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식_죽음이야기

9. 최준식 교수의 죽음 이야기 8월 7일 방송 (15:02)

Buddhastudy 2012. 2. 12. 22:54

  출처: 유나방송

. 안녕하십니까. 최준식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는 근사체험, Near Death Experience의 다섯 단계에 대해서 봤습니다. 첫 번째 다시 잠깐 보면은 체외이탈단계. Out of body Experience 라고 그랬죠? 그다음 터널체험이 되겠고. 터널을 뚫고 나가면 빛의 존재와 만나는 체험. 그 빛의 존재와 자신이 살았던 삶을 다시 한 번 복습을 하고 네 번째에 저승의 장벽 앞에 서게 되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자기 몸으로 귀환하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 오늘은요, 근사체험을 마무리하는 시간으로 이런 체험을 하고 왔던 사람들이 과연 어떤 변화를 겪게 되나? 에 대해서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가운데에서도 다섯 단계죠? 다섯 단계 체험을 모두 한 사람. 특히 빛의 존재와 만나서 변화를 겪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해서 이런 체험을 했던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인이 됩니다. 그냥 명목상의 그냥 교회를 나간다. 절에 나간다. 이런 식의 종교인이 아니고. 지금까지 세계의 고등종교들이 가르쳐왔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을 몸으로 완전히 체화한, 그런 진정한 종교인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오늘 이 시간에는 근사체험을 한 사람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의 변화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진정한 종교가 어떤 것인가? 또 진정한 종교인이란 어떤 사람들을 얘기하는가? 에 대해서 공부하신다. 생각하시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주위에서 접할 수 있는 종교들은 제가 보기에는 개인적인 생각일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단히 왜곡 돼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리라든가 관습적인 것. 이런 것들이 많은 세월을 겪어 내려오는 동안에 좀 본래 자리에서 일탈한 그런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불교든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그 안에 있는 종교의 기본정신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랜 세월을 겪어 내려오면서 거기에 비본질적인 것들이 많이 붙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본질적인 게 무엇인지, 비본질적인 게 무엇인지, 판가름을 할 수가 없게 되고, 더욱이 이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종교인들이 주위에 많이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정말로 지구의 고등종교들. 인류가 창안해 냈던 종교에서 말하는 종교의 본질적인 요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먼저 근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일단 자기 삶에 대한 인식이 고양됐다고 그럴까요? 조금 어려운 얘기가 됐습니다만 간단하게 얘기해서 삶이 굉장히 생생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우리가 보통 보는 일상 삶은 칙칙하고 좀 무겁고 처져있죠. 파릇파릇하고 이런 생생한 이런 맛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매 순간순간이 생생하고,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고. 모든 존재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고, 이렇게 느껴지게 됩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일정한 종교체험을 했다면 이런 체험을 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요. 이전에 지나가는 개를 보면 아무 생각이 없죠. 그러나 지금은 우연하게 지나가는 개도 그 자태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고, 사랑스럽게 보이는 그런 체험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길에 나 있는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것 같은 들꽃들, 잡초 이런 것들이 평소에 그런데 무슨 관심이나 뒀겠습니까? 그런 것들이 아주 아름답고 귀중하게 느껴지게 된다고 그럽니다. 또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것도 이전처럼 아름다운 여인, 또 아름다운 건축, 이런 데서만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가령 할머니의 얼굴에 깊게 패어있는 주름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아주 작으면서도 또 연륜이 있고 이런데서 미와 진실 됨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이거는 아마 이런 체험을 해본 사람들은 제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금세 알아차리실 겁니다. 뭐 저도 이런 비슷한 체험을 불교를 만나고서 했던 기억이 납니다마는, ~ 그 다음에 자기를 수용하는 겁니다. 자기를 수용한다. 좀 이상하게 들리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수용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하실지도 모르겠는데. 이건 무슨 말인가 하면요? 자기를 있는 그대로 자기,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있는 그대로 자기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

 

이제 자기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 어떻습니까? 우리들은 보통의 우리들은 항상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누구는 뭐라고 하지? 뭐 엄마는 뭐라고? 뭐 남편은 뭐라고 하지? 이런 식으로 남의 의견을 좇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 자리에 있는 게 아니에요. **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죠. 다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갖는지? 굉장히 신경을 쓰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큰 사랑에 就眠취면됐다 나온 사람들은 물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을 하지만, 그것에 좌지우지 당하는 그런 경우는 없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타인에 대한 배려감이 굉장히 강해집니다. 이런 분들은요,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간에 그 순간에는 그 사람에게 전적으로 올인 합니다. 그래서 그 상대방은 어떤 생각을 갖게 되는고 하니, 이 사람이 정말로 자기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그럽니다. 아주 그것이 짧은 시간이라도 이게 가능하다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왜 그런고 하니 말이에요. 이런 체험을 한 사람들에게는 타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이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 혹은 긴밀하게 연결돼있다는 것을 체득했기 때문에. 빛의 존재와 대화 속에서.

 

어떤 다른 사람을 만나더라도 자기를 만나는 것처럼 대하고, 또 전 인격적으로 대하게 됩니다. 뭐 그 사람의 어떤 부분만 좋아한다든가. 그 사람의 어떤 매력만 좋아한다거나 이런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좋아하고 존경하게 됩니다. 우리는 타인들을 만날 때 말이죠. 이렇게 만나지 못합니다. 항상 우리는 그 사람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 이용해 먹겠다. 이런 식의,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떤 이득이 될까? 이런 생각을 항상 갖게 됩니다. 수단으로 생각한다는 거죠. 그러나 종교적으로 높이 올라간 분들은 절대로 상대방을 수단으로 생각으로 생각하지 않고, 목적 그 자체로 여깁니다. 이거 참 중요한 얘깁니다.

 

우리가 얼마나 상대방을 수단으로 생각하는지. 이거는요. 본인이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이 나를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좋을 리가 없죠, 그건. 마찬가지죠. 나도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 이렇게 되겠습니다. ~ 그다음에 이 생명에 대한 존중감이 아주 강해집니다. 여기는 반물질주의라든가? 반경쟁주의가 들어가게 됩니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그다음에 타인에 대한 배려를 하는 사람이 생명을 존중 안 할 수가 없죠.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생명은 인간만이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적어도 동물까지. 동물의 수준까지 내려가게 돼서 전체 생명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은 아무리 그 전에 육식을 좋아했더라. 그래도 채식으로 바로 돌아와 버린다, 그럽니다. 불교나 힌두교 같은 인도종교에서 말하는 바와 같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생명의 본질 안을 볼 수 있다면 고기를 먹을 수가 없죠. 그건 맞는 얘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통찰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괜찮겠지 하고 먹고 사는 거죠. 그러나 체험을 하고 난 후에는 이런 크나큰 종교체험을 한 뒤에는 고기는 먹을 수 없다고 얘기를 합니다. 반물질주의죠. 우리는 우리 보통의 우리들은 거의 물질의 함몰 되어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물질에 대표적인 건 물론 돈이겠죠. 그다음에 땅 같은 부동산, , 또 좋은 차, 명품. 이런 것들. 신상을 좋아하는 여성들도 있다. 이런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마는. 그런데 이런 깊은 종교체험을 한 사람들은 물질에 대한 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구나. 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조금 높은 시각에서 보면 마음이라든가 의식의 그림자 정도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그림자를 가지고 죽고 살고 하는 거기다가 신기루에다가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그것만이 있는 것인 양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교체험을 한 분들은 바로 여기에 대해서 확실한 깨달음을 갖게 되고, 반경쟁주의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보면 전부 경쟁경쟁입니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된다, 변화해야 된다. 그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전 그런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뭘 위해서 그렇게 하는가? 더 좋은 차를 만들던지, 무슨 TV를 더 큰 걸 만들고 말이죠. 이런 것들. 그렇게 해서 변화되지 않으면 도태된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래서 그거 만들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냐?

 

사실은 아무 목적이 없습니다. 무조건 크고 빠르고, 이런 것들에 대한 추구관은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쟁경쟁 그러는데 이 생명의 본질을 꿰뚫어본 이 사람들은 생명의 본질은 경쟁이 아니고, 협동과 조화다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 근사체험을 했는데 이 사람이 미국사람이었습니다만. 월가, 월스트리트에서 증권 브로커 같은 에널리스튼가요? 그런 걸 하는 사람이었다고 그래요. 그 사람 뇌리에는 돈밖엔 없었죠. 돈과 투자, 주식. 그러다 이 사람이 근사체험을 하고 바로 그 직장을 떠납니다. ~ 저것은 정말 헛된 일이구나. 라는 걸 깨닫게 되고, 그 다음에 어디로 가는고 하니 자원봉사자가 돼서 봉사단체에서 일을 하는 봉사를 하는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