미에서 밝달선으로 불리기도 한다.

 

 

일찍이 대주스님은 유와 무를 보지 않으면 곧바로 부처님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고 하였다.

유무로 나누어 보지 않는다고 해서 깨달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앞서 언급한 화두를 모조리 풀어내도 이제 겨우 예선전을 치른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5차원 실존에 대한 반야를 증득함으로써

깨달음과 한판 씨름을 벌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것만으로 유무를 꺾고 공을 손에 쥔 보람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