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식_죽음이야기

최준식 교수의 죽음 이야기 6월 19일 방송 (29:11)

Buddhastudy 2012. 1. 1. 22:44

  출처: 유나방송

이전에는 뭐 병원 안 갔습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객사하는 것을 대단히 기피했기 때문에 병원에서 돌아가시려 한 분도 집으로 모셔다가 임종을 맞이했는데 지금은 반대죠. 집에서 잘 하시다가 죽을 때 임박하면 병원에 냅다 달려가게 됩니다. 이렇게 됐는데 이런 것들이 죽음에 대한 무조건적인 회피를 가져왔다. 이렇게 얘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현대는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게 힘들까? 핵가족 제도고, 동네, 공동체가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모든 죽음의 문제는 자기 가족 내에서 해결해야 됩니다. 이게 안 되는 거죠. 지금 더 큰 문제가 사람이 죽으면 주로 요새는 아파트에 살지 않습니까? 아파트에서 관을 싣고 내려오려고 그래도 싣고 내려올게 없습니다. 승강기는 절대로 안 태워주죠. 왜 그렇습니까?

 

죽음, 그 부정한 시체를 어떻게 살아 있는 사람들이 타는 승강기에 실을 수 있느냐? 이런 생각 때문에 절대로 안 태워 줍니다. 또 옆에 사람이 죽으면은 재수 없다고 이렇게 얘기하고 기피하고 말이죠. 또 아파트에서는 손님도 치를 수가 없죠. 공간도 비좁고 하니까. 이전에는 앞마다에서 치르고 안 되면 옆집에서 할 수도 있고 말이죠. 이게 가능한데. 지금은 아파트 안에서 수십 명의 손님을 치를 수 없고, 이럴 경우에는 옆집에서 바로 불평이 들어오고, 아예 할 수도 없게, 그런 일을 할 수도 없게 만들게 되죠. 공간의 부족, 그런 거.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재수 없단 말이죠. 이런 생각들.

 

그리고 집에서는 또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장상례의 전문가들이 없습니다. 이전처럼 노인들과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마을에 호상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래저래, 저도 좀 걱정이 들어요. 부모님 돌아가셨다. 그러면 어디다 먼저 전화를 하고, 뭐를 하고, 어떻게 해야 될지. 그런 이런 것들을 잘 모르지만. 병원에서는 이걸 다 해결해 주는 거에요. 사망신고도 대신 해주고 이런 것들. 이런 것들이 죽은 병원에서 맞게 해주는 요인으로 작용을 하게 된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요 병원문제가 나와서 말씀을 드리는데 우리나라 병원에서 죽음 관계되는 게 문제가 있습니다. 뭔고 하니요,

 

한국 사람들의 전체적인 문제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한국인들은 병원에서 태어나서 병원에서 죽습니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한 인간에게는 대단히 성스러운 일이겠죠? 이전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칠성님에 고하고 뒷산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이렇게 하고, 집에 사당에 조상들에게 고하기도 하죠. 죽을 때는 유교적인 의례로 존엄하게 또 성대하게 가는 분들을 보내드립니다. 지금은 아무 성스러움이라고는 없는 병원에서 태어나고 또 병원에서 죽습니다. 이게 뭐 사회적인 기능적인 면에서 그게 좋아서 그렇다는 것은 이해는 됩니다마는 인생을 좀 더 포괄적으로 깊게 조망할 때는 그다지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영안실이 병원에 생기게 되죠. 병원에 영안실이 생기는 나라도 한국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문제는요, 영안실 전에 우리가 지금 가장 큰 문제가요, 사람이 병원에서 죽을 때, 그 저도 이건 의사들한테 직접 듣기만 하고 직접 가서 보지는 못한 겁니다. 가령 중환자실 여러 환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고 하니, 사람이 막 죽어갈 때쯤 되면은 연명시키기 위해서 심폐소생술을 씁니다. 여러분들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셨을 겁니다. 다리미처럼 생긴 그 전기 자극을 쇼크를 충격을 주는 그 기계를 가지고 가슴에 대서 충격을 줘서 다시 살아나게 하죠.

 

이게 그렇게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낭만적인 것이 아니구요, 또 코미디언들이 다리미로 흉내 내는 그런 코믹한 게 아니고, 굉장히 차마 보지 못하는 그런 장면이라고 그래요, 의사들 얘기가. 너무나 강한 충격이 들어가고 그러니까 말이죠. 펄떡펄떡 뛰고 그러지 않습니까? 중환자실에 여러 명이 있는데 한 환자한테 그걸 해대면은 다른 환자들 가족들은 뭐 거의 패닉, 공항상태에 들어간다. 그래요, ~ 우리 부모님도 그렇게 할 수 있겠구나. 이런 막 옆에다가 피해를 주는 거에요. 그러다가 이 분이 돌아가시면 그 시신이 거기 몇 시간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신이 옆에 있는 게 우리 살아 있는 사람입장에서는 그다지 그렇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겠죠.

 

이런 문제가 있어가지고요, 의사들은 이전부터 영면실 혹은 임종실을 만들어야 된다. 거기는 거의 죽을 때가 된 환자가 되면 그 방으로 옮겨지게 되고 그 안에서 그 가족들만 있는 자리에서 임종을 맞이하게 하는, 편안하게 맞이하게 하는 이런 방을 마련해야 된다고 주장을 많이 했습니다만 아직 우리나라 병원에 이런 방이 만들어진 것은 세브란스라든가 성모병원 몇 개 되지를 않습니다. 왜 안됩니까? 하고 물어봤더니 이게 보험처리가 안 된다는 거에요. 역시 돈입니다. . 이게 안 되는 것 때문에 정말 죽어가는 분들이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오붓하게 마지막 이별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영면실 임종실에는 돈을 쓰려하지 않으려 하면서, 영안실은 나날이 화려해져가고 있습니다. 아주 아이로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필요한 방은 만들지를 않고, 사실 영안실이라는 건요, 또 손님 접대실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꼭 없어서는 안 될 그런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또 물론 필요합니다. 돌아가신 분의 생각을 하면서 또 가족들 위로하고 그런데 또 영안실도요, 고인이 빠진 의례에요. 무슨 말씀인고 하니, 영안실만 화려하게 만들어놓고 말이에요. 우리 가면 가서 고인 영정 앞에서 절 두 번 하고, 그다음에 가족들 1~ 20초 위로하고, 그다음에는 접대실에 와서 술 마시고 놀고, 거기서 얘기하고는 무슨 사교하는 장이 돼 버렸어요.

 

돌아가신 고인에 대한 생각, 또 이 고인이 일생 어떻게 사셨나? 이런 사진이라든가, , 글 같은 거, 이런 것도 없습니다. 제가 영안실 갈 때마다 도대체 이게 뭐하자는 건가? 우리가 그 정말 가신 분들 추모하고, 또 그분을 기리고, 가족들 위로하고 이런 장이 돼야 될 텐데. 그러면서 또 쓸데없이 화려해지고 말이죠. . 이런 그 현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 그렇게 말씀드리고. 연명기술의 발달, 마지막으로 그 요인을 볼 때 연명기술의 발달. 이것 때문에 우리가 죽음을 회피하게 됩니다. 연명기술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발달했죠. 이전 같으면 죽을 사람들을 다 살려냅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심폐소생술, 인공호흡, 투석하는 거요. 인공영양 배급기 이런 걸 통해서. 저희 모친도 사실은 돌아가실 건데 고관절, 나이가 노인이 되면 두 가지로 돌아가신다고 그러죠? 고관절, 부러져서 돌아가시고 골다공증이 심해서 말이죠. 폐렴. 나중에 잡히지 않는 패렴 혹은 폐암이죠. 이런 거로 돌아가신다고 그러는데. 지금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다리 고관절 부러지는 거는 얼마든지 수술로 문제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 연명기술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발전했기 때문에 그 죽음을 더 늘려놓는 거에요. 삶을 더 늘려놓게 되는 거에요.

 

지금 사람들 어떤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가 하면요. 너무 의료시술이 발달 돼 있고, 그다음에 기계가 좋은 게 많습니다. 의사들은 기술이 좋고 또 좋은 기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무한대로 연기할 수 있는 사건이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죽음은 직면하는 게 아니고, 죽음은 이런 의료진과 기계로 무한하게 연기시킬 수 있는 사건, 죽음을 직면하지 않겠다는 이런 얘기입니다. 그래서요 의사들은 인간의 죽음을 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보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보는가 하면 말이죠. 환자를 마치 망가진 기계처럼 생각하는 거에요. 끝까지 고치는 거에요. 자기 자존심이 걸렸다. 이거에요. 실패하면 어떻습니까?

 

라디오가 고장 났어요. 고치려다 못 고쳤어요. 그럼 어떻게 됩니까? 버리는 거죠. . 끝입니다. 그래서 그냥 기계 버리 듯 잊어버립니다. 이건 제가 아는 의사분한테 직접 들은 얘깁니다. 제가 독단으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의사들은 질병을 못 고치면 이걸 패배로 받아들인단 말이죠. 참 문제라고 아니할 수가 없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문제가 의료진 문제는 지금 환자들과 가장 자주 오랫동안 접촉하는 게 의사들인데, 의사들 교육을 할 때 죽음에 대한 교육, 혹은 영성에 대한 교육이 있냔 말이죠. 전혀 없습니다.

 

미국은 봤더니 90년대부터 의과대학에서 영성에 대한 교육을 시작했다고 그러더라고요. 이런 식의 교육. 없습니다. 그다음에 지지난 시간에 제가 잠깐 말씀드린 거 같은데. 비가역적인 환자들, 다시 건강을 되찾지 못하는 환자들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한 지침서가 있느냔 말이죠. 없습니다. 가령 간암 말기에요. 그러면 몇 달 살 수 있다. 이런 통보를 할 때에 기술. 가령, 이런 극단적인 경우 얘기 드렸습니다. 레지던트가 가가지고, 간암 말기분 보고, “3달밖에 안남은줄 아시죠?” 이런 식의 얘기를 하는 그런 경우도 아주 드물겠습니다마는 그런 경우도 있었다. 그래요. 이건 아주 안 좋은 방법입니다. 이런 식의 말이죠.

 

어떻게 하면 환자들의 존엄성을 유지시키면서 죽음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겠는가? 통증완화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임종은 어떻게 만들어주면 좋겠는가? 이런 문제들. 바로 이런 가장 중요한 문제들이 우리가 계속 죽음을 회피하고 있기 때문에 죽음을 연기하는 사건.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제대로 직면하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런 까닭에 우리는 의료진도 그렇고, 또 환자도 본인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고. 죽음을 제대로 맞이하고 있지 못하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강의는 다 끝났습니다마는 의료진. 의사나 간호사들을 위한 인간 임종교육, 지침서 계발. 대단히 필요한 일인데. 아는 의사들 하고 얘기를 하면 다들 그렇게 필요하다고 생각은 하는데 실행에 옮길 생각은 별로 없는 거 같습니다.

 

어떻게든 해야 되겠다고 생각은 듭니다. 이번 강의는 여기까지 하구요, 다음 시간에는 조금 철학적인 얘기에 들어갑니다. 인간은 어떻게 죽음을 생각하나? 어떻게 죽음을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 철학적인 문제입니다마는 대단히 재미난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과 같이 한 번 말씀을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 지금까지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