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그라운드(2024)

[신박한깨달음] 우리는 인생의 목표를 높은 영적 의식에 도달하는 것으로 삼아야 한다|신을 찾아서

Buddhastudy 2024. 4. 2. 19:37

 

 

20세기 최고의 예언자이며

미국에서 유명한 영능력자인 에드가 케이시는

의학 교육은 고사하고 학교 교육은 7학년이 전부지만

최면상태에서 무의식으로 말하는 방식

즉 리딩을 통해

난해한 의학 용어를 사용하며

수천 명의 난치병 환자들을 진단하고 치료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영혼과 소통하는 영적 능력이 있었으며

치료와 관련해서는 돈을 받지 않았고

평생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케이시는 자신의 영능력을 여러 분야로 확장했고

최면 상태에 그에게 질문을 하기만 하면

고차원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는 인생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질문에 대해

인간의 본성은 영적 존재이며

사람은 영혼을 수양하기 위해서 몇 번이고 육체로 거듭 태어나

결국에는 윤회를 초월한 영적 세계로 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케이시가 제공한 정보는

인류의 영적 성장에 커다란 기여를 할 만한 것으로

그의 사상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영향을 주고

세계관을 변화시켰다.

 

케이시는 누군가로부터

당신의 최대 업적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주저하지 않고

‘<신을 찾아서>라는 책을 이 세상에 남긴 일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오늘은 에드가 케이시가 남긴 최고의 영적 유산 <신을 찾아서>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

이 물질세계에서는 성장이라는 현상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물질적, 육체적 성장뿐만 아니라

영적 성장에 대해서도 분명히 자각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인간과 신의 관계를 이해한다거나

혹은 그 이해의 깊이를 더하거나 폭을 넓히는 것도

영적 성장에 포함된다.

 

기도란

물질세계에 나타나 있는 영적인 힘에

우리의 의식적인 마음을 동조시키려는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마음을 합치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명상이란

내면의 자신에게서 오는 기도라고 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명상은

육체로서의 인간의 내적인 작용임과 동시에

영에 의해서 각성 된 마음의 작용이기도 한 것이다.

 

기도 속에서는 우리가 신에게 이야기하며

명상 속에서는 신이 우리에게 이야기를 한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을 듣기 위해서는

기도라는 준비를 해야 하고

그런 다음 조용히 귀를 기울여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명상의 토대가 된다.

 

참된 명상을 얻기 위해서는

신과의 친밀한 교류에 걸맞은 자신이 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야 한다.

이처럼 기도와 명상은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

 

육체란

물질계에 나타난 창조력이 모인 하나의 통합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육체 속에 모든 것이 존재하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우주는

그 축소판을 육체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탐구하여 자신의 육체가

살아계신 신호의 신전임을 자각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일 뿐만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다.

 

우리가 무한한 신에 동조하기 시작하면

몸 안에서 힘을 만들어 낸다.

이 영적 힘은, 레이딕 세포군이라는 중추를 통해서 들어온다.

 

지금까지 영적 활동을 통해서 그 중추를 어떻게 활용했느냐에 따라서

열리기도 하고 다치기도 한다.

이미지나 이상을 떠올리면

이 생명 에너지는 뇌의 송과선에 도달한다.

여기서 생명 에너지는 정신체와 육체의 활동력을 주는

각 중추로 나누어 전달된다.

그리고 이 에너지는 뇌의 중앙에 있는 제3의 눈을 향해 간다.

이 중추는 이마의 중앙 바로 뒤쪽에 있다.

따라서 명상에 들어가면

성선에서 뚜렷한 전류 충격이 일어나고

그것이 송과선을 통해서 뇌하수체에 도달하게 된다.

 

그가 품은 이상은 위로 떠올라

마음속에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그 이상이 물질적인 것이라면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집착과 편향이 더욱 우리의 마음속에 축적되고

이상이나 이미지가 영적인 것이면

영적 성장을 가져다 준다.

 

영능력이란

이들 영적 중추의 활동에 의해서 각성된

영혼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뇌하수체의 영향만을 받아온 사람을

육체를 구성하는 모든 원소가 교체되는 기간인

7년간 해부학적 측면에서 연구하면

영적 법칙에 따라 수양을 해온 사람은

세상의 빛이 됨을 알 수 있다.

그와는 반대로 물질적인 것만을 주입받은 사람은

영적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괴물이 되어버린다.

 

영적 중추를 통해 에너지가 상승할 때

육체에서 분명한 파동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우리의 의식은 모든 일을 3차원적으로 받아들이며

모든 상념은 진동수가 다른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먹는 음식이 육체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무엇을 먹는가가 중요하듯이

정신의 패턴을 형성하는 요소로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

 

마음은 건설자이다.

건축기사는 원재료에서 보다 높은 파동의 형태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상념의 파동을

남을 돕는 힘 이외의 것으로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된다.

 

--마음은 건설자이며 육체는 그 결과다

마음은 육체적인 성질과 영적인 성질 모두를 띠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마음속의 극히 일부만을 의식하는데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이 부분을 [현재의식]이라고 부른다.

 

그에 반해서 기억의 저장고이자 육체를 언제나 감시하고 있는 부분으로

[잠재의식]이라 불리는 의식 영역이 있다.

 

이 현재 의식과 잠재의식 외에도 또 다른 영역이 있다.

그것은 [초의식]이나 [혼의 마음]이라고 불린다.

 

우리는 명상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올바르게 움직이도록 만들려 한다.

또한 의지력을 통해서 육체의 마음이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을 제지하고

이상 위에 굳건히 올려놓으려 한다.

그리고 그 이상이 보다 높은 차원의 정신에까지 전해져

그 결과로서 생겨나는 활동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이상이나 목표가

초의식의 마음과 올바른 조화를 이룰 때,

초의식은 오감 중 어느 한 감각을 통해서

육체의 마음에 도움이 되는 것을 우리의 의식 속으로 보낸다.

 

고차원의 정신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는

우리가 그 사실을 이해하려고만 하면

누구에게나 나타난다.

 

그러나 이상과 목표가

영혼의 마음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육체와 영혼 사이에 문을 열려고 하면

그것은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에 타격을 주어 내면의 혼란을 일으킨다.

 

따라서 명상을 행하려면

우선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신을 알려면 겸허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동조의 정도는 영혼의 성숙 정도에 비례한다.

예를 들어

라디오를 동조시키면

어느 라디오나 대부분 같은 주파수에서 울린다.

그러나 설령 라디오 두 대를 나란히 늘어놓는다 할지라도

두 대의 라디오가 완전히 같은 주파수에서 동조하는 경우는 없다.

그 위치에 따라서 동조하는 파장이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신의 의식을 신에게 동조시키려 할 때도

개개인의 성숙 정도에 맞춰서 동조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인가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그 완성도가 높아져가듯

이와 같은 동조 역시 한 걸음, 한 걸음 성장해 나가는 법이다.

 

--명상의 다른 목적

명상을 통해 우리는 자신 속에 있는 영적 힘을 깨닫고

또 명상에 의해서 육체와 영체 사이에 있는 문의 열쇠를 열게 된다.

 

우리의 영혼은 많은 능력을 부여받았지만

그것들은 육체가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는가 하는 능력에 따라 제한을 받는다.

 

내가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영혼 그 자체인 것이다.

 

이 육체를 벗어버리고 나면

우리는 다른 의식상태, 다른 경험세계로 향하게 된다.

육체의 사후에도 결코 소멸되지 않는 무엇인가를

우리의 정신이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정신의 작용은 우리의 [영적 중심인 영혼]에서 온다.

명상을 하는 방법은

명상을 하는 사람의 숫자만큼 존재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명상을 이 세상의 실현으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으로 삼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지식에 이르는 길, 신에게 이르는 길로 삼는 사람도 있다.

여러 종류의 명상법이 있으며, 어느 방법에나 각각 신봉자들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목적과 이상에 있다.

단순히 육체를 안정시키는 것뿐이라면

명상이 아니라 보다 직접적인 방법을 이용하면 좋을 것이다.

 

명상에는 좀 더 다른 목적이 있다.

즉 높은 영적 의식에 도달하는 것을 깊은 명상의 목적이자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높은 이상을 내걸고

우리의 의식을 그 이상 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당연한 결과로 육체는 차분해지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의식의 초점이 하나로 모아져 내적 감각이 고조된다.

 

의식을 이상에 집중시키는 동안에는

스스로의 모든 것을 집중해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각성 상태에 도달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명상을 할 때만큼

어떤 영향력의 작용을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때도 없다.

이 영향력을 심령적인 힘이라 부르기도 하고

오컬트 직감력, 우주적인 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호칭은

신의 다양한 작용을 나타내기 위해 붙여진 단순한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여러 영향력의 한 예로

우리의 온 마음의 체험에서 생겨나는 직감력이 있다.

직감력은 우리 의식의 마음을 자기 성찰함으로써 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체험 자체가 직감적인 성질을 띠게 된다.

 

이와 같은 상태를 가리켜 [침묵 속으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항상 자기 마음의 상태를 파악하고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는 각각의 체험을

전체 속에서 명료하게 의식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성자 혹은 라마라고 불린다.

 

만약 이 능력을 현실 세계에 적용하고

또 내적으로는 영성 위에 머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주인이 된다.

 

--명상함으로써 신을 알 수 있다

자기 성장을 목적으로 한다면

지금의 자신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주위의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려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면

다음은 더욱 좋지 않은 상태가 되어버릴 뿐이다.

 

그리고 극복해야 할 처음이자 마지막 난관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데 있다.

자신이라는 존재를 형성하고 의미 짓고 있는 요소가 무엇인지

그것에 대한 인식이 충분하지 않으면

자기 인생의 목적과 목표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다.

 

명상은 자기 성찰의 깊이를 더해주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진실의 세계는 닫힌 문 건너편에 있다.

명상은 진실의 세계를 가로막고 있는 문의 열쇠라고 할 수 있다.

자기에 대해서 배우고 자신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하자.

 

명상에 들어가는 방법이나 성과는 사람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 목표로 하는 것은 같은 깨달음, 같은 의식의 도달점, 같은 각성 상태에 있다.

명상은 규칙적으로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멋대로 명상을 하기도 하고, 쉬기도 하는 태도로는

그리 큰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높은 이상을 내걸고 규칙적으로 내면의 자아가 눈을 뜨게 하자.

 

명상을 위한 노력은 결국 반드시 보답을 받는다.

모든 영혼에게 있어서 탐구의 최종적인 도달점은

신을 있는 그대로 아는 데 있다.

 

명상을 함으로써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신을 알 수 있으며,

또 명상을 통해서 우리는 도달점을 향한 다음 단계를 부여해 주는

죽음이라는 변화에 대비하게 된다.

 

신은 어떠한 존재일까?

우리는 내일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그런 것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은가.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자신을 알려면 자신의 육체적인 면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신이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갖춘 완성체이며

자신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파악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하나의 완성체인 우리는

우리 자신이 대우주의 축소판으로

우주가 그런 것처럼 육체와 정신체와 영체의

삼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3개의 신체는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어떤 신체의 파동은 나머지 2개의 신체에 영향을 준다.

 

특히 정신체는 육체와 영체 양쪽의 속성 모두를 띠고 있는데,

육체 쪽에 있는 정신은 현재의식이 되고

또 영체 쪽에 있는 정신은 초의식이 된다.

 

우리의 육체는 살아계신 신의 궁전이다.

육체는 물질세계에 나타난 창조력의 다양한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육체를 구성하는 이 모든 부분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어 함께 작용해야 한다.

 

각 부분은 서로 고유한 작용을 하고 있으며

그 어느 하나를 놓고 봐도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다른 부분이 그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

 

또한 쓸데없는 것, 의미가 없는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신체 장기는

자신만의 고유한 기능과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그들의 욕구 자체는 신성한 것이다.

 

우리의 감각은 육체가 어떤 욕구와 본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들을 확대하여 우리의 의식에 전달해 준다.

그들 욕구는 우리의 육체 활동으로 나타나며

결국에는 그것이 얼굴 표정에 나타날 정도가 된다.

 

다시 말해 육체는 본질적으로

내면의 자아를 물질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내면의 자아가 가진 욕구는 결국 겉으로 드러나는 법이다.

 

우리의 생각과 행위는

지금의 삶뿐만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서 우리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일은 미래의 자신에게 있어서

영혼의 등급을 형성하는 부분이 된다.

 

마찬가지로 정신체와 영체가 가지고 있는 소망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한다.

이와 같은 인격 형성은 먼 옛날부터 계속되어 온 것이다.

 

유전과 환경, 카르마, 그리고 영적 세계의 보편적 법칙의 작용 등

이러한 모든 요소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마치, 육체 장기의 욕구와 파동이

육체의 구성 요소를 끌어당겨 형성되는 것과 같다.

우리 자신은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씨앗의 발달 결과이자

하나의 영혼으로서 생성된 이후

계속되어 온 자기 성장의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는 온갖 의식 상태에서 겪은

모든 경험의 총집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육체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의 겉모습은

아름다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메마르게 하며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불화와 타락만을 전해주게 된다.

 

자기 육체의 소망과 욕구를 안다는 것은

육체의 깨달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생각이란 곧 행위이고

생각은 정신과 영혼의 융합에 의해서 태어나는 자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항상 생각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 된다.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

우리 자신의 육체에 각인되고

우리 영혼의 식량이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로 옮겨갔을 때

우리의 영혼이 상속받는 재산이 된다.

 

때때로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보자.

인생에서의 목적이

분화, 권력이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그로 인해서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린 것처럼 되어 있지는 않은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