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라선공부

[릴라선공부] 잡고 있는 것 놓아버리게 할 뿐

Buddhastudy 2024. 4. 16. 20:08

 

 

/앞에 비구들이요.

너희도 내가 저 세상에 가서 태어나는 것은

지금의 이 의식과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설법한다고 아느냐?/

 

이 인용된 문장

부처님의 설법이, 나의 말이

내가 저 세상에 가서

우리가 죽은 뒤에 태어나는 것은

지금의 이 의식과 다른 것이 아니다 라고 설법한다고 아느냐?

그런 게 아니다라는 어떤 규정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죠.

내가 저 세상에 가서 태어나는 것은

지금의 이 의식과 다른 것이다.’

이런 규정

아니면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규정, 이런 가르침

이거를 너희들한테 설법한다고

뭐 뭣이다 아니다라는 걸 설법한다고 알고 있느냐?

 

부처님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이 의식과 다른 바가 아니다.

아니 의식과 같다.

 

저 세상에 사실은 우리가 그것도 한번 잘 생각을 해봐야 되는 게

우리가 죽으면 흔히 생각하는 게

어디 딴 세상에 가서 태어난다

윤회를 받는다라고 생각을 하잖아요.

 

근데 그 재밌는 게

그러면 지금의 이 의식 세계가 또 펼쳐진다고 사람들은 그냥 기정사실로 해요.

그래서 죽어서 어디로 간다, 태어난다,

근데 너무 그게 우습잖아요.

이 의식 세계가 또 펼쳐진다는 그 믿음,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 겁니까?

누가 그랬어요?

거기 가보신 것도 아니고

그렇게 태어나 본 적도 없는데

우리는 지금과 똑같은 의식으로 그 세계를 살 거야라는 식의 상상을 하죠.

 

그건 지금의 자기 얘기인 것이지 그 얘기가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죽어서 어디로 어느 세계로 가서

만약에 저승이라고 칩시다.

저승에 가서 아니면 천국에 가서 태어난다라는 건

지금의 우리 의식의 패턴에 그 한계에 갇힌 상상이잖아요.

 

그 세계 가보셨어요?

거기서 살아보셨어요?

근데 왜 우리는 그럴 거라고 막연히 믿죠?

 

그건 지금 이 삶의 이 사고의 반영일 뿐인데

이와 같은 일이 그때 일어난다고 우리 철석같이 믿어.

똑같은 삶이 계속된다고 생 막연히 생각하는 거지.

 

이생이 그럼 뭐냐면

이생이 계속 무한정 반복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사실은 근데 그런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어디서 그런 걸 갖고 확신을 하세요?

 

그건 뭐냐하면 지금 의식의 반영일 뿐이고

지금 내가 생각하는 패턴의 연장일 뿐인 거예요.

 

그런 세계가 있을지 어떻게 알며

그런 시대에 살지 어떻게 알며

그런 세계를 경험해 보지도 않았는데.

 

누가 죽을 고비가 돼서

거기 가봤대 저승에 가봤대

그건 지금 의식의 반영인 거예요.

 

근데 이거를 깨기 위해서

의식과 다른 것이 아니다.

지금의 의식이다라고 얘기를 하잖아요.

지금 의식의 반영이다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의식과 다른 것이 아니다.

지금 의식의 반영이다얘기하잖아요. 같은 말이거든.

 

근데 이거를 딱 고착시키는 그런 의도

이게 진리다이런 말이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될 진리다라는 것을 듣는 사람들한테 주기 위해서

내가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만

이게 방편이라는 거예요.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그런 세계가 있다라는 걸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그거와 반대되는 세계가 있다라는 걸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우리가 묶여 있는 그것을 흔들어 놓기 위한 것인 거예요.

 

근데 우리가 죽으면은, 만약에 선업을 쌓으면은

천당에 가서 선한 몸을 받고 살 거야.’

그거 니 생각 아니냐

지금 의식과 다를 바가 없는 게 아니냐라고 얘기할 수 있죠.

 

그러면 공부가 뭔지 모르는 사람

지금 그것은 지금 의식의 반영이야. 의식과 다른 게 아니야라는

그걸 딱 잡아버린다고

그걸 잡으라고 이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이거예요.

지금 잡고 있는 거를 놓아버리 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얘기한다는 거지.

그런 식으로 믿고 있는 그 마음을 부수기 위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지.

 

그래서 우리가 부정을 많이 얘기하고, 없다라고 얘기하는 거는

부정없음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잡고 있기 때문에 아니다라고 얘기하는 것이고

있다라고 여기기 때문에 없다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방편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그 말이라는 거지.

 

그러니까 법문을 들을 때 그렇게 들어야 돼.

제가 드리는 어떤 정해진 법, 정법을 드리는 게 아니야.

이게 정법이거든

기다 아니다. 맞다 틀리다 있다. 없다라는 건 정법이거든.

아니다라는 것도 정법이에요.

정해 놓은 법이다.

 

근데 불법은 무유정법

정해 놓은 법이 없다. 그게 불법이다.

불법은 불법도 없다.

만약에 불법이 있다 그러면 그건 정해 놓은 거니까.

 

그러니까 뭐라고 얘기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시여.

 

너희들은 내가 어떻게 설법한다고 아느냐?”

 

저희는 세존께서

의식은 인연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난다고 설법하신 줄 압니다.

세존께서는

끝없는 방편으로 의식은 인연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난다.

의식은 인연이 있으면 생기고

인연이 없으면 사라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는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줄로 압니다./

 

이게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인연으로 인해서 말하게 되는 것이지.

그러니까 있다라는 생각에 갇혀 있기 때문에 없다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지

없음을 정답이라고 생각해서 얘기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인연이기 때문에

말하는 거라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뭔가 잡고 있어, 집하고 있어요.

집을 깨기 위해서 없음을 얘기하는 것이지.

 

왜냐하면 없는 걸 왜 잡고 있어?

잡지 마라고 얘기하는데 잘못 알아들으면

없다. 잡을 게 없다라는 그 고착성에 빠진다. 이거예요.

그거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이거예요.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약을 쓰는 것이지

약을 평생 먹으라고, 그걸 잡고 있으라고

법문을 하는 게 아니다.

 

이게 연기법의 그거예요.

연기법은 서로 의존관계라는 거예요.

있음없음이 의존관계라는 거예요.

그럼, 사람은 있다고 여기면 있는 줄 알아.

근데 그건 없음에 의지하고 있는 거거든요.

 

그럼 뭐야?

자성이 없는 거예요.

있다라는 것도 자성이 없어.

없다라는 것도 자성이 없어.

그게 연기, 즉 공이라는 거예요.

 

잡을 게 아무것도 없는 그거에 눈뜨라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것이지

법문의 내용을 정답이라고 여겨서

잡으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검의 역할을 할 뿐이지

그것을 매듭짓기 위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아까도 보사님도 얘기했죠.

무슨 말을 하면은

자꾸 안 잡으면 이상하니까 잡고 싶대.

그게 자꾸 습관이에요. 습관

잡는 거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 얘기하는 거예요.

 

근데 허전할 수 있죠.

?

평생을 잡아버린 버릇을 익혀왔기 때문에.

 

근데 그것이 그거 잡을 게 아무것도 없는 것에

길들이는 거, 익숙해지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냐?

잡으면 이상해지는 거야, 나중에는.

뭔가 잡고 있는 게 불편해

잡고 있는 게 이상해.

 

그래서 한마디도 받아들일 말이 없고

한마디도 받아들여서 새길 게 없어요.

 

단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내가 잡고 있는 것을 돌아보고

거기서 놓아버리게 하려는 의도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잡으려는 집착심이 다하면

그게 불심인 것이지

따로 불심을 얻는 게 아니다.

 

이거 잘 알아들으셔야 됩니다.

공부, 시종일관 이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말귀를 알아들으라는 게 이거예요.

제 말을 집어 먹으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내가 갖고 있는 거

토해내라고 약을 쓰는 거예요.

그럼 같이 토해내야지,

약까지 같이 토해내야 되겠죠, 건강하려면.

 

우리 있잖아요. 뭔가 체했어 얹혔어

그러면 약을 쓰죠.

그 약만 먹고 음식물은 토하는 게 아니고

같이 토해내야 되는 거예요.

같이 비워져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공부는 뭐냐?

비워지는 공부야.

비워지지 않아서 가려져서 우리가 못 보고 있을 뿐이지.

그래서 비워지고 비워지고, 사라지고 사라지고, 없어지고 없어지고

본래 청정심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거예요.

 

뭔가 잡고 있으니까

그게 장애가 있고, 부족함이 느껴지고, 분명하지 않은 거예요.

하나도 잡을 게 없습니다.

행동 지침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공부 어떻게 하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하려는 마음을 쉬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막하고 있는 걸 멈추게 할 뿐인 거예요.

그러면 저절로 우리 안에

지혜가 완전하게 갖춰져 있거든요.

그게 온 세계를 다 드러내고 있다라는 그 확연함이

그제서야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법문이 어떤 거라는 거를

잘 이렇게 들으시고

뭔가 이건가?’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걸 놓아버린

 

근데 이게 처음에 잘 안 돼.

뭔가 이해해야지 공부가 되는 줄 알아.

이런 거구나라고 딱 요점 정리해서

마침표를 똑 찍어야지

그게 공부라고 착각해.

 

그 마침표를 없애고

문장을 해체하고

단어를 없애고

이해된 게 아무것도 없어지고

잡는 게 아무것도 없어지고

오히려 아무것도

우리가 이걸 청정심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거예요.

오염된 거를 이렇게 청소하는, 깨어나게 하는 것이지

다른 공부가 있는 게 아니다.

본래 청정심을 회복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