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누구는 편한 삶을 살고 누구는 힘든 삶을 살까요?
불공평하지 않나요?
왜 삶은 고통이 되어야 했나
불공평한 삶
전생과 현생
저 역시 살면서 계속적인 괴로움을 겪어왔기에
어렸을 때부터 “내 삶은 왜 이럴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많이 했었는데요
이 영상을 보시는 분들이라면
삶이 주는 괴로움이 무엇인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대체 왜 그런 삶을 살아야 했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
이 현실은 여러분으로부터 창조됐습니다.
그런 괴롭고 어렵고 힌든 삶 역시 여러부이 창조했죠.
이 현실에 우연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어쩌다가 그렇게 랜덤하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현실 체험은 퍼즐 맞추기 게임과 비슷합니다.
퍼즐 조각이 흩어져 있을 때는 막막해 보이지만
퍼즐을 맞춰 나가면서, 왜 이 퍼즐 게임을 해야 했는지를 알게 되죠.
우리가 당장 코앞만 보면 삶이 불공평하게 주어진 듯 보이지만
한 발짝 물러나서 보면
애초에 내가 이런 삶을 체험을 하기로 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현실 게임 개발자로서 바로 여러분 자체가 그 인생 게임을 선택했습니다.
근데, 어차피 게임을 하는 거 난이도를 좀 쉽게 하지 왜 굳이 어렵게 해 놨을까요?
그 이유를 작은 그림에서 큰 그림으로 보겠습니다.
--현실이 괴로워진 이유
일단 현실이 왜 괴로워졌는지를 보겠습니다.
이 현실은 우리의 마음(무의식)이 투사되어 나타난 것
여러분의 현실이 두렵게 창조되어 있다면
무의식 차원에 두려움이 많이 저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표면 의식 = 지상층
무의식 = 지하실
억압된 감정 = 지하실 속 쓰레기
*이해를 비유*
현실에 쓰레기(두려운 현실)가 많이 창조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지하실에 쓰레기(억압된 두려움)가 많은 것
/에고가 두려워하는 어떤 것이란 사실 실체가 없습니다.
그저 감정입니다/
실제로 여러분의 에고가 어떤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순간을 잘 관찰해보면
현실의 어떤 것 자체가 괴로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을 나쁜 것이라 인식하기에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게 되고
그 감정을 느끼는 상태에 있을 때 괴로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쉬운 예를 들어보면
예) 에고는 돈이 없는 현실 -> 나를 괴롭게 한다고 생각
하지만 사실은 돈이 없는 것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돈이 없는 것을 나쁘다고 인식하여 올라오게 되는
걱정, 열등감, 수치심, 절망감 등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상태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나 더 예를 들어
예) A씨의 지하실에는 쓰레기양이 많고
B씨의 지하실에는 쓰레기 양이 적은 경우
A와 B가 또같이 100만원의 재산을 갖고 있는 경우 현실이 어떻게 나타날까요?
A는 “아 고작 100만 원으로 어떻게 사냐.. 막막하다, 힘들다”라고 결핍을 느끼게 되고
B는 “우와! 나에게 100만 원이나 있어 뿌듯해!”라고 풍요를 느끼게 되죠.
이로써 A는 고통스러운 삶을, B는 편안한 삶을 살 게 됩니다.
같은 조건이 주어졌지만, 무의식(관념)에 의해 현실이 다르게 인식되기에
A와 B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 게 되는 것
즉, 삶이 괴롭다고 느껴진다면
실제로 현실의 어떤 것이 나를 괴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나쁜 것으로 인식하여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고
이때 에고는 괴로움을 체험하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삶을 살면서 괴로움을 체험하는 정도와 무의식 차원에 억압된 두려움의 양은 비례
삶이 유독 괴롭다는 것은
현실에 두려운 감정을 일으키는 일이 창조되어 있다는 것이고
즉, 무의식 차원에 그럼 감정을 느끼게 하는 원인인 억압된 감정의 양이 많다는 것
지하실(무의식)에 쓰레기(두려움)가 많이 쌓여 있기 때문에
지상층(표면의식)에 썩은 냄새(감정)를 자꾸 일으키는 것
--두려움 부자가 되는 과정
그럼 대체 왜 A는 B보다 무의식 차원에 억압된 감정(두려움)을 많이 갖게 된 것일까요?
쉬운 이해를 위해
인간이 갖게 되는 가장 큰 두려움인 ‘버림받는 두려움’을 예로 들겠습니다.
무의식에 버림받는 두려움이 억압되어있는 사람은
살면서 버림받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버림받는 체험이란
무시당하고, 소외당하고, 미움받고, 피해받고, 비난받고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체험 등을 말합니다.
무의식에 두려움이 많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반복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억압했다는 것
감정을 억압해 왔던 이유는
어린 시절 부모(양육자)와의 관계에서
부모에게 자신의 감정을 반복적으로 무시 거부당했기 때문
더 자세하게 보면 무의식은 이미 태아 때부터 형성되는데
부모가 임신 당시 아이가 생긴 것을 기뻐하지 않거나
임신 상태에서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거나 힘들어하는 경우
아이는 태아 때부터 무의식에 버림받는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감정을 무시당하는 체험이 시작되죠.
또한 개인의 무의식은 태아 때부터 어린 시절에 거의 다 형성이 되는데
이때 아이의 부모나 가족(조상)이 해소하지 못한 두려움이
아이의 무의식에 그대로 흡수됩니다.
부모가 자신의 무의식에 열등감을 억압해 놨다면
부모가 아이를 절대 열등하게 키우지 않으려고 해도
아이는 부모의 열등감을 그대로 받기에 결국 열등한 아이가 되죠.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왜 어렸을 때 이런 무의식을 갖게 되냐면
전생에 해결하지 못한 쓰레기를 가지고 다음 체험을 시작하기 때문
예를 들어, 전생에 무시당하는 두려움을 해소하지 못하고 죽은 의식은
후생에도 자신의 감정을 받아주지 않는 부모를 창조해서 태어나고
살면서 무시당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지하실 내용물은 껍데기가 바뀐다 해도 똑같거든요.
옷을 이것저것 바꿔 입어도 내 몸은 똑같은 것과 같습니다.
좀 더 큰 그림으로 보면
조상 때부터 해소하지 못한 집단 차원의 두려움은
현 껍데기(에고)의 무의식에도 이어져 나타나게 됩니다.
즉, 여러분이 현생에서 해소하지 못한 감정은
여러분 후손의 껍데기(에고)를 통해 그대로 체험됩니다.
예를 들어, 피해 의식(피해받는 두려움)을 해소하지 못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이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피해 의식을 갖게 되고(피해받는 체험을 하게 됨)
이 아이가 커서 부모가 되는 경우
그 자손도 역시 피해 의식을 갖게 되죠.(자손도 피해받는 체험을 하게 됨)
세대를 거치며 껍데기는 달라지지만
같은 내용물이 계속 이어지는 것
더 큰 그림으로 보면
온 인류가 인류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쌓아온 두려움
엄밀히 따지면 인류가 시작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의식을 통틀어 가졌던 두려움이
현재까지 이어져 온 것입니다.
인류가 여러 가지 체험을 통해 해소하지 못했던 감정을
여러분들이 고스란히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인간 껍데기로서 현실에 나타나려면
전생의 무의식, 조상의 무의식, 인류의 무의식,
인류가 아닌 것(인간이 아닌 것)의 무의식 등 여러 가지 의식이 섞여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 물방울들이 섞여 그릇에 담겨지듯이.
온 인류의 무의식은 곧 여러분의 무의식으로
모든 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전체의식의 뿌리는 하나로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어쨌든 이제야 영상의 본론으로 들어와서
그럼 대체 왜 우리는 굳이 무의식에 그런 두려움을 쌓아오면서
고통을 체험해야 했을까요?
--고통을 체험하는 이유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
무슨 말이냐면, 이 세계(현실)는 상대계죠.
이 세상에 어떤 것이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즉, 현실이 나타날 수 있으려면
무조건 상대적인 상태가 존재해야 합니다.
깨끗함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더러움을 체험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랑을 사랑이다’라고 할 수 있으려면
사랑이 아닌 것이 필요했습니다.
여러분의 본질, 즉 참나의 기본값은 사랑입니다.
이 우주는 사랑으로서만 존재하며
현실에 나타나 있는 모든 것들은 사랑 그 자체죠.
근데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참나 자체는 인식하지도 인식되지도 않는 것이죠.
우리가 근원 자체로서 있을 때는 아무 인식도 체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영화 상영이 없는 상태
컴퓨터 모니터가 꺼진 상태와 다름 없죠.
그렇기 때문에 기본값이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사랑으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평화로움을 평화롭다고 인식하지 못하고
순수함을 순수하다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인식이 없는 상태
인식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면, 예를 들어서
인간과 뽀리라는 강아지와 코코라는 강아지 이렇게 셋이 있다고 해볼게요.
인간이 뽀리라는 강아지를 볼 때
인간은 “뽀리가 너무 귀여워!”라고 인식하죠.
하지만 이때 강아지 코코가 강아지 뽀리를 본다면
뽀리를 귀엽다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코코의 현실에는 그냥 어떤 생명체가 있을 뿐
귀여운 강아지란 존재하지 않죠.
코코가 귀여움을 인식할 수 있으려면
코코는 귀여움의 반대의 것(못난, 징그러운 등)에 대해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나를 나로서, 사랑을 사랑으로 체험하고자
내가 아닌 것, 즉 사랑이 아닌 것에 대한 체험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사랑이 아닌 것
분별하는 것이죠.
나와 너를 나누고, 미워하고, 싫어하고, 배척하고, 버리고, 싸우고
이것은 옳고 저것은 잘못됐다고 분별할 때
우리는 두려움을 체험하게 됩니다.
두려움 <-> 사랑
--사랑
분별하지 않는 것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어떤 상태든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허용, 포용하는 것
내가 돌멩이를 바라볼 때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듯
내가 그토록 미워했던 어떤 것을 더 이상 분별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사랑을 인식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두려움을 통한 상대적 인식
즉, 여러분의 삶이 고통이 되어야 했던 이유는
애초에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 <-> 두려움을 체험해야 했던 것
좀 더 쉽게 설명을 해볼게요.
우리가 현실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현실이 나타나는 것을 같능케 하는 마음이란 것이 필요한데
마음을 건물로 비유하면
애초에 이 마음 건물 지상층 지하실 전체가 사랑으로 꽉꽉 채워져 있었죠.
사랑이 꽉 차 있으면 현실 역시도 사랑이 가득한 채로 나타나겠죠.
여러분이 현재 인간 체험을 하고 있다는 것은
고차원에서 저차원으로 차원 하강을 해왔다는 것인데
이 우주가 탄생하고 시작되었던 여러분들의 초창기 체험은 사랑으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가득한 현실을 체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왜? 반대되는 상태가 없었으니까.
사랑을 인식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쉽게 설명하면
동물들은 거의 참나 상태로 있습니다.
넓은 초원에서 풀 뜯는 소는 자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이 없죠.
즉, 에고가 굉장히 작기에 거의 참나 상태로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소는 마음(무의식)이 텅 비어 있습니다.
즉, 소가 가진 지하실에는 쓰레기(억압된 두려움)가 없죠.
그렇기에 소의 현실은 괴롭지 않습니다.
소??) “풀을 남한테 빼앗기기 전에 더 많이 확보해 놔야 할 텐데?”
소??) “내가 쟤보다 더 멋져 보여야 할 텐데, ”그래야 인정 받을 텐데
소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죠.
버림받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
소의 현실은 사랑으로 가득하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소는 고통을 체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사랑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소는 “우와, 이런 것이 바로 사랑이구나.
이 세상이 존재함이 정말 경이롭고, 감사해”라는 체험을 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랑을 사랑으로 인식하기 위해서
사랑이 아닌 것을 현실에 나타나게 해야 했습니다.
즉, 건물 안이 사랑으로만 꽉 차 있을 때는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지하실에 일부러 쓰레기를 채우기 시작했던 것이죠.
여기에서 쓰레기는 억압된 감정 즉, 두려움입니다.
일부러 두려움을 체험함으로써
두려움이 아닌 것(사랑)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 했던 것이죠.
--사랑을 인식하는 과정
에고가 가진 두려움은 마주하고 느끼면 해소됩니다.
감정은 느껴주면 무의식에서 사라집니다.
예를 들면, 무시당하는(상처받는) 또는 무시하는(상처주는) 체험을 하고
그 두려운 감정을 가만히 느껴주게 되면 지하실 속 쓰레기는 청소됩니다.
그 고통스러웠던 마음이 벗겨지면 저절로 사랑을 체험하게 되죠.
무시하는 사람 무시 받는 사람 그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죠.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존재 자체로 그저 감사하고
길바닥의 풀, 돌멩이, 스치는 바람 등등 아주 사소한 것에서
우리가 악이라고 일컫는 것들까지
그 자체로 실은 잘못된 것 하나 없이 완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제야 우리는
모든 것이 원래부터 그 자체로 사랑이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고통 정도에 따른 상대적 체험
인식은 상대적일 때만 가능해지기 때문에
우리는 쓰레기를 없앤 만큼만 사랑을 사랑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쓰레기(두려움)을 10만큼 벗겨내면 10만큼의 사랑을
쓰레기를 100만큼 벗겨내면 100만큼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게 되죠.
우리가 약간만 차가움을 체험한다면 <-> 약간만 뜨거움을 인식
엄청나게 차가움을 체험한다면 <-> 엄청나게 뜨거움을 인식
마찬가지로 쓰레기를 지하실 1층만큼만 가진 사람은 삶이 약간만 괴롭겠죠.
하지만 사랑 역시도 1층만큼밖에 체험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쓰레기(두려움)를 지하실 10층까지 가진 사람은 삶이 괴롭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사랑을 지하실 10층만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체험되는 두려움의 양과 체험되는 사랑의 양은 정확히 같죠(비례)
그렇기에 여러분은 윤회를 거듭하면서 지하실을 계속 확장해 나갔던 거죠.
체험을 반복하면 두려움 쓰레기를 자꾸 늘려나감으로써(두려움 부자)
결국 더 큰 사랑을 체험하고자 했던 것
이를 쉽게 표현하면, 작은 그림에서 보면
현 에고는 전생에서 해소하지 못한 두려움을 갖고 태어난 것이 맞지만
큰 그림에서 보면
그런 전생의 의식을 갖고 태어나야만 또는 그런 부모(조상) 밑에서 태어나야만
사랑에 대한 체험이 가능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죠.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인생 영화 제작자)
“이번 물질 체험 때 사랑을 1000만큼 체험하려면 두려움을 1000만큼 체험해야겠네.
이번에 체험하는 에고의 무의식(지하실)에 어떤 두려움을 넣어볼까
버리고 버림받았던 수많은 전생 무의식이랑
A집단이 전쟁을 통해 가져왔던 피해 의식, 가해 의식 등을 주된 조미료로 써야겠다“
이런 식으로 과거에 있어왔던 그 두려움을 현 에고가 그대로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피해받는(상처받는) 체험은 <-> 사랑받는 체험을 가능케 하고
가해하는(상처주는) 체험은 <-> 사랑을 주는 체험을 가능케 합니다.
완벽한 요리를 하기 위해
소금, 후추, 설탕 등의 여러 가지 조미료(의식)를 넣는 것과 비슷하죠.
--사랑을 체험하는 듯 보이는 사람들?
근데 이쯤에서 궁금할 만한 것 있죠?
고통이 있어야만 사랑에 대한 체험이 가능하다면
어떤 사람 살면서 별로 괴로움을 겪은 것 같지 않은데
사랑을 받는 것 같은 사람들은 대체 뭘까?
이는 세 가지 경우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체험하는 경우
첫 번째 당사자가 실제로 사랑을 체험하는 경우
이 상대계에서는 사랑 체험으로 스위치가 바뀌려면
극도의 고통을 체험해야 합니다(상처받고 상처 주는 고통)
그렇기에 이미 전생이나 현생에 고통을 심하게 받고 그 카르마를 해소해왔기에
현재 사랑을 체험하고 있는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제삼자가 보면 이런 사람의 현실은 편안해 보이지만
사실 당사자는 그 전에 심한 고통(두려움)을 겪었던 경우입니다.
2. 사랑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
둘째, 당사자가 실제로 사랑을 갖고 있지만, 사랑을 사랑으로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
즉, 제삼자가 보면 그 사람의 삶은 사랑이 있는 삶 같지만
정작 당사자는 사랑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제삼자가 보면 소의 삶은 편안해 보이지만
실제로 소는 (불편함에 대한 체험이 없기에) 이런 것이 편안함이라고 인식할 수 없다.
곧, 소의 삶에는 편안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제삼자 입장에서 보면 저 사람은 사랑을 받는 체험을 하고 잇는 듯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피해받는(상처받는) 체험이 없었다면
사랑을 받는 것에 대해서 사랑을 받는다고 인식할 수 없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강아지는 주인을 분별하지 않기에 주인에게 사랑을 주지만
강아지 자체는 가해한(상처 준) 체험이 없기에
정작 자신이 사랑을 준다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결국 강아지의 현실에는 사랑을 주는 체험이 없습니다.
3. 실제로는 고통을 체험하는 경우
셋째, 당사자의 현실에 사랑이 없는 경우
제삼자가 봤을 때 겉으로는 사랑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경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억압된 감정이 적은) 100만원을 가진 자의 현실은 풍요 천국일. 수 있지만
억압된 감정이 많은 100억을 가진 자의 현실은 결핍 폭탄 지옥일 수 있는 것이죠.
에고의 저런 사람처럼 사는 삶은 굉장히 행복할 것이라는 관념
/물질이 많은 사람은 사랑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는 관념은 완전한 착각과 망상/
저런 사람의 삶은 사실 고통이 가득할 수도 있는 것
피씨방에 가면 각자 자신의 모니터만 보고 게임을 하듯이
우리는 모두 각자 주관적인 현실을 체험할 뿐
이 우주에 객관적인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사람이 직접 되어보지 않고서는
삶이 불공평하다고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영상을 보시는 여러분들은 이미 고통에 대한 체험이 있었기에
사랑에 대한 인식이 일어났거나 일어나는 중이죠.
'마음공부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힐마인드] 돈의 흐름은 돈에 대한 관념이 좌우한다 (0) | 2022.02.17 |
---|---|
[힐마인드] 자기의 부는 기억된 습관에 의해 결정된다 (0) | 2022.02.16 |
[나탐 Natam] 내가 현실을 창조했다? 왜 굳이 이런 삶을 선택했을까? (0) | 2022.02.14 |
[힐마인드] 경제적 자유를 얻으려면 마음 상태가 중요하다 (0) | 2022.02.10 |
[힐마인드] 마음공부가 잘 되면 자동으로 영적 각성이 이루어지고 인생이 수월해집니다 (0) | 2022.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