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대사의 달마라는 뜻과
대승불교하고 소승불교의 차이점이 어떻게 되나요?//
제가 인도에 가면 여러분들이 저를 뭐라고 불러요?
“법륜아” 이렇게 불러요? “법륜스님”이렇게 불러요?
법륜스님, 이렇게 부르죠.
그럼 또 딴 스님, “법정스님“ 이렇게 부르죠.
우리는 법륜스님, 법정스님, 지광스님 이렇게 하는데
앞엣것이 이름이도 뒤에 거는 그 사람의 어떤 목사님, 선생님하는 존칭이잖아 그죠?
호칭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인도사람이 들으면 어떨까?
인도사람이 ‘법륜스님’ 하면 이 ‘법륜스님’ 이게 길잖아.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면 그 사람은 나를 보면 뭐라고 부를까?
앞에 법륜은 없어지고 ‘스님’ 이렇게 부르죠. 여러분도 저 혼자만 있을 때 ‘스님’ 이렇게 부르잖아.
스님이란 말이오.
내가 인도에 가서 사람들이 ‘법륜스님’이라고 해도 그 사람은 나를 뭐라고 부른다?
‘스님’ 이렇게 부른단 말이오.
그러면 나 말고 내가 한 10년 있다 가버리고 또 딴 사람이 간단 말이오.
그러면 그 사람이 유수스님이라고 하면 ”유수스님“ 이렇게 부르지만, 그 사람은 계속 ”스님“ 이렇게 부르겠죠.
그러니까 여러 사람이 바뀌어도 그 사람들은 역사적 기록의 ‘스님’이라고 남는단 말이오.
스님이 내 이름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인도에 내가 학교를 많이 지어줬는데 거기다 다 뭐라고 써 놨냐 하면 다 ‘스님’이라고 써 놨어요.
그것처럼 인도에서 스님들이 중국으로 왔는데, 이 사람들은 법을 전하러 왔다 이 말이오.
‘법을 전하는 스님’ 이 말이란 말이오.
달마가 무슨 뜻이냐?
원래 말은 다르마, 또는 담마 이렇게 부르는 거요.
빨리어로는 담마, 산스크리스트어로는 다르마
그런데 중국 사람은 그게 어쨌든 달마, 이렇게 됐단 말이오. 발음이.
그러면 달마라는 것은 법이라는 뜻이오. 법.
부처님의 말씀, 법이라는 뜻이오.
법을 전하러 오신 스님, 달마 스님.
또 딴 사람이 와도 그 사람도 뭐를 전하러 왔다?
‘다르마를 전하러 온 스님’
또 딴 사람이 와도 그 사람도 ‘담마를 전하러 온 스님.’
이렇게 될 거 아니오.
스님은 우리나라 말이오.
그러니까 선승, 참선을 하는 그 스님들은 법을 중요시하는 스님들이다 보니까 달마라는 이름이 생겼다.
우리가 달라이라마라고 그러잖아. 그죠?
달라이라마가 이름이 아니오. 달라이만 이름이에요.
라마는 스님이라는 뜻이에요.
달라이라마, 판첸라마, 무슨라마, 무슨라마... 이렇게 하잖아.
우리가 달라이라마 이렇게 부르지만 라마는 그 사람의 존칭에 들어가는 거다.
이런 얘기에요.
라마라는 것은 티벳말로 스님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인도말로는 스님을 뭐라 그러냐? 반떼 라고 그래요.
저를 법륜반떼, 이렇게 불러야 하는데,
한국 사람들이 저를 법륜스님 이렇게 부르니까
인도사람은 스님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니까 ‘법륜스님반떼’ 이렇게 불러.
역전앞 광장, 이렇게 말하잖아. 그죠?
전이 앞이라는 뜻 아니오. 역전광장 이래야 되는데, 역전앞 광장, 이렇게 말하는 것과 똑같단 말이오.
인도에 가면 저를 법륜스님반떼, 다 이렇게 불러.
안 그러면 스님반떼 이렇게 불러.
그런 거와 같은 거다.
그래서 선을 가르치러 온 초기의 스님들 무리들을 전부 다 뭐라고 불렀다?
달마라고 부른 거요.
그래서 그게 법을 전하는 사람들, 이런 뜻인데
그러면 이 첫 번째 법을 전하는 그 스님에게는 무슨 스님이라는 이름이 있었는데
그거는 기록에 없어지고,
처음에 왕국에 와서 보호를 받고 법을 전했으면 그 이름이 남았을 텐데
이 법을 전하는 사람들이 처음에 중국에 와서 탄압을 받았어요.
대우를 못 받고 정부로부터 뭐를 받았다?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사람의 이름은 없어지고, 그런 사람들을 다 달마라고 부르다 보니까
인도에서 온 그 스님은 이름은 모르고, 법을 전하러 온 스님이기 때문에
그냥 우리가 이름을 지어준 거요. 무슨 대사라고? 달마대사라고.
그런데 뭐, 이름이라는 게 부르면 되지, 그게 뜻이 뭐냐? 따질 필요가 있어요?
이름 맞아요. 지금 이름이 맞는데, 지금 우리가 지어줘서 이름이 됐어요? 안 됐어요?
됐기 때문에
원래대로 굳이 따지면 이름이라기 보다는 그 무리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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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승불교 대승불교의 차이점은?
소승불교는 여러분들은 지금 내가 내 인생을 자립해서 살아요?
남한테 좀 도와주세요 하고 지금 좀 빌어요?
솔직하게 한번 말해보세요.
남한테 좀 도와달라고 빌어요? 내가 내 인생 알아서 살아요?
알아서 살아요? 내 인생 알아서 사는 사람 손들어 봐. 손 내리고
뭐 어려울 때마다 빌고 싶은 사람 손들어 봐. 굉장하다.
이래서 종교가 안 되나 봐.
여러분들이 우선 시험 잘 치게 해주세요. 빌죠.
시험은 공부해서 내가 쳐야 해요? 그걸 부처님이나 하느님이 도와줘야 해요?
부처님이나 하느님이 도와주면 부정 아니에요? 어떻게 생각해요?
부정이에요? 부정 아니에요? 부정이에요.
그다음에 가게사업은 자기가 가게 내고 사업을 하면 되지 그걸 부처님 하느님이 도와줘야 해요?
그건 불공정이에요.
그다음에 결혼할 상대, 나하고 살 여자나 남자를 구하는데 그걸 부처님이나 하느님한테 도와달라고 그래야 해요? 자기가 선택하면 돼요? 자기가 선택하면 되지.
그런데 여러분들은
시험도 부처님보고 잘 쳐달라, 운전시험까지도 합격해 달라,
운전시험 부처님이 도와서 합격하면 이 사람 교통사고 나요? 안 나요? 나지.
죽을 짓이잖아. 그거는.
그러니까 결혼도 부탁하지, 가게 장사도 부탁하지, 승진시험도 부탁하지.
그래서 저는 그럴 때, 그럼 너는 뭐하노? 너는 뭐하노 도대체 니가?
그런데 토끼가 풀을 뜯거나 다람쥐가 도토리 주으면서 도토리 없다고
”하나님 도토리 좀 많이주세요. 풀 많은데 좀 알려주세요“ 이렇게 하고 살까? 자기가 알아서 찾을까? 그래.
그런데 중생, 우리는 뭐냐?
자기 인생을 자기가 자립 못 하고, 남한테 도와달라고 헐떡거리고 구걸하고 돌아다니는 거란 말이오.
그거를 잘하는 거라고 합법화시키는 게 종교요.
내가 볼 때는 종교가 제일 큰 문제에요.
그렇게 구걸하는 게 아니고
내 인생은 내가 산다.
누구한테 의지하는 게 아니라.
어릴 때 부모가 좀 도와주는 거 그거는 뭐 젖 먹여주고 하는 그거는 몰라도
내가 성인이 되었으면 내 인생은 내가 자립해서 산다. 이게 소승이에요.
좋아요? 안 좋아요? 좋지.
그러면 자립해서 자기가 자기 인생을 알아서 살면 괴로워하거나 남을 원망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요.
다람쥐가 도토리 적게 떨어졌다고 원망하고, 바위가 높다고 올라가기 힘들다고 원망하고 힘들다고 그래요? 안 그래요?
안 그래. 높으면 안 올라가도 되고.
그게 소승이고, 그런데 사람이 다람쥐만 해야 한다, 이게 첫째 중요해요.
두 번째는 다람쥐는 그러면 남을 도와줄까? 자기 살기 바쁠까? 네.
다람쥐는 남한테 부탁도 안 하지만 남 도와주지도 않아요.
우선 자립을 해라, 이게 소승이고
그래도 사람이라면 다람쥐보다 나아요? 안 나아요? 좀 나아.
그래서 어려운 사람 보면 좀 도와줘라. 이게 대승이에요.
쉽게 이해하면. 이해하셨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지금 자립을 했어요? 못 했어요?
못했으니까 우선 소승이 필요해요.
‘그럼 난 자립만 하면 된다’
아니에요.
플러스알파, 조금 도와줄 수 있는, 조금은 도와주는 수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남편 하나 잘 만나서 뜯어 먹겠다, 그건 중생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남편한테 내가 구걸 안 하고, 아내한테 구걸 안 하고, 내 인생은 내가 산다.
이런 자립의 관점에서 서로 협력하면 소승이고
그래도 우리 아내가 ‘나 만나서 좀 덕 봤다’ 하는 소리 듣도록 살아야 안 되겠냐,
우리 남편이 ‘나 만나서 좀 덕 봤다’ 소리 들어야 하지 않겠냐,
우리 부모님이 ‘내 아들 하나 잘 났다’ 소리 들어야 안 되겠냐.
우리 아들이 ‘엄마 참 고맙다’ 하는 소리 들어야 않겠냐,
조금 그래도 보탬에 되어야 하지 않겠냐, 이렇게 하면 뭐가 된다? 대승.
요게 대승이에요.
예수님이나 부처님은 남 도와주라고 가르쳤나? 자꾸 얻어먹으라고 가르쳤나?
도와주라고 가르쳤어.
일본에 지진이 났다.
‘하느님 안 믿어서 벌 받았다’ 이게 예수님의 가르침일까?
아니에요. 불행을 겪었을 때는 그런 거 따지지 말고 뭐해라? 도와줘라.
북한이 우리의 적이라 하더라도 굶어 죽는다 하면 도와줘야 하나? 안 도와줘야 하나?
이게 예수님의 가르침이에요.
이게 사랑이고 자비에요.
우리 집 아이가 아니지만, 부모가 죽고 애가 어리면
내 아이만 내가 키우면 되는데 부모가 있을 때는 내버려 둬도 되는데
부모가 없을 때는 남의 아이라도 돌봐야 한다.
이걸 사랑이라고 그러고, 자비라고 그러는 거요.
예수님과 부처님은 이런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 거지,
무슨 자기 인생도 못 살아서 구걸하라고 가르친 게 아니에요.
이건 왜곡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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