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그라운드(2024)

[책낭독] 계속 생각나는 과거의 부정적 경험 치유하는 방법 | 놓아버림, 데이비드 호킨스 005

Buddhastudy 2024. 1. 15. 20:23

 

 

과거 어떤 상황에서 부정적 감정을 경험했을 때

우리는 비슷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트라우마처럼 작용하여

지속적인 괴로움을 일으킨다면

과거를 재맥락화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

 

3장 감정의 해부학

과거 치유

 

자신의 삶을 살펴보면

미해결된 과거의 위기가 지닌 잔재가 보일 것이다.

 

그 당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생각과 감정은

세상을 인식하는 데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또한 이런 생각과 감정이

삶의 어떤 부분을 망가뜨렸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이때 그 일이 계속해서 대가를 치룰

가치가 있는지 자문하는 것이 현명하다.

 

이제는 잔재를 처리하는 데 쓸 수 있는

기제를 알고 있으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큰일을 치른 뒤에 진가를 발휘하는

새로운 감정 치유 기법을 알게 된다.

 

사건을 새로운 맥락에서 이해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의의와 의미가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며 일생을 보낸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이 시점의 환희는 경험하지 못한다.

 

인간의 운명이 원래 그러하니

쓴웃음이라도 지으며 참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고 흔히 짐작한다.

 

철학자들은 때로 이런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태도를 활용해

허무주의 철학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런 철학자들 중 일부는

수년간 유명세를 얻기도 하지만

사실 그들은 해결하지 못한

고통스러운 감정의 희생자에 불과하다.

 

그런 감정을 계기로

끝없이 사물을 논리적으로

자세하게 설명하려 들게 된 것뿐이다.

억제된 감정일 뿐임이 분명한데도

그것을 합리화하는 정교한 지적 체계를 구축하느라

평생을 바치기도 한다.

 

과거 해결에 효과가 좋은 방법 중 하나로

새로운 맥락 만들기가 있다.

과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으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과거의 곤경이나 트라우마 안에

선물이 숨어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기법의 가치를

정신 의학계에서 처음 알아본 사람은

빅토르 프랭클이다.

 

프랭클은 자신의 명저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의미 요법으로 명명한 접근법을 풀이했다.

그는 임상 경험과 개인 체험을 통해

감정과 트라우마를 새로운 의미로 에워싸면

그 발생 양상이 현저히 달라지면서 치유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프랭클은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내면의 승리를 가져올 기회로 보고

나치 수용소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해도

빼앗을 수 없는 한 가지,

즉 인간의 마지막 자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자신만의 길을 택할 수 있는 자유다.”

 

프랭클은 그때의 끔찍한 상황을

새로운 맥락에서 이해하는 재맥락화를 통해

인간 영혼의 심오한 의미를 발견했다.

 

아무리 비극적인경험이라 해도

모든 인생 경험에는 교훈이 숨어 있다.

경험 속에서 숨은 선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

치유가 일어난다.

 

앞에서 예로 든 실직자는

시간이 흐른 뒤 지난 일을 돌이켜 보고는

이전 직장은 성장에 방해가 되었으며

그 안에서 판에 박힌 생활을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하면서 궤양까지 얻었던 그는

실직하기 전까지는 그곳의 즐거운 면만 보았다.

일단 상황에서 벗어나자

그동안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으로 치렀던 대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실직한 뒤에 그는 새로운 능력과 재능을

찾아내는 일에 마음을 열었고,

나아가 더욱 유망한 직업을 새로 찾았다.

 

이렇듯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성장하고, 확장하고, 경험하고, 발전할 기회다.

어떤 사건들을 돌이켜 보면

그 이면에 무의식적인 목적이 있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중요한 무언가를 배워야 하는데,

그것을 경험할 유일한 길이

고통스러운 그와 같은 사건이었음을

무의식이 알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정신분석학자 칼 융이 제창한 이론의 일부다.

평생에 걸친 연구 끝에

융은 무의식 속에는

전체가 되고, 완전해지고, 큰나를 깨닫고자 하는

선천적 충동이 있어,

무의식이 설사 의식적인 마음에

상처를 준다 해도

충동을 실현할 방법과 수단을

고안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융에 의하면 무의식 속에는

우리가 지닌 어떤 측면이 존재하는데

이를 그림자라 한다.

 

그림자는 자신에 대한 생각과 감정, 개념을

억압한 것들의 일체로

스스로 직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위기의 이점은 위기 덕에

종종 자신의 그림자를 익힌다는 것이다.

또 위기 덕에 우리는 보다 의미 있고 폭넓은 사람이 되어

자신이 모든 인간과 공유하는 점을 깨닫는다.

 

그들의 죄라고 생각한 모든 것이

내 안에도 똑같이 있다.

따라서 이런 면을 의식적으로 자각해

인정하고 항복하면

더 이상 무의식적으로 휘둘리지 않는다.

 

일단 그림자를 인정하면

그림자는 힘을 잃는다.

단지 내게 어떤 금지된 충동과 생각,

감정이 있음을 알아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고 나면 그런 것들을

그래서 뭐?”하며 다룰 수 있게 된다.

 

삶의 위기를 통과하면서

우리는 보다 인간미 있고

인정 많은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자신과 타인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된다.

더 이상 타인이나 자신을 비난하는 일에

빠질 이유가 없어진다.

 

감정적 위기를 해결하면

보다 큰 지혜를 얻게 되며

그 지혜는 평생 이익이 된다.

 

삶을 겁내는 것은 감정을 겁내는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다.

감정을 정복하면 삶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든다.

자신감이 커져 기꺼이 더 큰 모험을 한다.

 

감정으로 인한 결과가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모든 주저함을 낳는 근원이어서

두려움을 정복하면

이전에 꺼렸던 인생 경험에 들어가는 길 전체가 뚫린다.

 

실직 위기를 다루는 데 성공하는 사람은

다시는 그런 두려움에 떨지 않는다.

그래서 다음 직장에서는 보다 창의적으로 일하며

일에서 성공하는 데 필요한 위험을

기꺼이 감수한다.

마음 한구석에 늘 실직의 두려움이 있었기에

과거에는 얼마나 심하게 몸을 사리고 조심스러웠는지

굽실대며 윗사람을 따르느라

얼마나 자존감이 상했는지

차차 보이기 시작한다.

 

삶의 위기가 주는 또 다른 이점은

자신에 대한 자각이 커지는 것이다.

위기 상황이 압도하는 가운데에서는

한눈팔 새도 없이

자신의 상황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자신의 믿음과 목표, 가치관, 삶의 방향을 되짚어 보아야만 한다.

 

위기는

죄책감을 되짚어 보고 놓아버릴 기회다.

또한 마음가짐을 완전히 바꿀 기회이기도 하다.

 

삶의 위기를 통과하면서

우리는 극과 극에 마주친다.

그 사람을 증오할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

이번 경험에서 교훈을 얻어 성장할 것인가, 분개하고 억울해 할 것인가?

다른 사람이나 자신의 결점을

눈감아 줄 것인가, 화내며 따지고들 것인가?

미래에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더욱 겁내며 물러설 것인가, 이런 위기를 완전히 초월하고 정복할 것인가?

희망을 선택할 것인가, 좌절을 선택할 것인가?

이번 경험을 나눔을 배우는 기회로 삼을 것인가,

겁내고 억울해 하는 겉모습 속으로 움츠러들 것인가?

 

모든 감정 경험은

올라가거나 내려갈 기회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이 문제에 부딪친다.

 

우리에게는 감정 혼란을 움켜쥐고 싶은지, 놓아버리고 싶은지

선택할 기회가 있다.

즉 감정 혼란을 움켜쥐는 대가를 살펴볼 수 있다.

 

대가를 치르고 싶은가?

아니면 기꺼이 감정을 받아들이고 싶은가?

 

놓아버리면 이로운 점도 살펴볼 수 있다.

나의 선택이 미래를 결정한다.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

치유되는 쪽을 택할 것인가, 걸을 수는 있는 부상자 측에 낄 것인가?

 

선택을 할 때는

고통스러운 경험의 잔재를 움켜쥠으로써

얻을 수 있는 보상을 살펴보면 좋다.

 

어떤 만족을 얻으려는 것일까?

얼마나 하찮은 것에 선뜻 만족하려는 것일까?

분노, 증오, 자기연민, 억울함.

이 모두에 하찮은 싸구려 보상,

하찮고 은밀한 만족감이 들어 있다.

 

아닌 척하지 말자.

고통을 움켜쥐는 데서 오는 이상야릇한 쾌감이 분명히 있다.

이 쾌감으로 인해

벌을 받아 죄책감을 덜고자 하는 우리의 무의식적 요구가 충족된다.

아울러 비참하고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

계속 이래야 돼?”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23년 동안 형과 말을 하지 않고 지낸 남자의 예를 보자.

무슨 일로 그렇게 되었는지 형도 동생도 기억하지 못한다.

잊은 지 오래다.

말을 섞지 않고 지내는 것에 익숙해지는 바람에

23년 동안 형제가 함께하며

서로 보살피지도, 가족끼리 단란하게 지내지도 못했고

고락을 같이하는 우애를 나눌 일도 없었다.

 

항복 기제를 알고 난 남자는

형에 대한 감정을 놓아버리는 일에 들어갔다.

그러자 느닷없이 슬픔의 눈물이 쏟아지며

지난 세월 동안 잃어버린 온갖 것들이 떠올랐다.

남자가 형을 용서하니

형도 이에 호응해 두 사람은 관계를 회복했다.

그러자 둘 중 한 사람에게

옛 기억이 떠올랐다.

테니스 신발 한 켤레 때문에 말다툼을 한 기억이었다.

테니스 신발 한 켤레 때문에 23년간 대가를 치른 것이다!

 

놓아버림 기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그때의 억울함을 덤까지 고스란히 가지고 갔을 판국이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얼마 동안이나 계속 괴로워하고 싶은가?”이다.

언제가 되어야 기꺼이 괴로움을 포기할 것인가?

그만하면 되고도 남는 것이 언제인가?

 

내면에서 부정적 감정에 매달리고 싶어 하는 것은

우리의 왜소함이다.

왜소함은 심술궂고, 옹졸하고, 이기적이고,

경쟁심 많고, 인색하고, 음해하기 좋아하고,

의심 많고, 앙심을 잘 품고, 비판 잘하고, 보잘것없고, 나약하고,

죄책감 많고, 떳떳하지 못하고, 자만심 강한 측면이다.

 

왜소함에는 에너지가 별로 없어서

자존심만 고갈시키고 낮춘다.

자기혐오와 끝없는 죄책감, 벌을 받고 건강하지 못하고

병이 나길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우리 안의 왜소한 측면 때문이다.

 

그런 측면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은가?

그런 측면에 힘을 보태고 싶은가?

자신을 그렇게 여기고 싶은가?

 

내가 나를 그렇게 여기면

남들도 나를 그렇게 여긴다.

내가 나를 보는 대로 세상이 나를 볼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결과를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스스로 자신을 인색하고 옹졸한 사람으로 본다면,

연봉 인상 목록의 첫머리에 올라가기는 어렵다.

 

왜소한 면을 고집한 대가는

근육 테스트로도 알아볼 수 있다.

테스트는 매우 간단하다.

마음속에 심술궂고 옹졸한 생각을 품은 채

옆으로 뻗은 팔을 다른 사람에게

눌러 달라고 하고 누르는 힘에 저항한다.

결과가 어떤지 본다.

 

다음에는 정반대의 생각을 품는다.

스스로를 관대하고 너그럽고 다정하며

자신의 내적 위대함을 느끼는 사람으로 상상한다.

그러면 즉시 근력이 세져서

긍정적인 생명 에너지가 급상승한 것을 볼 수 있다.

 

왜소함은 나약함과 허약함, 질병, 죽음을 가져온다.

이런 것을 정말로 원하는가?

 

부정적 감정의 놓아버림과

병행할 수 있는 매우 건전하면서도

내적 변모에 크게 도움이 되는 방법이 있다.

긍정적 감정에 저항하기를 멈추는 것이다.

 

오늘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