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3)

법륜스님의 하루_ 주위 사람에게 지적을 하고 나면 관계가 불편해집니다 (2023.07.19.)

Buddhastudy 2023. 10. 30. 20:06

 

 

저는 주위 사람들에게 충고나 직언을 하곤 하는데,

그로 인해 불편한 사이가 되면 제 마음이 괴롭습니다.

관계가 틀어질 것을 알면 그냥 조용히 있어야 하는데,

어리석게도 욱하고 저지르고 후회할 때도 많습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하는 생각이 들고,

상대가 내 조언을 오해한 것 같아 억울한 마음도 듭니다.

제가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인 걸까요?

과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많이 듭니다.

이럴 때는 어떤 수행을 해야 할까요?

이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도문이 있을까요?//

 

 

 

부부지간이나 부모와 자식 간에도

사람의 얼굴 모양이 다 다르듯이

사람의 생각은 항상 일치하지 않습니다.

 

비슷한 면이 있을 수 있지만 똑같지는 않습니다.

느낌도 조금씩 다르고,

가치관이나 판단의 기준도 조금씩 다릅니다.

 

개와 비교하면 모든 사람이 다 비슷합니다.

얼굴 모양도 비슷하고, 하는 행동도 비슷하죠.

그러나 사람끼리 비교하면 다 다릅니다.

육체만 봐도 피부색이 다르고, 키가 다르고, 얼굴 생김새도 다릅니다.

눈과 귀가 두 개이고, 입과 코는 하나라는 측면에서는 다 같지만,

눈의 색깔, 모양, 크기는 조금씩 다릅니다.

 

물론 일란성쌍둥이는 육체적 모양이 거의 같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런데 정신작용은 일란성쌍둥이도 서로 다릅니다.

완전히 다르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정도의 차이가 생긴다는 겁니다.

 

동물과 사람의 정신작용을 비교하면

사람끼리는 거의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끼리 비교하면 모두 다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 기준으로 사물을 보고 판단합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길을 간다고 합시다.

한 사람이 앞에 가고, 뒤에 또 다른 사람이 따라갑니다.

앞에 가는 사람은

뭐 한다고 꾸물대는 거야하고 자기 기준에서 생각합니다.

뒤따라가는 사람은

왜 저렇게 서두르는 거야?’ 하고 자기 기준에서 생각합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외출할 때 남편들은 대부분 문밖에 서서

뭐 하느라고 빨리 나오지 않느냐!’ 하며 고함을 지릅니다.

아내는 방 안에서

왜 당신 혼자 나가버리느냐!’ 하며 불평합니다.

 

살림을 맡은 아내는 외출을 하기 전에

창문도 닫아야 하고, 전기와 가스도 점검해야 합니다.

그런데 남편은 살림에 관심이 없다 보니

자기 옷만 걸치고 나가버리는 거죠.

 

한집에 살아도 맡은 역할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겁니다.

또 밥을 먹을 때는 반대입니다.

밥상을 차려 놓고 아내가 빨리 밥 먹으러 오라고 여러 번 외쳐도

남편은 오지 않습니다.

지금 하는 일 끝내놓고 갈게하며 오지 않죠.

 

-이해 없는 사랑은 폭력입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행동하는 기준이 다릅니다.

누가 옳고 그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생겨는 불편한 마음을 없애려면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상대를 존중한다는 것은

당신이 훌륭합니다하고 말해 주는 게 아니에요.

상대는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존중입니다.

 

상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하는 것이 이해입니다.

사랑은 이해입니다.

이해 없는 사랑은 폭력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비심이란

곧 이해심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인이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을 갖고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입니다.

 

자비심이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에요.

그의 처지에서 그를 이해하는 마음이 자비심입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지금 나와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고 있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랑도 없고, 자비심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내 식대로만 상대방을 보고 있는 거예요.

자기 성질대로 상대방한테 말 한마디 툭 뱉어놓고

내가 너를 위해서 하는 이야기니까 너는 내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하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해 없는 사랑은 폭력과 같습니다.

어떤 남자가 자기 좋다고 상대 여자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고 껴안으면

성추행을 범하게 되는 거잖아요.

꼭 성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방은 원하지도 않는 말을 해놓고

나는 상대방에게 바른말을 했다하고 생각하는 거죠.

충고는 상대가 원했을 때 해줘야 충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충고와 비슷한 것으로

자자(自恣)’라는 것을 합니다.

자자는 내가 상대방에게

당신이 보기에 내가 무엇이 문제인지 저를 위해서 이야기해 주십시오하고

자발적으로 요청할 때 성립이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뤄질 때 진정한 충고라고 할 수 있어요.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데 내가 그를 위해서 충고를 해주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바탕에 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가 받아들일 수도 있고, 못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질문자는 상대의 요청에 의해 충고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꾸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럴 때는 상대방이 충고로 못 받아들이고

비난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기도문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는 자세가 바탕에 깔려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하고 이해하는 마음 없이는

108배가 아니라 3000배를 해도 해결이 안 됩니다.

 

이 문제는 기도를 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자동차가 고장이 났으면

고장 난 부분을 고쳐야 해결이 되지,

자동차 앞에 떡을 갖다 놓고 절을 한다고 해서

고쳐지는 게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자꾸 어떤 기도문을 갖고 기도를 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마세요.

상대방은 나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바르게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실을 바르게 인지한 후에도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사실을 깜빡 놓칠 수가 있습니다.

상대는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지만

일상에서는 깜빡 놓친다면

그럴 때는 자각을 하기 위해서 기도문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기도문을 주문처럼 중얼중얼 외우는 방식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종교이지 수행이 아니에요.

 

질문자는 상대가 오해를 했다고 말하는데

상대가 내 생각대로 안 따르면

무조건 오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오해라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듯이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

오해한 것이 아니에요.

 

오해라는 말속에는 상대가 틀렸다는 뜻이 들어있는 겁니다.

상대는 나와 생각이 다르구나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네가 오해한 거야하는 말속에는

네가 잘못 이해했어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어요.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자세를 바탕에 깔고

그 위에 대화를 통해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개선이 잘 안 될 때는

남편은 부처님입니다하는 기도문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남편 입장에서는 본인이 항상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남편 입장에서 본인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구나하고

우선 내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남편이 부처님이라는 말은

남편이 실제로 부처님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에요.

질문자가 불교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모두 옳다고 받아들이잖아요?

 

그런 것처럼

, 당신 말이 맞습니다하고

남편의 입장을 내가 먼저 받아들여 주라는 겁니다.

내가 남편의 말에 무조건 동의하라는 뜻이 아니에요.

남편의 입장에서는

본인이 틀리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문이란

내가 놓치는 것을 자각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뤄주는 비밀스러운 주문이 아니에요.

 

기도문을 외우면 병도 낫고 부부관계도 좋아질까?’

이런 마음으로 기도문을 달라고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냥 주문을 외우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것은 수행이 아니라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한다는 말은

상대가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상대를 존중한다는 말은

상대가 옳고 내가 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와 다른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나와 다른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우선 나한테 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상대를 높이느냐 낮추느냐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 사람은 나와 믿음이 다르구나

저 사람은 나와 생각이 틀리네

저 사람은 관점이 나와 다르네

이렇게 생각하면 화가 날 리가 없습니다.

 

그 말은 틀렸어’, ‘그것을 말이라고 해?’

이렇게 받아들이니까 짜증이 확 일어나는 겁니다.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 수행의 핵심입니다.

상대는 나와 다르다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가면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제가 한반도의 평화를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 북한하고 평화롭게 지내자고?

저런 놈들은 본때를 보여주어야 해하고 반박합니다.

 

그럴 때 저런 미친놈이 있나!’ 하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고 이해하는 겁니다.

 

그렇게 이해한다고 해서 당장 발생하는 이익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나한테 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폭력적인 갈등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이런 자세를 가진다면

어떤 사람 하고도 대화를 할 수가 있습니다.

또 필요 없으면 대화를 안 해도 되고요.

 

이렇게 화가 나지 않는 상태에서

그냥 저 사람의 행동을 그대로 내버려 두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논쟁을 해도 괜찮고, 설득을 해도 됩니다.

대신 그에 따른 과보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예요.

 

살다 보면 , 너 그러면 안 된다!’ 하고

내가 잔소리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 입장에서는 반발을 하겠지요.

그럴 때 그 반발을 내가 받아들이면 됩니다.

 

어떤 행위를 하든지 반드시 거기에는 반작용이 생깁니다.

칭찬이든 비난이든 다시 나에게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칭찬만 돌아오기를 바라죠.

그것은 과보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입니다.

그런 자세를 갖고 있다는 자체가

벌써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내가 괴로움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해 주신 겁니다.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라는 말은

상대를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렇게 했을 때 나의 괴로움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 후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내가 선택하면 됩니다.

상대에게 충고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본인이 선택을 하고

그 과보를 받으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