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2)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제258회 부처님의 가르침

Buddhastudy 2012. 10. 19.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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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현대 사회는 너무 복잡하다.” 그래서 제가 말했어요. “사회가 복잡한 게 아니라 네 머리가 복잡하다.”^^ 세상은 늘 이렇습니다. 세상은. 으음. 그러니까 복잡하다. 이건 뭘 말하느냐? 내가 이해가 안 된다. 이해가 안 되면 뭐하게 느껴집니까? 복잡하게 느껴지고, 이해가 되면 덜 복잡해지는 거요. 그럼 왜 현대사회가 복잡하다고 사람들이 느끼는가? 우리가 사회를 이해하는 틀이 있지 않습니까? 그죠?

 

그 사회를 이해하는 틀, 이런 틀로 세상을 이해했는데 세상이 바뀌어 버렸어요. 이런 틀로는 세상이 이해가 안 되는 거요. 그러니까 세상이 복잡한 것처럼 느껴지는 거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세상을 이해하는 틀을 빨리 바꾸어야 되요. 그러니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봐야 되는데, 내 틀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이런 빠른 변화가 있을 때는 세상을 이해하기가 힘들어지고, 세상을 이해하기가 힘들어지면 세상이 복잡하다. 이런 말을 하게 되죠.

 

~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이라는 거는 본래 단독자, 개별존재의 집합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홉스가 이야기한 대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도 아니고. , 아트만이라고 하는 個我개아들의 집합도 아니다. 이 세계는 연기의 세계다. 그러니까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것이 물질적인 존재든, 그것이 생물학적인 존재든, 그것이 정신적인 존재든, 모든 것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비유를 들면 마치 집단이 이렇게 서 있을 때, 서로 의지해서 서 있듯이 서로 의지되어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어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지고 이것이 생기면 저것도 생긴다. 이렇게 네 구절로 설명을 했거든요. 오늘날 세계가 바로 연기적 세계. 이런 관점에서 세계를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어쩌면 그 연관이 오늘 세계는 좀 더 분명해졌다. 이렇게 볼 수가 있죠. 옛날 같으면 우리가 어떤 물질을 이해할 때, 물 하면 물이라고 하는 것은 고유한 물의 단독자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물을 분석해보면 어떻습니까?

 

물은 물이라고 하는 처음부터의 어떤 단독자가 있는 게 아니라 산소와 수소의 결합이다. 이것도 연관이지 않습니까? 그죠? 그러면 산소와 수소는 단독자. 개별적 존재냐? 그런데 소립자의 단계. 더 적은 구조 안에 들어가서 보면 그것은 소립자의 결합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양성자 중성자 중간자 전자 이런 것들의 결합의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물질세계도 연기입니다. 우주도 그렇고 미시의 세계도 그렇고. 우리 생물의 세계도 마찬가지요.

 

사람이라는 게 한 덩어리 같지만 실제로는 수십조 개의 뭐로? 세포로 연관되어 있고, 그 세포는 다시 들어가 보면 물질의 고도한 결합구조를 가지고 있죠. 소위 유전자의 어떤 그런 정교한 설계도에 의해서 우리가 이렇게 형성돼 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있다. 이런 얘기죠. 그래서 이것을 주로 불교용어로 말해서 제망, 제석천의 그물이다. 이걸 인도말로 인드라의 그물이다. 인드라망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러니까 수평적으로 수직적으로만 연관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 속에 전부가 들어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일미진중함시방,

 

하나의 티끌 가운데 이 우주가 다 들어있다. 하는 하나 속에 일체가 들어있고, 또 하나하나가 모여서 일체를 이룬다고 하는 이런 중중첩첩 무진연기다. 이렇게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의 영역에 해당되는 이런 철학과 사상이, 종교의 영역이 철학과 사상의 영역과 구분되지 않고, 종교의 영역이 과학과도 구분되지 않는 이런 세계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이건 종교의 영역이다. 이거는 사회의 영역이다. 이것은 과학의 영역이다. 이렇게 나눌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라는 것도 일종의 정신과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원리. 오늘 여러분과 저하고 얘기하는 것은 주로 마음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느냐? 이걸 갖고 논하는 정신과학에 대한 얘기에요. 우리가 의사가 환자 병을 치료하는 것은 생명과학. 생명이 어떤 원리로 작용하느냐에 따라서 고장 난 게 있으면 치료를 하죠. 그다음에 자연과학이라는 것은 이 물질세계를 물질세계의 작용 원리를 연구하는 게 자연과학 아닙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늘날 과학이라면 자연과학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의 이 작용 원리를 연구하면 자연과학이 되는 거고. 그런 데서 허황한 얘기를 하는 게 종교가 아니고, 소위 정신적인 작용의 원리를 연구하고 그에 맞게 괴로움을, 괴로움이라는 게 정신적인 질병에 속하거든요. 그 괴로움을 정신적인 질병을 치유하는 게 일종의 정신과학, 즉 종교다. 불교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어디든지 사이비가 끼듯이. 그런데 비과학적 요소들이 여기에 끼니까 종교가 허황된 얘기를 하는 거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이런 말씀을 기본적으로 드리면서, 결국은 제가 여러분과 이렇게 얘기하는 게 야단법석이오. 그러니까 아무나 질문하고, 자기 하고 싶은 얘기하고, 뭐든지 묻고, 이게 오늘날 기계화되어있는 게 뭐겠어요? SNS 아니겠어요? 그죠? 누구든지 자기 생각을 어때요? 올리고. 거기에 대해서 대응할 사람은 아무라도 대응할 수가 있고, 그런데 거긴 조금 문제가 되는 게, 좀 무질서한 거 같아. 욕설을 하는 거 같아. 그죠?

 

자기의 의견을 내고 상대편 의견도 존중해야 되는데. 존중한다는 건 딴 거 아니에요. 받든다는 뜻이 아니라 나와 다른 상대의 의견을 인정하는 거요. 그런데 자기하고 생각이 다르면 욕부터 먼저 해요. 이런 것은 좀 개선이 됐으면 좋겠다. 얼굴을 안 본다고 함부로 얘기하는 요런 것만 개선이 되면 좋겠다. 그러나 좋은 점도 있는 거 같아요. 솔직하게 얘기한다는 점에선 좀 좋은 점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얼굴을 보면 이렇게 표정관리를 해서 자꾸 속을 숨기고 얘기하는데 거기서는 솔직하게 얘기한다는 장점은 있는데 그 솔직한 게 지나쳐서 욕설이 너무 난무한다. 비판을 하는 게 아니라 비난을 한다. 힐난을 한다. 이건 개선되어야 될 점이고. 우리가 만나서 얘기할 때의 단점이 있어요. 좋은 점도 있지만, 단점은 솔직하지 못하다. 자꾸 숨긴다. 그래서 본질을 꿰뚫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지금 학생이 질문한 데로 SNS 같은 건 21세기. 새로운 야단법석이다. 이렇게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저도 여러분과 만나는 게 현대판 야단법석이오. 부처님은 원래 법회를 이렇게 떡 앉아가지고 아무것도 묻지도 않는데 혼자 그냥 얘기하고 이런 게 없었습니다. 부처님의 모든 법문은 대기설법이라 그래요. 대중이 묻는 것에 따라 대답한다. 물으면 대답한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대기설법의 장점은 이런 게 있어요. 여러분들 우리나라 지도에서 서울 하면 어딘지 기억하세요? 대충 그림이 그려져요? 서울이 어디 있는지? . 인천사람이 부처님께 물었어요. “서울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 뭐라고 대답할까? 인천?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동쪽으로 가시오.” 이러겠죠.

 

그런데 춘천사람이 물었어요. “서울 가려면 어디로 가야 됩니까?” 그럼 어디로 가라고 얘기할까? “서쪽으로 가세요.” 이래야 돼. 수원사람이 물었어요. “서울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면, “북쪽으로 가세요.” 이래야 되겠죠. 그런데 그 사람 묻는 사람의 위치를 무시하고 그냥 언어만 갖고 한 번 봅시다. A라는 사람이 물었어. 뭐라고? "서울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 하니까 "동쪽으로 가시오." B라는 사람이 물었어. "서울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 하니까 "서쪽으로 가시오." C라는 사람이 물었어. "서울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 "북쪽으로 가세요." 헷갈리잖아요.

 

동쪽이면 동쪽이지 서쪽이면 서쪽이지. 무슨 한번은 동이라 그러고 한번은 서라고 그러고. 다 복잡하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마는, 첫 번째 사람이 인천사람이기 때문에 동쪽이 정확한 대답이죠. 두 번째 사람이 춘천사람이기 때문에 정확한 방향을 제시했죠. 세 번째 사람이 수원사람이기 때문에 정확한 방향을 제시한 거요. 오늘날 성경이나 불경의 문제점은 인천사람이다. 춘천사람이다. 수원사람이라는 걸 빼버리고, 그냥 서울 가려면 동쪽으로 가야 된다. 아니야 서쪽으로 가야 된다. 해서 갈등을 일으켜요.

 

그 사람이 어디에 사는 사람이냐만 안다면 이건 갈등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동쪽도 맞고 서쪽도 맞고 북쪽도 맞는데, 그냥 동쪽도 맞고 서쪽도 맞고 북쪽도 맞는 게 아니다. 그래서 금강경에 만약에 서울 가는 길을 어느 위치에 사는 게 없는 사람이. 즉 구체성이 없는 사람이 서울 가는 길을 물었다. 그러면 서울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 이렇게 대답하는 거요. 그걸 무유정법이라 그래. 한문으로. 서울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 정해져 있지 않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서울 가는 길은 없다는 뜻이에요? 아니에요.

 

정해져 있지 않으니까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뜻이에요? 그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인연에 따라. 그가 어느 위치라는 것이 정해지면 정해지는 거요. 인연을 따라 정해지는 거요. 서울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지마는 그 위치에 따라 정해진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똑같이 남편이 술을 먹습니다. 이렇게 얘기해도 그 상태가 어떠냐에 따라서 술 먹는 거 그냥 두세요. 이런 대답이 나올 수도 있고 말리세요. 이런 대답이 나올 수도 있다. 이런 얘기요. 으음.

 

예를 든다면 어떤 남자하고 내가 결혼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인연을 따라서 하세요.” 할 수도 있고 그만두세요.” 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배 아프다고 찾아왔는데 음식을 못 먹어서 배 아프면 뭐라고 해야 합니까? “밥 먹으세요.” 이래야 되고. 밥을 너무 먹어 배 아프면 굶으세요.” 이렇게 얘기가 된다는 거요. 으음. 그런데 우리가 이런 조건을 무시하고 절대화시키기 때문에, 언어를 절대화시키기 때문에, 이건 상을 짓는다. 그래요. 언어를 절대화시키기 때문에 관념주의에 빠진다.

 

오늘날 종교의 대부분이 종교가 관념주의에 빠져있어요. 그래서 종교끼리 싸우고, 종교 안에 교파끼리 싸우고, 같은 성경을 두고도 해석을 달리하고 이런 거는 왜 그러냐? 바로 역사성, 현실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그렇다. 살아있는 언어가 아니고 그냥 관념 속에 있는 언어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얘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