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종범스님_법문

종범스님 법문 - 화엄의 세계

Buddhastudy 2020. 12. 28. 19:56

 

 

 

대방광불화엄경 세주묘엄품 제 일지이라.

두 권째 권을 시작한다, 이 말입니다.

 

대방광이라,

대방광이라는 것은 어디 없는 데가 없다.

불화엄이라고 하는 것은

공덕을 짖지 않는 데가 없다.

 

대방광불 화엄경이라는 것은

온 우주에서 항상 공덕을 짓는 부처님들, 이러한 말입니다.

 

세주묘엄이라,

그 부처님들이 티끌같이 일어나서 한량없는 공덕을 짓는데

구석구석, 장소 장소에서 주인이 되어

그래서 세주라고 합니다.

 

묘엄이라고 하는 것은 한량없는 공덕을 짓는데

자기가 지은 공덕에 집착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주인이 되는 것은 항상 공덕을 짓지만

항상 공덕을 회향을 합니다.

 

수복과 회향, 이게 수행이에요.

복을 닦되, 복을 회향하지 못하면

자기 복에 자기가 걸려서 고통이 돼요.

그런데 복을 닦되, 복을 회향을 하면

그걸 수행이라고 하고, 그것을 공덕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분들이 세상의 주인입니다. 세주.

그 세주들이 세상을 멋지게 만들어가니까 그것이 묘엄이에요. 묘하게 장엄한다.

이것이 세주묘엄품이거든요.

 

이것은 80권 화엄경에서 이렇게 세주묘엄품이라고 말씀을 하셨고

60권 화엄경에서는 동아시아에서 화엄종풍이 연구되고 완성된 것은

전부 60권에 의해서, 뭐 의상스님도 60권으로 공부를 하시고

중국의 화엄종을 완성시킨 현수법장스님까지

전부 다 60권으로 공부를 하셨는데

 

60권 화엄경에서는 세주묘엄품이라고 하지를 않고

세간정안품이다, 세간의 바른 맑은 눈이다, 이랬어요.

 

세간정안, 세간이라고 하는 것은

시방 삼세 우주 만물이 세간인데

맑은 눈이라고 하는 것은 시방 삼세 우주 만물에 있으면서

시방 삼세 우주 만물에 빠지지 아니하고, 매이지 아니하고, 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눈이 맑으면 이 삶과 죽음에서도 걸리지 않고

눈이 맑으면 시방 삼세, 우주 만물에 걸리지 않는데

스스로 눈에 무언가 가림이 있어서 그것을 가릴 예, 눈 안 예안이라고 하고

삿되게 본다라고 해서 사견이라고 해요.

예안, 사견이 있기 때문에 시방 삼세, 삼라만상에 걸린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그러한 사견이 없으면 맑은 정, 눈 안, 맑은 눈인데 걸리지를 않아요.

그래서 60권 화엄경에서는 세간정안품이라, 이렇게 해놨어요.

멋진 번역들이에요.

세주묘엄이라, 세간정안이 돼야 세주묘엄이 됩니다.

정안이 되지 못하면 묘엄이 될 수가 없어요.

조금 더 읽어보겠습니다.

 

세주들이 나와서 이제 여러 가지 불사를 해 나가는데

이른바 묘염해대자재 천왕은 법계 허공계 적정 방편의 해탈문을 얻고

자재명칭광 천왕은 일체법을 관찰하야 모두 자재하는 해탈문을 얻고

청정공덕안 천왕은 일체법이 불생불멸이며 오지도 아니하고

가지도 아니한 이치를 아는 무공용행의 해탈문을 얻었고

가애락대혜 천왕은 일체법의 진실상을 항상 눈앞에서 보는 지혜바다의 해탈문을 얻었고

부동광자재 천왕은 중생에게 한량없는 편안함과 즐거움을 주는 해탈문을 얻었고

대방변장의 묘엄천왕은 적정 법을 관찰하야 어리석은 공포를 없애주는 해탈문을 얻었고

사유광명 천왕은 무변법계의 잘 들어가서 일체존재의 사유를 아는 해탈문을 얻었고

가애락대지 천왕은 널리 시방 세계에 들어가서 설법하되, 동요함이 없으며

의지하는 바가 없는 해탈문을 얻었고

보음장엄당 천왕은 부처님의 적정 세계에 들어가서 널리 광명을 나타내는 해탈문을 얻었고

명칭광선정진 천왕은 깨달은바 경계에 머물러서 무변광대경계로써 나갈 바를 삼는 해탈문을 얻었나니라.

나무아미타불.

 

이러한 세상의 주인들이 전부 해탈문을 하나씩 얻었습니다.

해탈문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해탈.

60권 화엄경에서는 해탈문이라고 번역을 하지 않고 이득 자재라, 자재를 얻었다.

이할 이, 얻을 득, 이득 자재, 자재를 얻었다 했습니다.

자재가 해탈이에요. 자재가 해탈.

 

해탈이라는 것은 여기서 떠나서 딴 데로 가는 것이 해탈이 아니라

그냥 어디를 가든지 자유자재하는 것,

누을 때는 눕는 데 자재하고, 설 때는 서는 데 자재하고

날 때는 나는 데 자재하고, 또 죽을 때는 죽는 데 자재하고

이 자재한 능력을 얻었다, 이 말이에요.

그게 해탈입니다. 멋진 번역이에요.

 

자재, 자재하면 해탈이지

있는 것을 버리고 없는 것을 구하고 그것이 아닙니다.

있으면 있는 데서 자재하고, 없으면 없는데서 자재하고

오면 오는 데서 자재하고, 가면 가는 데서 자재하고

이 자재하는 것이 해탈이라더라.

 

자재를 얻었다, 이것이 세주들이에요

버리고 취하고 이것은 취사인데,

취사가 이것이 속박이고 그것이 생사입니다.

하나는 취하고 하는 버리고 이게 끝날 날이 없어요.

이것이 윤회요, 이것이 속박이요, 이것이 고해더라.

하나 버리고 하나 구하고 끝날 날이 없어요.

이것이 속박이고, 이것이 윤회에요.

 

그런데 여기서는 해탈인데, 해탈은 자재라.

있으면 있는대로 자재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자재하고

그런 것을 전부 얻었다 이 말이지요.

이것이 해탈문이에요.

 

선지식은 무엇이냐?

선이라는 착할 선, 불격이라는 거예요. 부처님 격이다.

지식이라는 것은 인격이라는 소리예요. 사람의 격이다.

 

그래서 선지식은 불격과 인격을 갖춘 분을 선지식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부처님 격도 갖췄고

부처님 격을 갖췄는데 사람이다.

그것이 선지식이에요.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여래,

여래라고 하는 것은 불격이고, 래라고 하는 것은 인격이에요.

 

부처님 생전에는 부처님이 선지식 역할을 하셨는데

선서, 세간해, 마찬가지예요.

선서는 부처님이 잘 가신다.

그래서 선서는 불격이요, 세간해는 인격이다.

이것이 여래입니다.

 

여래가 계실 때는 여래가 그 일을 다 하셨어요.

그 뒤에는 계속 여래의 역할을 대신 하는 분들이 있어요, 대신.

그 여래의 일을 대신하는 분을 금강경에서는 보살 마하살이라고 했고

그 보살 마하살이 여래의 일을 대신하는 분들이에요.

 

법화경 법사품에서는 법사라고 했고

여래의 일을 대신합니다.

화엄경 입법계품에서는 선지식이라고 했습니다.

선지식은 여래의 일을 대신한다, 이 말입니다.

 

여래가 계실 때는 여래가 설법을 했지만

여래가 열반에 든 뒤에는 그 부처님의 법문을 근본으로 해서

선지식들이 나와서 여래의 설법을 대신하는 것이 불교의 역사고, 가풍입니다.

 

, 이제 이 정도 했고, 근본이 화엄경이니까

화엄경을 또 한 줄 새겨야 되거든요.

화엄경 이것이 진짜 좋은 것이에요, 진짜.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이라는 말 많이 나오는데요,

부처님을 비로자나불이라고도 하고, 노사나불이라고도 하고, 석가모니불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르냐 하면 다른 것도 아니고, 같으냐 하면 같은 것도 아니고 그렇습니다.

 

석가모니불이라는 말은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불이라고 했고

노사나불이라는 말은 60권 화엄경에서 노사나불이라고 했어요.

비로자나불이라는 말은 80권 화엄경에서 비로자나불이라고 그랬어요.

경전마다 이름이 틀린 거예요. 그런 거예요, 이것이.

 

그럼 부처님이 무엇이나?

불신, 부처님의 몸이 온 시방에 두루하다.

그 불신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공덕이요, 부처님의 해탈지견이라

해탈을 얻었을 때 얻은 지혜, 그것이 불신이에요.

해탈지견이라고 그래요.

 

또 불신이라고 하는 것은 법신이라고 하는데

법신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지요, 지혜. 마하반야.

부처님의 마하반야 그것이 청정법신이에요.

 

이 마하반야는 끝이 없어요. 끝이.

그래서 변만법계라, 법계에 두룻이 찼다, 이게 불신이에요.

변만법계.

 

그래서 이 불신을 누가 아느냐?

선지식들. 세상을 장엄하는 선지식들이 불신을 알아요.

그래서 불신의 이러이러한 세계는 누가 얻었고, 이러이러한 세계는 누가 얻었다.

이렇게 되는 거죠.

 

불신은 법신이요, 법신은 지신이다.

지혜의 몸이에요. 지혜.

지신은 끝이 없어. 없는 데가 없어요.

그리고 이 지신은 시간이 없어요.

이것을 인류가 밝여내야 할 영원한 숙제에요.

 

한 티끌과 우주가 다르지 않다.

일미진중 함시방, 이거 하나 알아야 합니다.

미진과 우주가 다르지 않다.

 

이것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는데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안 돼요.

과학 하는 넘, 하나는 영원히 남는 거예요.

요렇게 관찰하면 이렇게 보이고 저렇게 관찰하면 저렇게 보이는 거에요.

이 관찰하는 고놈은 항상 남아요.

관찰하는 고녀석이 없어져야 되거든. 그래야 지신이 되요.

 

그래서 불교를 자꾸 과학에 견주는데 그렇게 하면 안 돼요.

부처님은 과학자가 아니에요.

깨달은 분이에요.

그래서 불교는 깨달음으로 해결되는 거지, 과학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결론이 나왔다하더라도 그 결론을 만들어낸 그 놈은 있는 거예요.

우주가 있다고 관찰해도, 물론 보이지요.

그런데 있다고 관찰하는 고 녀석은 남아있어.

그것은 누가 구제를 하느냐 이 말이에요.

이게 중요한 문제에요.

 

있다고 관찰해도 있다고 보는 놈 하나 있고

없다고 해도 없다고 보는 놈은 있는 거예요.

그럼 보는 놈을 누구 구제할 거냐? 이 구제가 안 되는 거예요.

 

지신, 이 지신은 있는 데가 없고, 없는 데가 없는 것이 법신이거든.

그러니까 변만법계로 보면 가는 티끌하고 우주하고 다르지 않다.

일찰나하고 무량겁하고 다르지 않다.

찰나와 겁, 이것이 근본이 밝혀지는 것이 불교예요. 그것이 깨달음이에요.

그것이 지혜의 몸이다, 이 말이지요.

 

이것을 알려면 어떻게 알아야 하느냐?

이것이 중요한데요, 중요한 건데..

그걸 우리말로 하면 보면 본다어려워요,

보면 본다, 이게 뭔 말이냐?

 

약견 비상이면 즉견 여래다.

약견비상, 상이 아님을 보면 즉견여래, 곧 여래를 본다.

금강경에 약견 제상이 비상이면 즉견여래라. 이랬거든요.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보는 순간에 여래를 보는 거예요.

이것이 다 있어요, 경에.

 

보이는 게 형상이거든요.

이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볼 때 바로 여래가 보이는 거예요.

그 여래가 바로 지신이요. 그것이 바로 공적사요, 그것이 바로 열반신이다.

 

형상이 아님을 볼 때 바로 여래를 본다.

보면 본다.

그럼 과학은 형상으로 보는 거예요.

유상으로 보던지, 무상으로 보던지.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그래요.

무다, 없을 무.

무라고 하면 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러면 있는 거예요.

공이라고 해도 있는 거예요.

공일 수 있는 것은 뭐가 있어야 공일 수 있죠.

벌써 있다면 그것은 공이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공이냐?

상이 상이 아님을 볼 때, 그것이 공을 보는 거예요.

상을 떠나서 무상을 찾으면 그것은 벌써 상이에요.

이것이 불교예요.

 

그래서 왜 여래를 못 보는가?

상을 상으로만 보니까 여래는 못 보는 거예요.

상이 무상임을 봐야 하는데.

 

그래서 약견 제상이 비상이면 즉견여래니라.

그것참 대단한 소리예요.

매일 파도만 보니까 물을 못 봐요.

파도가 파도가 아님을 보면 바로 물을 보거든.

그러니까 보면 본다.

파도가 파도가 아님을 보면 바로 물을 본다,

이것이 불교예요. 그래서 보면 본다.

 

제상 빼고, 약간 비상이면 즉견여래다.

약견비상이면 즉견여래다,

우리가 상 없는 건 없으니까. 유상이든, 무상이든.

상 없는 것 없으니까 상이 상이 아닌 줄만 보면 바로 여래를 보는 것이다. 이 말이죠.

상이 아닌 걸 떠나서 따로 부처가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이에요.

이게 불교에요.

 

어떤 분이 십 년 동안 아미타불을 부르고 정근을 했어요.

그런데 십년 후에 본인이 아미타불이 됐어요.

이것이 와전이 돼서 10년 공부에 도로 아미타불이다,

이것이 굉장히 좋은 얘기인데, 굉장히 나쁜 말로 와전이 됐다, 이 말입니다.

 

같은 물이라도 소가 먹어야 우유가 되지

소가 안 먹으면 우유가 안 돼요.

부처님 법이 그런 것입니다.

 

불교 잘 믿으면 지옥고를 면하고

천상낙을 받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바로 생사 해탈에서 열반낙을 얻게 된다.

열반낙, 그것을 본락이라고 해요. 본락, 근본락.

 

속락이 있고 본락이 있는데

속락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낙이에요.

금전을 돈을 모았을 때 낙, 사람을 얻었을 때 낙.

사람도 왔다가 가요. 세속적인 락

금전도 왔다가 가, 그것이 속락이에요.

 

그런데 근본 본, 본락은

한번 얻으면 영원히 얻는 거예요.

이익도 속리가 있고 본리가 있어요.

세속적인 이익이 왔다 가는 거예요.

 

그러니 본리, 본래의 이익이 있는데,

그것이 열반의 이익이에요. 깨달음의 이익이예요.

 

그런데 깨달음의 이익을 어떻게 얻었느냐?

10년 동안 부지런히 아미타불을 생각했어요.

10년 동안 아미타불을 불렀어요.

 

그런데 뜻밖에 의외로, 내가 도리어 아미타불이다.

이게 도로아미타불이라는 건데

이것이 중생이 바로 털끝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성불한 도리인데,

이것을 애는 많이 썼는데 소득이 없는 것을 도로아미타불이라고 이렇게 쓴단 말이에요.

의외로, 뜻밖에 내가 도리어 아미타불이다. 이 말이예요.

 

약견비상 즉견불이니

만약 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는 보는 것이니

여시여시 상설법이라,

이와 같이 항상 법을 설하고 있다.

이 부처님 법문이에요.

 

오늘은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