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공무원들이 여기 상당히 많으신데요. 과거 한 십 년 또는 그 이전에는 공무원 생활이 그나마 수월했다고 생각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국민들의 요구라든지 그런 입장들을 다 맞추려고 하다 보니까 상당히 힘들어졌습니다.
스님께서 통상적인 질문이지만 저희들이 어떻게 공무원 생활을 할 수 있을지...뭐 통상적입니다. 일은 아무리 많아도 밤을 새서라도 할 수 있는데 직장 상사와의 관계가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느끼는 그런 사항이거든요.//
그러니까 공무원도 공무원 나름이기 때문에 민원실에 있느냐 어디 있느냐 구체적으로 공무원 생활 중에 어떤 게 힘들다고 자기가 힘든 거 하나만 얘기해 봐. 일반화 시키지 말고. 자기가 힘든 거 한 가지만 얘기해 보면 돼.
상사가 어떻게 하는데?
그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승진권이 인사권이 상사한테 있어요? 나한테 있어요? 상사한테 있어요? 그러니까 승진에 자기가 욕심을 내면 눈치를 봐야 되고, 승진에 욕심을 안내면 눈치 볼 필요 없지 뭐. 그것은 자기가 결정하는 거요. 상사의 눈치를 좀 보다가도 승진하는 것을 더 중요시 할 거냐?
“그냥 눈치 보고 살 게 뭐 있노, 얼마 산다고 인생이. 크게 실례만 안 되면 내가 남의 눈치 보려고 살려고 공무원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눈치를 보려면 국민 눈치를 보지 상사 눈치 볼게 뭐 있나?” 이렇게 생각하면 승진을 포기하면 되지. 승진이 좀 늦을 뿐이지 뭐, 그렇다고 잘라내지는 못하잖아요. 범법행위를 하지 않는 이상.
그러니까 승진에 따라서 월급이 조금 차이가 나잖아. 그죠? 그것만 포기하면 되요. 그런데 공무원들은 연수에 따라서 주니까 큰 차이 안 날거요. 그래서 그것만 자기가 선택하면 되요.
난 그런 것은 몰라요. 왜 그러냐하면 결혼 생활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뭐냐? 공부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뭐냐? 왜냐하면 인생은 일반론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또 공무원 교육 받을 때 나와요? 안 나와요? 나와요. 내가 그것을 중복해서 할 필요는 없죠. 오늘도 아침에 아주 큰 재벌회사 사장단 회의에서 스님이 강의를 해 달라. “난 할 말 없다.” 그러니까 물을 게 있으면 얘기하지마는, 내가 어떻게 해라. 이렇게 할 말은 없다는 거요.
그러니까 뭣 때문에 문제다. 이렇게 물으면 저는 할 말이 있지마는, 공무원이 이렇게 살아야 된다. 이렇게 할 것은 별로 없어요. 다만 직업 중에 공무원이다. 또는 공직이다. 정치인도 거기에 포함이 되겠죠. 이런 사람은 사익보다 공익을 우선시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느냐. 일반론적으로 말하면. 그러니까
내가 사익이 더 중요한 사람은
공무원이라든지 정치라든지
이런 것을 하면 좀 안 맞아요.
폐해가 많아요.
그러니까 이럴 때부터 아이들 자라면서 보면, 반에서 청소를 시키는데도 자기만 눈치 봐서 쏙 빠져나가고, 어떻게 어떻게 하고 요령으로 하는 애들이 있고, 다른 사람 청소 안한 것 까지 청소해주고 이런 애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죠? 이런 아이들이 공무원을 하면 좋고, 그 다음에 어릴 때 같이 놀아보면 누구 하나 다치거나 하면 퍼뜩 가서 붕대를 가져오든지, 손으로 주물러 주든지, 이렇게 하는 애들이 있잖아. 우리 같이 사라보면 그죠? 그런 사람이 의사가 되어야 되요.
그런데 돈 많이 번다고 의사가 되고,
직업이 안정된다고 공무원이 되고,
돈 많이 번다고 변호사가 되기 때문에
의사의 본분보다는 돈에 더 집착하니까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기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변호사가 될 사람은
사람들이 법의 보장된 권리를 제대로 찾지 못해서
참 이렇게 국민으로서 마땅히 주어진 권리인데
그 법을 몰라서 고통 받는 사람을 보고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내가 변호해주고 싶은,
이런 사람들이 변호사가 되어야 되는 거요.
그런데 우린 그렇게 안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지금 사회가 직업윤리가 부족한 거요. 직업윤리가. 그래서 그냥 딱 얘기한다면 사익보다는 공익이, 사익이 없어야 된다는 게 아니라,
사익과 공익을 비교한다면
어쨌든 공익이 사익보다 앞서는 사람이
공직에 있어야 된다는 거요.
그거 하나만 지키면 저는 되지 않겠나 싶고요,
나머지는 회사가나 가정에서나 어디나 똑같아요.
어디든지 가면 인간조직사회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갈등이 생긴다.
갈등이 생기는 것은
하나는 자기주장이 있기 때문에.
두 번째는 이익이 걸려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익에 걸려있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데,
이 이익이 걸려있는 것을 욕심, 탐욕이라고 그러고,
그다음에 자기주장이 걸려있으면 화가 나거든요. 스트레스.
이게 성냄이죠.
그래서 이 탐진치 삼독 중에
첫 번째가 탐욕, 두 번째가 성냄, 세 번째가 어리석음. 이렇게 말하거든요.
그래서 이것은 인간자체가 원래 그렇게 생겨 있어요.
그래서 누구나 다 자기이익을 중심으로 두는 사고방식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 사이에 갈등의 한 원인이 되고,
두 번째는 이익과 또 별개로
이념을 주장하든 종교를 주장하든, 자기 게 더 옳다는 거요.
이런 주의주장이 사람은 누구나 다 있어요.
이것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거요.
그러니까 부부지간에 갈등이 것은
이익도 있지만, 이럴 때는 주의주장이 훨씬 더 강합니다.
그러니까 스트레스가 더 많죠.
남하고는 이익이 더 많을 수도 있고요.
친할수록 이익은 적습니다.
왜냐하면 친한 친구에게
자기가 이익을 축구하려는 것은 적거든요.
친해도 자기 성질, 자기주장대로 하려는 것은 아주 강합니다.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꼭 공무원 아니라도 어디든지 해당이 되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회사 다니든 어디를 하든, 내가 인사에서 승진을 하고 싶다면 인사권이 아랫사람이 있다면 아랫사람에 잘 보여야 되고, 친구한테 있다면 친구한테 잘 보여야 되고, 윗사람한테 있다면 윗사람한테 잘 보여야 되잖아. 그러면 윗사람한테 잘 보이는 것을 나쁘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인사권이 그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잘 보여야 승진이 되는 거요.
그러면 나는 윗사람에게 그렇게 비굴하게 살기 싫다하면,
내 맘대로 하고,
승진도 되고 이런 것은 없다는 거요.
그것은 욕심이라는 거죠.
그러면 하나를 포기해야 되는 거요.
그러니까 승진을 포기하면 뭐 크게 공무원 직분을 행사하면 되지, 위사람 눈치를 너무 그렇게 볼 필요는 없고, 윗사람 성격이 조금 부당하다 느끼면 “성질이 저렇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되요. 그냥 아침에 보고 하러 갔는데 성질 좀 내면 “마누라하고 아침에 싸웠나.” 이렇게 그냥 생각하면 되요.
왜냐하면 그 사람 성격은 내가 고쳐줄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거요. 성격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 성격이 개인적 성격인 것은
그냥 수용하는 게 제일이고,
그것이 부당하다.
예를 든다면 위 사람이라고 사사로이 “커피를 끓여오라.” “내 자동차를 기름을 넣어오라.” 이렇게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는 거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원래 우리가 맺은 관계에서 어긋나지 않습니까. 그죠.
그럼 그것은 회사든 공무원이든 어디든지 다 윤리에 어긋나는 거란 말이오. 그러면 그것은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됩니다.
그게 법으로 부당하면 법원에 제기해야 되고, 법은 아니지만 공직 윤리에 부당하면 그 문제를 본인한테 먼저 제기하고. “이것은 조금 윤리에 어긋납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불이익이 오지 않느냐?” 당연히 불이익일 감수해야죠.
이 세상을 바꾸려면 불이익을 감수해야 됩니다.
나라를 독립시키려면 목숨을 걸어야 되고,
민주화를 위해서는 감옥 갈 각오를 해야 되지 않아요.
불이익을 감수해야 되요.
우리 사회를 혁신시키려면
감옥가거나 죽을 거는 아니지마는
승진에 누락이 되거나
좀 왕따를 당하는 불이익은 감수해야 되는 거요.
그러니까 출가자라고 하는 이 승려 모임에서도 우리 불교계의 비리나 이런 부당한 것, 불법에 맞지 않다 하는 것을 문제제기하면 불이익을 감수해야 되요. 그것을 제기하고 불이익을 감수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은 욕심이라는 거죠. 그러면 그런 불이익을 당연히 감수를 해야 되는 거요.
왕따 시키면 왕따를 받아야 되고,
제외시키면 제외를 받아야 되고,
비난을 하면 비난을 받아야 되고,
그래서 개혁을 하려면 혁신을 하려면 뭔가 바꾸려면
약간의 도전을 해야 되고,
도전은 약간의 손실을 감수해야 된다.
이것은 인류역사상 모든 분들이 다 그렇게 했습니다. 부처님도 불이익을 감수하셨고, 예수님도 불이익을 감수하셨잖아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죽는 것뿐만 아니라 엄청난 오명까지 썼잖아요. 혹세무민한다고. 불이익을 감수해야 되는 거요. 그럴 때만이 변화가 일어나는 거요. 그러니까 아무런 손실도 안 보고, 희생도 안하고, 이렇게 뭔가 좋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세상 이치가 그렇게 안 되어 있다.
이것은 물리적으로도 마찬가지에요. 이 물건이 이렇게 움직이고 오는데 이쪽으로 가는 게 잘못되어 저쪽으로 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힘을 가해야 되잖아요. 힘을 가한다고 바로 저쪽으로 가는 거 아니죠. 힘을 가하는데도 점점점점 밀려옵니다. 일정하게 밀려오다가 멈추고, 그 다음부터 이렇게 가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면 힘을 가했는데도 이렇게 뒤로 밀려오는 것을 두고, "효과가 없었다." 이렇게 평가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나빠지는 것을 막으면
나빠지는 속도를 줄이는 거지
금방 좋아지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10을 -8로, -7로, -5로, -3으로. -1로 제로가 되는 거요. 그 다음에 +1 +2 +3 이렇게 가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노력을 했는데도
금방 표가가 안는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은 +로 금방 안 돌아선다고 효과가 안 난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다는 거죠.
그래서 이것은 이치라는 거죠.
이것은 무슨 그냥 주장이 아니고,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이치에 따라서
결국은 내가 아까 얘기했지마는 과보를 받아라.
하고 싶으면 해라.
그러나 과보가 따른다.
그런데 과보가 받기 싫으면
하고 싶어도 멈추어야 된다.
그런면에서 여러분들이 여기에 사시는데, 그러면 여러분들이 지금 공무원이 여기 많다고 하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지금 자기 개인의 이익, 이게 더 우선시된다면 공무원 생활 하는데 조금 힘들죠. 그러니까 이익을 추구하지마라가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이 공무원이라고 하는 직업 자체가 공익이 조금 더 우선이 되어야 된다. 하는 거요.
그러니까 개인 사업하는 사람하고 여러분하고 시민이 보는 눈이 다르다는 거요. 제가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하고 같이 갈비집에 가서 갈비를 뜯고 있으면 똑같은 사람이니까 똑같이 “나는 사람 아니가?” 이러지만, 그래서 소주잔 걸치면서 얘기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날 쳐다볼까? 안 쳐다볼까? 쳐다보겠죠.
그런데 법으로 무슨 잘못한 것은 아니잖아. 그죠?
그러나 이 승려 윤리라는 게 있고, 관습이 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가는 사람더러 “중이 저렇게 고기를 먹어도 되나?” 이렇게 보는 거요. 그러면 내가 승려가 되어서 “네가 보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 살 수 있는데, 그러면
승려의 대중에 대한 자기 책임을 반기하는 거다.
이게 고기 먹어라. 먹지 마라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게 옳은지 그른지 계율이 있느니 없느니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일반인의 일반적 관습에는 어긋나기 때문에
먹더라도 그런 경우는 보는 데는 안 먹고, 안 보는데서 먹는다.
그러니까 이율배반적이다. 이렇게 평가하시면 안 돼요.
그러니까 최소한도 먹더라도 어느 정도 예의가 필요하다.
안 보이는 데서 먹는 예의가 필요한 거요.
왜냐하면 이게 인간 삶이니까.
남을 피곤하게 하는 거요.
이게 남의 눈치보고 사는 거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사람들이 그렇게 그런 관점에서 보니까.
그러니까 여자가 손을 잡고 내가 길거리 다니면 안 되는 거요. 내가 뭐 여자 손잡고 간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가 깨끗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나 남이 오해할 짓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진짜 어떤 여성분이 다치거나 너무 힘들어서 내가 안아도 줘야 되고, 손을 잡아줘야 될 경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런 게 있을 때 그것을 사람 눈이 두려워해서 안하면 안 되는 거요. 그럴 때는 내가 비난을 좀 받고, 오해를 좀 받고라도 이 사람을 돌봐야 된다면 돌봐야 되는 거요. 그럴 때는 너무 관습에 매이면 안 된다는 거요.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의 보편적 시각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줘야 되는데,
우리나라 스님들이 그것을 무시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항상 문제가 되잖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떤 사물을 볼 때,
그게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가? 안 되는가?
이것을 보셔야 됩니다.
예를 들면 내가 결혼을 했다. 법적으로 문제가 되요? 안 돼요? 안 돼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것을 갖고 난리잖아요. 그런데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어요. 대한민국 국민의 권리란 말이요. 내가 정치적 발언을 한다 해서 문제가 되는 거 아니오. 이것은 대한민국 국민의 권리에 해당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은 마치 승려면 하면 안 되는 줄 알아요. 그런데 그것은 우리 조계종에서는 승려가 결혼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고, 태고종에서는 해도 된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럼 그것은 그 내규에서 된다고 되어 있는 데는 결혼해도 되고, 안 된다고 되어 있는 데는 조계종에서 축출을 하죠. “이 단체에서는 나가라.” 이렇게 되는 거란 말이오. 그것을 법적으로 처벌하면 안 돼요.
가장 대표적인 게 80년 10월 27일, 신군부가 승려들 수백 명을 축첩을 했다. 사유재산을 가지고 있다 해서 삼청교육대 보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젊을 때인데, “이거 특종 종교에 대한 탄압이다.” 이거 불교 안에서도 지지를 못 받았습니다. 그놈들은 좀 정화를 하려면 우리 힘으로 못하니까 옛날에 국왕이 하듯이 정부 권력이 해야 된다. 그리고 경찰이나 이런 분도 저한테 “당신이 개혁을 가장 주장하면 우리가 해주면 당신이 적극적으로 지지해야지 왜 반대했냐?” 이게 법적용과 윤리의 잘못이라는 거죠.
결국은 20년 지나서 국가가 사과하고 보상 변상 다했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지금 결혼한 사람이 어떤 다른 여자를 만났다고 해서 그것이
간통죄가 폐지된 이유가
그게 두 부부사이의 윤리의 문제지
그게 국가 공권력이 관계할 형사적인 문제냐?
이 문제 때문에 폐지가 된 거 아니오.
그런 것처럼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즉, 법적인 권리와 그 다음에 우리가 관습적인 윤리를 구분해야 되고, 그 다음에 관습적인 윤리를 너무 무시하면 안 된다는 거죠. 그것을 우리가 지켜야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렇게 얘기가 길어졌는데,
공무원하면 국민들이 생각할 때 너희는 공직이지 않느냐?
너희는 국민에게 봉사해야 되지 않느냐? 이런 의식이 있잖아요.
옛날에는 높은 사람, 사또. 우리보다 높은 사람, 우리를 지배하는 사람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복종을 하지만, 지금은 민주교육이 되어있기 때문에 “너희는 머슴이다. 너희 월급 우리가 준다. 우리 세금내서 월급 주는데 왜 그렇게 주인한테 불친절하냐?” 이런 의식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런 자세를 안 갖게 되면 국민들로부터 저항이 있죠.
그러면 지난 10년보다도 어려워진 것은
국민의 의식이 깨었기 때문에 이제 힘드는데,
그러니까 원래의 공직의 의미만 알면
국민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이거야.
그런데 법에 어긋나게 부당하게 와서 행패 피우는 사람 있잖아요. 그런데는 비굴하게 또 굴 필요도 없어요. 그런 것은 정당하게 처리를 하면 되는데, 이렇게 말썽이 되면 상사는 승진에 목을 매달잖아. 그죠. 말썽이 되면 승진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가능하면 조용하게 처리하라잖아요. 그런 것도 내가 승진에 구애받지 않으면 “아닙니다. 이것은 정상대로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국민의 정당한 항의와 요구는 수용해줘야 되고,
아무리 국민이라도 부당한 것은 딱 잘라서 거절해야 되고,
그로 인해서 오는 불이익은 감수를 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원칙만 딱 정해지면 뭐 힘들게 있어요. 하면 되는데. 그런데 욕심 때문에 힘든다는 거요. 가능하면 말썽도 안 일으키고 좀 잘 보여서 가기도하고 그렇다고 비위맞추기는 자존심 상하고, 이런 게 같이 겹치니까 좀 피곤하지. 제 의견은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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