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3)

법륜스님의 하루_ 의견이 서로 달라도 화가 나지 않는 방법은? (2023.06.15.)

Buddhastudy 2023. 10. 4. 20:02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시고 다섯 비구에게

양극단에 치우치지 말고 중도를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견해가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내가 맞고 너는 틀리다고 하지 않고

중도를 실천하며 말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일단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서로 다를 뿐이지, 누가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니다하는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서로 믿음이 다르거나, 생각이 다르거나, 관점이 다를 뿐임을 알면

내 마음에서 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저렇게 믿는구나’, ‘저런 관점을 갖고 있구나

이렇게 상대를 보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여러 가지 길 중에

어떤 길을 갈 것인가 하는 것은 내가 선택하면 됩니다.

여러 가지 길 중에서

나는 이 길을 선택하겠다하고 자신의 입장을 가지면 됩니다.

그러면 분노 없이 자신의 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어떤 주장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분노를 일으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할 때 오래 앉아있으면 다리가 아픕니다.

그러면 다리를 펴려는 욕구가 생깁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수련 중에 다리를 펼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다리를 펴면 남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고

다리를 펴지 않으면 아픔을 참으면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비난을 받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이 두 가지가 극단입니다.

 

중도란

통증을 다만 통증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통증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통증을 다만 통증이라고 알아차리는 것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싫어하게 된 뒤가 아니라

그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의 여섯 번째 스승인 육조(六祖) 혜능(慧能: 638~713)

머리를 기른 상태에서 스승으로부터 법을 인계받았습니다.

당시 혜능은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는 일을 하며 공부 중인 행자였고

아직 스님조차 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스승의 밑에는 위대한 제자들이 700명이나 있었는데도

스승은 혜능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며

그에게 법을 전해주었습니다.

 

스승은 법의 징표인 발우를 혜능에게 건네주고서,

다른 사람들이 그를 해칠까 우려하여

멀리 남쪽으로 피신을 시켰습니다.

그런 뒤 스승은 며칠 동안 법상에 오르지 않았는데

제자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스승이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하지 않자

마침내 스승에게 문의를 합니다.

그러자 스승은 이미 법이 남쪽으로 갔다이렇게 대답합니다.

 

제자들은 자기들 중에 아무도 법을 받은 사람이 없으니까

방앗간 행자가 법의 징표인 발우를 뺏어서 도망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행자를 잡으러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발우를 갖는 이가

스승의 뒤를 이어 마스터가 될 수 있는 징표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중에 군대 출신 승려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제일 빨리 따라가서 결국엔 혜능을 잡게 됩니다.

혜능은 그가 바로 뒤까지 쫓아오자 발우를 바위 위에 두고,

그 바위 뒤에 숨었습니다.

 

승려는 발우가 자기 앞에 있으니

이제 이것만 가지면 내가 여섯 번째 마스터가 된다하는 생각에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발우를 탁 집었는데

그만 바닥에서 떨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때 마음이 확 바뀌면서

그 자리에서 딱 엎드려 절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자여, 나는 당신에게서 법을 뺏으러 온 게 아니고

법을 얻으러 왔습니다

 

그러자 혜능이 바위 뒤에서 나타나서

승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조금 전 마음은 어떤 마음이고, 조금 후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어떤 마음이 너의 본래 마음인가?’

 

그 질문에 승려는 자기 마음을 보게 되었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일화는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라하는 선()의 요지를

잘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테라바다 불교에서도 이와 똑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리가 호흡을 알아차린다고 할 때,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 그 생각에 끌려가지 않고

다만 호흡을 알아차릴 뿐이어야 합니다.

 

명상을 하면 통증이 생깁니다.

그럴 때 좋다혹은 싫다하는 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

다만 통증을 알아차릴 뿐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냥 알아차리는 경지로 갈 수 있습니다.

 

일단 싫어하는 마음을 내버리고 나면

그때부터는 다리를 펴거나 아니면 참거나

두 가지 문제에 부닥칠 수밖에 없습니다.

 

선에서는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개는 흙덩이를 쫓고

사자는 흙덩이를 던지는 사람을 쫓는다.’

 

흙덩이만 쫓으면 흙덩이가 계속 날아오잖아요.

이리로 가면 이리로 날아오고, 저리로 가면 저리로 날아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부차적인 것,

즉 생각에 끄달리면 어디로 가든 계속 괴로움에 처한다는 얘기입니다.

반면 사자가 흙덩이를 던지는 사람을 쫓는다는 것은

근본을 꿰뚫어 한 번 만에 문제를 결판내버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쉬운 얘기이고,

어떻게 보면 정말 어려운 얘기를 했습니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행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꿰뚫어 직시하는 것은

수행을 오래 했거나, 늦게 했거나, 처음 했거나, 이런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정토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깨달음의 장

이러한 선의 가르침을 현실화해서

짧은 시간 내에 자신을 돌아보도록 만든 프로그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