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혼자 하는 게 익숙하고 편안해서 혼자 할 때가 많았고
하지만 남들의 모습을 부러워하며 열등의식도 많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일 욕심도 많고 뭘 하면 똑 부러지게 해야 된다는 생각에
무리해서 일을 하는데 저는 만족을 못 했습니다
주위의 반응은 열심히 한다 잘 한다 착하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며
저 나름대로 양심적으로 일해야 한다는 강박증으로 항상 마음에 여유도 없이 일을 합니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도 많은 편이며 남의 눈을 의식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이제 즉문즉설을 들으며 저의 예전과 다르게 착하다는 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저를 놓고
남에 의한 인생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하나하나 배우며 해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그동안 저를 높게 본다는 생각을 못 했는데 유투브(즉문즉설)를 보면서
제가 저의 능력보다 높게 보면서 저 자신을 괴롭혔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위치에서 저를 보면서 사랑하고 만족하는 마음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업식이 너무 오랫동안 살아서 저의 약점을 보일 때는 의식을 많이 해서
머리도 잘 안 돌아가고 멘붕상태가 옵니다
앞으로 어떤 수행을 하면 상대에게 나의 실수를 감추지 않고 보여줄 수 있는
편안한 사이가 될 수 있는지 질문드립니다//
목탁을 치면 목탁소리가 나요? 종소리가 나요?
그런데 종을 때리면서 목탁소리가 나길 원하면 나요? 안 나요?
목탁을 때리면서 종소리 나기를 원하면?
그럼 목탁보고 ‘너 왜 종소리도 못내나?’ 이러면 잘못된 목탁이에요?
종을 때리면서 ‘너 왜 목탁소리도 못내노?’ 이러면 잘못된 종이에요?
그러니까 종은 종소리를 내고
목탁은 목탁소리를 내는 거요.
이게 자연스러움이에요.
내가 물은 질문은 딴 건데 왜 얘기를 하느냐? 이런 생각을 하죠.
자, 여기 3개의 물건이 있어요.
이 컵은 물병보다 커요? 작아요?
뚜껑보다는? 물병보다는? 뚜껑보다는?
그럼 이 컵은 커요? 작아요?
그럼 이 컵이 크다, 작다하는 것은
이 컵에 있어요? 내 인식에 있어요?
이 컵 자체는?
이 컵은 크다, 이 컵은 작다. 이렇게 할 때
컵이 작기 때문에 내가 작다고 인식을 했다.
컵이 크기 때문에 내가 크다고 인식 했다.
우린 지금 이렇게 착각하고 있다.
이 존재를 내가 객관적으로 사실대로 내가 알았다. 인식을 했다.
이렇게 지금 착각하고 있다.
우리는 존재를 사실대로 인식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러냐?
이 존재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고
무거운 것도 아니고 가벼운 것도 아니고
새것도 아니고 헌 것도 아니고
비싼 것도 아니고 싼 것도 아니고,
그냥 그것일 뿐이에요.
그런데 이것이 내가 인식을 할 때
인식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인식을 하는 거요.
인식을 할 때 그때의 조건,
즉 인연, 그 상황에 따라서
이게 작다고 인식이 될 때도 있고, 크다고 인식이 될 때도 있고,
물 컵이라고 인식이 될 때도 있고, 커피 잔이라고 인식이 될 때도 있고,
이게 물 컵이라고 하지만 물 컵이라는 객관성은 없어요.
그냥 한 물건일 뿐인데,
물 담으면 물 컵이라고 불리고(=인식이 되고),
커피 담으면 커피 잔이라고 불리고,
애 오줌 받으면 애 요강이라고 불리는 거요.
우리의 큰 착각은 인식, 정신작용이죠.
이 인식을 객관화시킨다는 거요.
인식이라는 건 주관이에요.
주관을 객관화 시킨 게 큰 착각이죠.
그러니까 내가 남편을 나쁜 사람이라고 인식을 하는 거지,
남편이 나쁜 사람이 아니다. 이거야.
내가 김정은이를 나쁜 사람이라고 인식을 하는 거지,
김정은이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거요.
객관의 존재는, 실제의 존재는
그 무엇도 아니에요.
없다가 아니라 그 무엇도 아니다.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고
옳은 것도 아니고 그런 것도 아니고
맞는 것도 아니고 틀린 것도 아니고
새것도 아니고 헌것도 아니고,
다만 그것,
이것을 굳이 표현한다면
그대로 진실이다.
이 것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에요
이것은 새것도 아니고 헌것도 아니고
비싼 것도 아니고 싼 것도 아니고
성스러운 것도 아니고 천한 것도 아니에요.
그냥 그것이에요.
그것을 우리가 인식을 할 때,
크다고 인식하든 작다고 인식하든
무겁다고 인식하든 가볍다고 인식을 하든
성스럽다고 인식을 하든 부정하다고 인식을 하든
인식을 하는 거예요.
자기는 이 컵인데,
물병하고 같이 있다가 보니까,
자기는 작다는 인식을 오래하다 보니까
여기서 착각을 일으킨 거요.
‘난 작은 존재다.’
이렇게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 거요.
인식상의 오류에요.
그러니까 자기는 열등의식을 갖는 거요.
이 존재는 열등한 게 아니에요.
다만 그것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이거하고 비교할 때 엄마가 언니하고 비교해
‘너 공부 못한다’ 하고 인식이 되든지,
달리기 잘하는 사람하고 비교하니 ‘넌 달리기 못한다’고 인식이 되든지,
키 큰 사람에 비해서 키 작다고 인식이 되든지,
이렇게 인식이 되어서 그 인식이 자기를 지금 규정하고 있는 거요.
이 존재는 그냥 그것일 뿐인데
내가 생각하는 나는 작은 존재가 되었다. 이 말이오.
그럼 인식상의 오류 된 인식을 버려야지
이 존재를, 컵을 어떻게 하려고 하면 안 된다.
컵은 완전무결한 거요.
그러니까 똑같은 사람인데
조선시대에는 사람을 재능이 있고 재능이 없는 걸 뭘 기준으로 뽑습니까? 과거시험 볼 때.
우선 한문을 많이 아나 적게 아나와 관계 있지.
두 번째, 글씨를 잘 쓰나 못쓰나하고 관계가 있죠.
그런데 핵심은 그걸 가지고 뭐로 써야 된다? 시를 써야 돼.
시나 문장을 만드는데 그냥 시 쓰는 그 재능만 갖고 또는 글 쓰는 재능만 갖고 뽑는단 말이오.
요즘은 뭐로 뽑습니까?
공을 잘 던지는 거 갖고 재능을 뽑고
공을 잘 차는 거 갖고 재능을 뽑고
공을 작대로 쳐서 구멍에 쏙 집어넣는 것 갖고 재능을 뽑고
노래 잘하는 거 갖고 재능을 뽑고.
옛날에 노래 잘하면 그거는 최고로 신분이 천한 기생이 하던 거 아닙니까? 맞아요? 안 맞아요?
그 옛날 그 당시에 기술이라는 건 뭐다? 중간 장인이 한 거 아니오.
그러니까 시대마다 뭘 하나를 기준으로 해서 뽑는 거요.
달리기로 뽑든지, 던지기로 뽑든지, 셈본을 갖고 뽑든지,
우리 어릴 때는 대부분 공부 잘하고 못하고가 주산왕, 암산왕 이런 거 뽑았어요.
셈을 잘하면 머리가 좋고 재능이 있는 거요.
요즘은 셈 잘하는 게 필요해요? 안 해요?
요즘은 학교에서 많이 아는 것, 지식 많이 아는 것을 공부 잘한다고 뽑죠.
조금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어. 왜?
아이패드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그걸 뭣 때문에 학교 가서 외우고 공부하고 줄서고 그래요.
그러면 여러분 영어 몰라서 난리인데, 조금만 있으면 이미 벌써 80%는 됐습니다. 자동통역기 나와요? 안 나와요? 나와. 인공지능에 의해서.
그럼 내가 이렇게 얘기하면 고운 목소리로 영어로 얘기하는 거요.
상대가 영어로 얘기하면 고운 목소리로 나한테 한글로 얘기해 주는데 뭐.
조금만 있으면 아무 필요가 없어요.
마치 셈본을 누르기만 하면 척 계산해 주듯이,
지식을 검색하면 착 찾아주듯이,
그러니까 옛날에는 거기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서 한문 글자외우고 그거 하는데 20년씩 과거 공부했는데, 지금 그런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듯이,
지금 다니는 학교교육 이거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 시대에 그때 마다 기준을 정해서 그냥 이렇게 작으니 크니 했는데,
자기가 거기에 한마디로 말해서 세뇌가 되어서, 거기에 갇혀서
자기를 열등하게 지금 규정하고 있는 거요.
자기 존재는 열등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기가 우등하냐? 우등하지도 않아요.
이거를 여러분들이 사고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영화 보듯이 지금 그런 환영 속에 산다. 이 말이오.
그걸 알았으면 벗어나려고 그래도
꿈속에서 강도에게 쫓기면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야 되는데,
계속 ‘강도야 강도야’ 하고 도망 다니는 거 하고 똑같다. 이 말이오.
그럼 죽을 때까지 쫓겨 다니든지,
안 그러면 눈을 번쩍 뜨던지, 그건 본인이 선택하면 되는 거요.
그런데 지금 계속 눈감고 꿈속에 빠져드는 상황에 있다. 왜? 이게 오랜 습관으로 인해.
그냥 그때는 빠져들면, ‘오 또 꿈구나. 오 또 꿈꾸구나. 내가 꿈꾸구나.’
즉, 이 말이 ‘오 내가 또 생각에 사로잡히구나.’
과거 세뇌된 생각에 사로잡힌다. 이거야.
그건 자기가 선택이지 뭐.
지금까지는 그렇게 훈련받아서 종으로 훈련받듯이
여자는 열등하다고 훈련받듯이
그런 환경에서 그렇게 훈련받아서 살아왔는데,
오늘 얘기 듣고 노예해방이 되는 것과 똑같아.
‘너는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다.’ 이렇게 했는데도,
흑인들 해방시켜주니까 ‘자유다’ 하고 갑디까? 주인한테 도로 기어들어옵디까?
산에 있는 야생동물을 집에서 오래 키워서 산에 내보내면
산으로 좋다고 갑니까? 도로 집으로 들어옵니까?
집으로 들어오는 것 하고 똑같아.
그건 어쩔 수가 없는 거요. 그렇게 습관이 들어있는 거니까.
그러나 길을 있다.
내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든, 어떤 환경에 살았든, 어떤 역경을 겪었든
그건 다 지난 일이에요.
그게 나한테 상처가 되어 그 꿈이 나를 괴롭히는 거지,
지금 눈 번쩍 뜨면 나는 그냥 완전한 존재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누구나 다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렇게 살 건지,
자기가 본래 그런 권리가 있는 줄 알고 잠에서 깨어서 살 건지,
계속 꿈속에서 해맬 건지는
여러분들이 선택을 해야 되는 거요.
누가 대신해 줄 수 없어.
아무리 깨워도
베개 잡고 또 저 방에 가서 자는 데 그걸 어떻게 해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으면 안 살면 되지 뭐.
아무 도움도 안 돼.
어떤 수행도 아무 도움도 안 되고,
눈 뜨는 것 밖에 없어.
꿈속에서
참선을 하면 도움이 되느냐
염불을 하면 도움이 되느냐
꿈속에 있는 거는 만 가지를 해도 도움이 안 되고,
눈을 뜨면 아무것도 안 해도 바로 깰 수 있는데
뭘 그런 꿈속에 또 소리를 하고 있어?
과거에 내가 어땠든 그거는 과거의 일이고,
그 습관이 지금 남아있는 것 또한 현실이에요.
그러니까 과거에 늘 깊은 잠 속에서 꿈을 꾼 잠이 있어서 눈을 떠도 또 눈이 감기고...
그거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그랬으니까 그것도 받아들여야지.
그러나 한번 눈을 떠 봤으면,
‘오, 아니구나’ 하면 아무리 눈이 감겨도
다시 눈을 뜨고 눈을 뜨는 길 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눈이 잘 떠지느냐?’
이런 건 없어요.
그냥 눈뜨는 길 밖에 없다.
자꾸 눈뜨는 연습을 하면 나중에 잠이 도망을 가지.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 스스로에게
‘아무걱정 없다. 넌 잘 사는 거야.’
이렇게 자꾸 자기 암시를 줘야 되요.
걱정이 되면 ‘걱정할 거 없다.’
눈치 보면 ‘눈치 볼 것 없다. 너는 온전한 거야.’ 이렇게.
그러니까 남의 눈치를 보는 게 좋으면 눈치를 보고 살면 되요.
눈치 보는 게 안 좋다면 자꾸 보는 눈치가 생기면
‘오, 또 눈치 본다. 또 습관적으로 눈치 본다.’
이렇게 해서 자꾸 안 보는 연습을 해야지, 달리 방법이 없어.
여러분들은 인생을 자꾸
주사한대 맞고 좋아지는 그런 거 찾는데
그건 마약밖에 없어요.
네.
저희들이 이렇게 강연회를 하는 목적은
우리 국민들이 다 좀 행복해보자. 그렇게 해서 행복학교를 열거든요.
여기 다 100% 무료로, 자원봉사자들이 하는데, 전부 행복학교 운영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달짜리에요. 4주짜리.
그러니까 여러분들 행복학교 많이 참석하셔서
‘정말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법륜스님 > 즉문즉설(2018)'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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