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거에 대해서 우리 달라이라마 성안님은 이렇게 표현을 했어요.
“아무리 맛있는 반찬도 한 가지만 놔놓고 먹는 것 보다는 여러 반찬이 있는 중에 자기가 골라먹으면 훨씬 더 풍부해지고 맛도 더 난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여러 종교가 있는 가운데에서 자기가 선택해서 오히려 믿음을 가지고 정진할 때 더 영적 깊이가 깊어진다. 유일신앙이다. 이래서 한 종교만 고집하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이고 하는 것이 결코 좋은 게 아니다. 이런 말을 가볍게 편안하게 그렇게 말씀 하신적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이런 다른 종교들하고 함께 같이 있으면서 우리에게 없는 다른 모습들을 보고 본받기도 하고, 또 우리가 가진 장점들을 전해주기도 하고 이러면서 서로 발전적인 측면, 협력하기도 하지만, 또 반대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경쟁하고, 이렇게 해서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럼 부처님 당시에는 어땠을까? 부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5대 종교, 7대종교 이런 말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부처님 당시에도 육사외도, 이런 말이 있죠.
그것은 당시에 불교와 경쟁관계에 있다고 그럴까? 어쨌든 갈등관계에 있었던 그런 큰 사상가가 6개 파가 있었다. 작은 것 까지 하면 62파가 있었다. 360견해가 있었다. 이런 얘기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백가쟁명식, 그런 식이었어요.
그 이교도들 문제 때문에 그들이 또 부처님을 비방하고, 또 음해하고 이런 것 때문에 불교교단도 많은 어려움들을 겪어 나갔습니다. 오늘은 여러분들과 생활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까? 이도교도들의 수행자, 지도자 사이의 갈등이라든지 이런 문제가 아니고, 신자들 사이에 갈등 문제도 있어서 거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있을 때인데요, 당시에도 종교 간에 갈등이 있었나 봐요. 특히 어떤 한 종파는 불교에 대해서 부처님에 대해서 굉장한 경계심이 많았고, 그래서 신자들에게 많은 주의, 불교와 같이 불교인들과 사귀지 못하도록, 불교와 어떤 일도 함께 못하도록 이런 아주 강력한 지침 같은 걸 내렸놔 봐요. 그러다보니까 그 신자들은 불교인들과 가까이 안하게 됐어요.
그런데 어디든지 아이들은 그런 게 심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이교도들의 아이들과 불교신자 아이들이 함께 놀이를 하고 놀고 그러죠. 그러다 목이 말라서 기원정사에 가서 거기가 물이 있으니까 물을 먹으러 가자하는데, 이 아이들이
“오, 우리 어머니가 못 가게 했어. 거기 가까이 가면 안 돼.”
이렇게 해서 이 아이들은 기원정사에 안 들어오는 거요. 이거 이해가 됩니까?
요즘 어떤 종교에서는 초파일날 사용했던 떡 같은 거 안 먹고, 제사에 썼던 떡 같은 거 안 먹고 이런 거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부정탄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다든지, 어떤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게 물을 먹으러 안 가요.
그런데 물이라는 건 인도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물은 반드시 높은 계금이 낮은 계급에게 줄 수 있지만, 낮은 계급은 높은 계급에게 물을 줄 수가 없습니다.
낮은 계급에게 물을 받아먹으면 그것은 자기가 천해져버려요. 우리말로 하면 부정 타는 거요.
그러니까 불교는 부정한 종교다. 부정한 가르침이다. 이렇게 했기 때문에 그 부정한 집단에 가서 물을 얻어먹으면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애들이 멋도 모르고 안 들어가려는 거요. 그러면서 물을 떠오라는 거요.
“네가 가서 물 떠오너라.” 목은 마르고. 물은 먹어야 되고.
그러니까 정사 안에 와서 물을 가지러 온 사람은 불교신자 아이들만 온 거요.
그래서 물을 달라고 하는데 마침 그때 부처님이 계셨어요. 그래서 물을 먹고 그냥 안 가고 아이들이 물을 떠가려고 하는 거요.
“왜 물을 떠가려고 하느냐?” 친구들이 밖에 있다는 거요.
“그럼 친구들이 들어와서 먹어라.” 하니까
“걔들은 여기 안 들어오려고 그럽니다.”
“왜 그러냐?”
“걔들은 다른 종교를 믿는데 부모가 절대로 정사에 못 가게 해서 여기 못 들어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가서 아이들을 오라 그래라. 이렇게 해서 가서 “들어와도 돼. 와. 와.” 이렇게 데리고 들어왔어. 아이들이니까 아마도 가서 “우리 부처님이 너희들 초대 했어. 와.” 이러니까.
들어와서 물도 마시고 부처님 법문도 듣고 이렇게 하면서 아이들이 굉장히 기뻤어요. 아이들하고 관계되는 얘기가 조금씩은 있는데, 부처님이 아이들한테도 잘 했나 봐요. 그 계율에 관계되는 아이들에게 한 얘기 중에는 이런 게 있거든요.
어느 날 부처님께서 걸식을 가는 길에 아이들이 쭉 둘러앉아서 장난을 치고 웃고 그래요. 뭔가 하고 이렇게 보니까, 논에 게 있잖아요. 게를 잡아서 게가 다리로 집으려니까 무서워 도망가면서 가까이 가서 보고 이러면서 자기들끼리 용기 있는 아이가 게를 탁 잡고 게 다리를 하나 탁 잡아떼면 박수를 치고. 그런데 무서워서 어떤 애는 손도 못 대고. 그러니까 게 다리 떼기 장난을 하는 거요.
여러분들은 도시에 살아 이런 거 잘 모르겠지만, 저는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런 비슷한 사실은 이런 생명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게 많이 있습니다. 뭘 모르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 놓고
“얘들아, 누군가가 너희들의 팔을 비틀어서 빼버린다면 어떻겠는가?”
아이들이 인상을 쓰면서 “그럼 매우 아프죠.”
그럼 좋겠느냐? 안 좋다는 거요.
“그럼 그런 모습을 보는 너희 부모님은 어떻겠냐? 좋겠느냐?”
“아닙니다. 괴로워할 겁니다.”
“그러면 누군가가 너희에게 돌을 던져서 너희 머리가 깨지고 등이 터지고 하면 너희들이 좋겠느냐?”
“아닙니다. 너무너무 아픕니다.”
“그러면 그 모습을 너희 부모들이 보면 좋겠느냐?”
“아닙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너무너무 괴로워 할 거예요.”
이런 얘기를 하시면서
“그 게도 마찬가지다. 그 게도 너희들이 다리를 떼고, 등허리를 돌로 때리고 그러면 그 게가 얼마나 아프겠느냐. 그 게에게도 또 가족이 있다. 그러니 그 가족들도 얼마나 괴롭겠는가.”
이런 얘기를 하니까, 아이들이 듣고는 막 웃고 장난치던 게 숙연해졌단 말이오.
그래서 부처님이 생명을 갖고 장난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해쳐서는 안 된다는 그런 계율을 설명할 때, 그냥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마라.’ 이렇게 가르친 게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실 예를 들어서 자기들이 하고 있는 그 짓에 견주어서 설명을 해서 아이들이 잘못을 뉘우치게 했고, 또 그 아이들에게 바른 길을 일러주셨고, 그래서 정사에 놀러오게 해서 다른 좋은 얘기들을 해주셨단 말이오.
이런 얘기들을 해주니까 아이들도 결국은 듣고 기뻐했죠. 이 아이들이 돌아갔어. 돌아가니까 애들이 부모한테 아무 말도 안합니까? 또 합니까? 애들이라는 건 또 하잖아. 그죠? 집에 가서는 기원정사 갔다 왔는데, 부처님이 이런 말씀 해주시더라. 주는 물도 맛있고, 과일하고 떡도 맛있더라. 이렇게 얘기하니 부모가 난리가 난 거요.
아이들을 다 버렸다. 아이들이 오염이 됐다. 우린 큰일 났다는 거요. 한마디로 말하면 영혼이 마귀에 홀렸다든지, 귀신에 물들었다든지, 이렇게 난리가 난 거요. 그래서 난리를 피우니까 그때 현명한 한 재가 신자가 그들이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고 하는 걸 보면서 왜 그런가 하니까, 이런 얘기를 하는 거요.
그러면 그렇게 울고불고 할 일이 아니다. 난리를 피울 일이 아니다. 도대체 부처님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했기에 무슨 얘기를 해줬기에 너희 아이들이 그렇게 기원정사에 가지마라고 교육을 하고 타이르고 했는데도 아이들이 도리어 부처님을 좋아하고 기뻐했겠느냐. 이렇게 난리만 피울게 아니라 가서 진상을 한번 파악을 해 봐라.
부처님이 무슨 얘기를 해서 애들이 저렇게 갑자기 변했는지. 너희도 가서 한번 알아봐라. 너희가 알아보고 이걸 시비삼아야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이렇게 난리 피운다고 되겠냐. 그러니까 가만히 들어보니까 어때요? 그것도 그럴 듯 해.
그래서 그들이 부처님을 찾아가서 “우리 아이들에게 도대체 부처님이 무슨 술수를 썼기에 아이들이 저렇게 됐느냐”고. 그래서 부처님이 이 찾아온 사람에게 좋은 법문을 해 주셨단 말이오.
부처님 법문은 언제나 처음도 중간도 끝도 조리가 있고, 언제나 사실에 입각해 있고, 누가 들어도 고개가 끄덕끄덕 하고 수긍이 가는 얘기.
그래서 부처님이 늘 말씀하셨잖아요. ‘눈 있는 자 와서 보라.’
눈 있는 자는 이렇게 훤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법은 이렇게 분명한 거다. 어떻게 손에 움켜쥐고 등 뒤에 숨겨 놓은 그런 법이 아니다. 누구나 다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그런 법이다.
그들이 듣고 기뻐하며 그들이 얼마나 이제까지 왜곡된 정보, 잘못된 생각에 휩싸여 있었는가 하는 것을 깊이 깨우치고 뉘우쳤다. 그래서 불교신자가 됐다. 이런 얘기가 있어요.
그때 부처님께서 그 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못이 아닌 것을 잘못이라고 알고,
잘못된 것을 잘못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
이는 그릇된 견해를 지닌 사람들이니
다만 낮고 천한 세계에 태어날 뿐이다.
그러니까 잘못된 건 잘못된 줄 알고, 옳은 건 옳은 줄 알고, 이래야 되는데, 잘못된 것은 옳은 줄 알고, 옳은 것은 잘못된 줄 알고, 이렇게 거꾸로 알고 있다.
이것은 잘못된 견해다. 이 잘못된 견해를 갖고 살게 되면 살아서도 불행하고, 죽어서도 낮고 천한 곳에.
그 당시에는 항상 사람이 ‘어떻게 하면 죽어서 좋은 데 가는가.’ 이게 주 관심이니까, 이렇게 살게 되면 결국은 낮고 천한데. 다른 말로 하면 지옥으로 가게 된다. 지옥으로 가는 게 뭘 믿고 안 믿고 이런 게 아니라, 이렇게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될 때 고통이 생기고 지옥으로 가는 길이다.
마치 무거운 돌멩이가 물 아래로 가라앉듯이.
잘못을 잘못이라고 알고, 옳은 것을 옳은 것이라고 아는 사람들.
이는 옳은 견해를 지닌 사람들이니
다만 행복한 세계에 태어날 뿐이다.
그러니까 행복한 세계에 태어나고 고통스러운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
뭘 믿고 뭘 했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로 어떻게 하느냐?
살아있는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행복으로 가는 길이고,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죽이는 것은 고통으로 가는 길이다.
가난한 자를 보고 위로하고 돕는 것은 복된 길로 가는 길이고
남의 물건을 함부로 뺏고 훔치는 것은 고통으로 가는 길이다.
이런 구체적인 실천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아무리 어린 아이들이라도 이렇게 잘못된 교육을 받고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을 하게 되면 어른도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미운 마음이 생기기가 쉬워요.
그러데 부처님께서는 이런 행동 하는 아이들을 보고 오히려 아이들을 받아들여서 깨우쳐주고, 또 그 아이로 인연을 해서 그 부모들도 깨우쳐주는 이런 자비심과 교화의 힘을 가졌는데, 이게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제가 30대 초반 때 경주에 한 절에 포교사로 있을 때였는데, 법당에 가끔 흙이 뿌려져 있거나, 쓰레기가 던져져 있거나, 침을 뱉어 놓거나. 이런 일이 생겨요. 참 이상하다. 청소를 다 해놓고 그런데 또 이렇게 어질러져 있단 말이오. 그래서 누가 그랬나하고 잡으려고 했는데, 잘 안 잡혀요.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숨어있다 잡았는데, 한 5살짜리 정도 된 아이들이 그렇게 하는 거요. 그래서 잡아서 멱살을 딱 쥐고는
“누가 그랬냐” 하니까 대답을 안 하다가 혼내줄 거라고 그러니까 아이들이 울면서 하는 얘기가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더럽다고 그렇게 가르쳤다.”는 거요. 침을 뱉은 게 더러운 데라고.
이런 게 하나의 잘못된 가르침이다라고 볼 수 안 있겠습니까?
아무리 자기 종교에 대한 신념이 강하고, 그 좋은 것을 널리 전파시키고 싶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이렇게 가르쳐서 침을 뱉게 만들고, 쓰레기를 버리게 만든다는 것은 바른 가르침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죠.
아이들을 데리고 야단은 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아이가 뭘 압니까? 그것도 유치원 수준의 아주 어린 아이들인데.
그런데 제가 그때만 하더라도 도대체 애들을 시켜서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 나쁘다는 생각, 그리고 이런 아이들 봐도 짜증이 나는 거요. 아무리 어린 애들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그런데 나중에 부처님의 경전을 읽어보면 그렇게 한 행동이 제 자신이 좀 부끄러웠어요. 부처님 같았으면 아마 아이들을 데려다가 음료수도 주고, 과일도 주고, 떡도 주고 이렇게 해서 재미있게 해주고, 좋은 얘기도 들려주고 이렇게 해서 교화를 했을 거 아니오. 지금 이 얘기에서 보면.
그런데 저는 그렇게 못하고 아무리 아이들이라도 괘씸해서 어른이라면 야단치지, 크게 야단은 못치고, 보내놓고도 내 자신이 짜증이 나고 하는 그런 생각할 때,
“아, 우리 부처님은 이렇게 하지 않으셔구나.” 이런데서 부처님이 더 존경스럽고.
또 부처님은 이 아이들을 교화했을 뿐만 아니라, 이 아이들로 인해서 그 부모까지도 교화를 했는데, 그렇다면 이 아이들이 거꾸로 변해 갔으면 그 교회에서 이런 가르침을 준 사람마저도 도리어 찾아와서 대화를 하고 서로 교류를 하는 계기가 됐을 텐데, 그런 계기를 저는 마련을 못하고 가서 항의는 안했지만 마음속으로 “뭐 저런 인간들이 다 있나?” 이렇게 오히려 미운 마음을 냈단 말이오.
이런 걸 보면 나이가 들고,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좀 더 깊이 공부를 해 나가보면
“아, 이럴 때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런 게 잡히는 거 같아요.
그런데 젊을 때는 감정이 앞서게 되고, ‘불교를 지켜야 된다.’ 하는 이런 생각이 자꾸 앞서게 되니까, 불교를 비방하거나 해치려거나 하면 거기에 감정으로 대응하고 힘으로 대응하려고 하는 그것이 마치 불교를 옹호하는 것 같은 이런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마라. 원망을 원망으로 갚지 마라.’ 이런 얘기를 좀 더 우리 불자들이 깊이 받아들여야 되지 않을까.
상대를 비난하면서
우리도 모르게 상대의 모습을 닮아가는
이런 경우가 생기는 거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 둬라. 피해를 입고 있어라.’ 그런 거 보다
부처님께서 하신 것처럼 오히려 미워하는 데서 그칠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교화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그런 어떤 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는 아직 그렇게 까지는 못가는 거 같아요. 옛날에는 얻어맞고도 그냥 억울해하면서 참고 있다가 요즘은 대항하는 수준까지는 왔는데, 오히려 웃으면서 그들을 교화해 내는 이런 데 까지는 저희들이 아직 못가지 않았는가.
이런 데 까지 갈 때 오히려 이런 사건들이 불법의 위대함을 알리게 되고, 어느 종교가 낫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서로 다른 종교, 서로 다른 사상, 이런 사람들을 어우르는 그런 역할을 한다.
여기서 우리가 부처님이 이교도를 불교로 개종시켰다. 이게 핵심이 아니고
비난하는 사람들마저도 수용을 하시고, 깨우쳐주시고 해서 화합하는 그런 어떤 사회를 만들어나가셨다. 오히려 이런 관점에서 더 이것을 살펴야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해보면 이번 초파일에도 교회에서도 부처님오신날을 환영하고,
크리스마스 때 절에서도 예수님 오신 것을 환영하고,
또 함께 행사 같은 것도 치르고 하는 것은
우리가 점점 더 성숙해 가는 모습의 일환이 아니겠는가.
이런 단순한 외적 교류를 넘어서서
우리들 마음속에 우리들을 비난하는 사람들마저도
우리가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힘을 키워나갈 때
우리가 부처님 법에 귀의했다. 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물론 제 얘기를 들으면서 ‘너무 낭만적이다. 아니하다.’ 이렇게 비판하실 분도 계시겠지마는, 어쨌든 경전 속에서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살펴볼 때는 바로 이러한 자비심을 갖도록 가르치고 있다.
내가 그렇게 안 되는 현실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가야할 곳은 그런 곳이다. 이런 것을 우리가 지표로 삼아서 정진을 해나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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