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4)

법륜스님의 즉문즉설_ 2036. 교통사고로 갑자기 떠나 보낸 아이가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Buddhastudy 2024. 8. 1. 20:14

 

 

저희 부부는 4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 어머니로

저번 주에 교통사고로 막내를 갑자기 먼저 보내게 되었습니다.

화내고 짜증 낸 생각이 나서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10살 막내가 너무 보고 싶고 안아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녀가 갑자기

그것도 병원에서 12년 병을 앓다가 명을 달리한 것도 아니고

갑자기 교통사고 나서 죽게 되면

지금 뭐 꿈만 같죠, 제정신이 아니죠.

그걸 빨리 진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정신없이 사는 수밖에 없다.

우선 이렇게 먼저 말씀을 드리고요.

 

이럴 때는 백약이 무효예요.

스님이 어떤 위로를 한다고 해서

그게 귀에 들어오고, 마음에 담겨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은 슬픔을 좀 감내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자기들이 질문을 했으니까

그래도 정신을 좀 차렸으니까 질문을 했을 거 아니에요? 그죠?

완전히 정신없으면 질문할 생각도 못했을 텐데

질문을 했으니까

자기들은 어떻게 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자기들이 생각할 때

스님이나 신부님이나 목사님이나 말고

자기들이 지금 교통사고로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들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될 것 같아요? 어떻게 됐으면 좋겠어요?

아이가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다이렇게 생각합니까?

아니 그냥 솔직하게 얘기해 봐요.

 

아이가 살아서 돌아왔으면 좋겠다

부모심정에서 그러겠죠.

근데 아이가 살아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없을까요?

 

그러면 아무리 내가 그걸 원한다 하더라도

방법이 없다면

포기를 해야 됩니까? 계속 잡고 있어야 됩니까?

 

그러니까 내가 어떤 금덩이를 하나 갖고 싶은데

금은방에 가서 금을 하나 갖고 싶은데

가질 방법이 없으면 포기를 해야 되는데

거기에 미련을 갖게 되면

어리석은 행동이 나온다는 거예요.

그걸 훔친다든지, 이런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조건이 안 되는데 그걸 자꾸 집착을 하게 되면

 

그럼 자기는 지금

아이가 살아 돌아오기를 원하는데

현실적으로 도저히 될 수 없다.

그런데도 계속 거기에 미련이 있다

 

그러면 어떤 종교 지도자든, 무당이든, 누가

굿을 하면 애가 낳는다든지 돌아온다든지

어떻게 천도재를 지내면 극락에 간다든지

이러면 돈이 좀 들더라도 할까? 안 할까?

 

그러니까 그게 내가 원하는 게 간절한데

내 힘으로 할 수 없을 때는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남의 힘을 빌려서 그걸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서 만약에 오늘 나한테 안 묻고 다른 사람한테 물었으면

아이를 극락 보내기 위해서는 천도재를 지내야 됩니다.

근데 그게 뭐 한 100만 원이면 하겠는데

1억 내놔라 그러면 고민이 될까 안 될까

기꺼이 하시겠어요? 고민이 되겠어요?

 

1억 내라 그래도?

 

자기는 지금 이 슬픔 때문에

벌써 그런 것을 받아들일 소지가 있고

나중에 돈이 안 되면 나한테 또 물어요.

진짜 천도재 지낸다고 극락을 갑니까? ”

또 이렇게 묻게 된다 이 말이에요.

 

묻는 이유는 뭐 때문에 그럴까?

돈이 부담이 되니까 묻는 거예요.

자기처럼 지금 너무 아이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을 때는 돈을 써요.

 

사람이 죽었을 때 장례비라든지

죽었을 때 보시라든지

제비, 이런 데 큰돈을 자기 형편에 맞지 않게 쓰는 이유는

너무 슬프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얘기예요.

 

근데 그 돈이 부담스러우면 저한테 와서 물어요.

진짜 갑니까?” 이렇게.

그러니까 이런 위험이 있다.

그거 1억도 아니고 10억 내라 이러면

자기는 어떡할 거냐 이 말이야.

 

자기가 생각했을 때 안 되는 거라면

돌아오는 거는 안 된다.

그러면 죽은 뒤에 극락이라도 갔으면 좋겠다. 천당이라도 갔으면 좋겠다.

이게 이제 두 번째예요.

그런데 거기에 돈이 든다.

 

근데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자기 지은 대로

아이가 10살 됐다고요?

10살 땐데 자라면서 뭐 크게 나쁜 짓 했을까? 안 했을까?

 

그래, 그랬으면 만약에 천당이나 극락이 있다면 갈까? 안 갈까요?

 

근데 돈 드릴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돈을 들이는 이유는 뭐예요?

나쁜 짓 해서 못 갈 사람을 보낼 때 돈이 드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것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천당 극락을 가고 싶다 그러면

우리 아이는 아직 어리고, 특별히 죄를 지은 것도 없고

그러니까 천당 극락 갔겠다

있다면, 없으면 모르지만, 있다면 갔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걱정할 게 없잖아요.

 

근데 자기가 거기에 애걸복걸 하니까

우리 아이는 아무 죄도 없는데

왜 돈을 들여서 천당 극락 보내려고 돈을 들였냐, 이거예요.

 

오히려 생각을 이렇게 해야 되겠지.

아이가 자라서 대학까지 졸업하고 성인이 되려면

내가 한 3억은 애한테 돈이 들지 않겠느냐.

그런데 애가 없으니까 이제 그 돈은 안 들게 됐으니

우리 아이 하나의 생명이 죽는 대신에

우리 아이 이름으로

저 지구 저편에 인도의 가난한 아이나

아프리카의 가난한 아이들 100명을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학비를 제공하겠다

그러면 하나를 잃고 100개를 얻는 게 안 되겠습니까? 그죠?

 

생각을 이렇게 바꿔야 되는데

그게 정신이 없으면 그렇게 마음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대학까지 졸업하는데 3억 들 거를

10분의 13천만 원만 해도

그 나라에서 10명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입학할 때까지

경비를 지원할 수가 있다. 이 말이야.

아이들 하나 학교 보내는데 1년에 몇만 원밖에 안 드니까.

 

그러면 그렇게 아이를 승화시키는 거예요.

내 아이 하나 희생되지만

전 인류의 관점에서 볼 때는

내 아이 하나가 산화에서 10명을 살렸다.

하나가 산화해서 100명을 살렸다.

그럴 때 우리 아이는 극락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고

천당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을 거 아니에요. 그죠?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오히려 슬픔을 빨리 없애는 방법이 된다.

 

여기 붙들려서 자꾸 내 아이에게 집착해서

살아왔으면, 좋은데 갔으면이렇게 생각하는데

살아왔으면한다고 살아오는 것도 아니고

좋은데 갔으면한다고 좋은데 가지는 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살아왔으면 하면

살아올 수 있는 길을 선택해야 되잖아요.

근데 지금까지 살아온 상식으론 살아올 수가 없잖아요.

살아올 수 있다 하면 그건 사기꾼이란 말이에요.

 

그럼 좋은 데 갔으면이거는 모르잖아요.

좋은 데가 있는지 없는지.

그래도 그거는 모르니까

이거는 돌아온다는 건 확실히 아니다.

살아오는 건 확실히 아니다. 이거는 알겠죠.

 

환생해서 온다이거는 뭐 가능성이 있어요

그거는 확실히 모르잖아요. 우리가 아닌지 긴지

좋은 데 갔으면이것도 아닌지 긴지 몰라요.

모르니까 그건 해볼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대로 죽은 자식이 살아난다.

이거는 아니라는 거 확실한데

거기에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불확실하지만은 가능성 있는 거는

다시 윤회해서 환생한다든지

극락이나 천당에 간다든지

믿는 사람도 있을 거고

안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거는 불확실한 거니까 해볼 수가 있겠다.

 

그래서 돈을 내서 거기 보낸다.

그러면 거기 가는데 왜 돈을 내느냐는 거예요.

거기 가는 건, 돈하고 관계가 원래 없는 거 아니에요?

10살짜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거기 가는데 돈을 내야 돼요?

 

거기가 만약에 있다면 거기 가는 길은

부모로서 자식에게 공덕을 지어줘야 되겠다.

그러니까 내 아이 하나가 희생돼서

저 돌보지 못한 아이 10, 100명을 내가 보살피는 데 드는 경비를 제공을 하겠다.

그걸 아이 이름으로 하겠다.”

 

이렇게 되면 그 아이가 어때요?

부모의 힘을 빌려서 공덕을 짓는 거 아니겠어요? 그죠?

그럼, 그 힘으로 만약에 간다면 갈 수 있을 거 아니겠어요?

 

이러한 쪽으로 좀 생각을 해서

슬픔을 승화시키는 게 필요하다.

 

슬픈 거는 지금 어쩔 수가 없는데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지만

이왕 이렇게 벌어진 걸 승화시켜야 된다.

 

어제 오늘인가 신문 기사 보니까

20대 젊은 어떤 촉망받는 사람이 어떤 이유로 죽어서

한 사람이 죽어서 3명인가 4명의 생명을 살렸다

이런 얘기 나오잖아요.

눈 못 보는 사람에게 안구를 기증하고 이렇게 해서.

 

그게 바로 하나가 죽어서 4명을 살리는 것처럼

내 하나의 아이가 어쩔 수 없이 죽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아이를 되살리는 건 어려우니까

이 아이 몫으로 내가 10명이나 100명의 아이를 잘 크도록 도와주겠다

이런 자세가 좀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전 지구적으로 보면

아이의 희생이 그냥 허무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귀해지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이왕지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까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를 좀 고귀하도록 만들어줄 수가 있지 않을까

살아오게는 할 수가 없으니까

그런 관점에서 이걸 보면 좀 어떨까.

 

 

그다음 두 번째는 자기가 아까 얘기했잖아요.

애하고 놀아주지도 못하고, 사랑도 제대로 못해줬다.

그러면 이렇게 슬픔에 빠져 있는 게

나머지 3명에게 도움이 될까?

안 그러면 이걸 반성하고

돈 버는데 이런 데 너무 집중하지 말고

주말에는 시간을 내서

애들하고 같이 놀아주고 여행도 다니고

이렇게 자기 삶의 사는 방식을 좀 바꿔야 안 될까요?

 

돈만 벌어서 그저 애한테 주려고 했는데, 애가 죽어버렸다.

그럼 얼마나 허무해요?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같이 놀아주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러니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애들을 위해서 돈을 벌어야 되지만은

주말에는 또는 주말에 일을 해야 된다면

어느 하루는, 또 한 달에 한두 번이라도

애들과 같이 놀아주고

놀아준다는 게 꼭 뭐 놀이기구를 타야 된다는 게 아니라

대화도 하고, 여행도 하고, 밥도 먹고

이런 걸로 인생을 좀, 삶을 바꿔야 되겠다

이런 게 반성이 되잖아요.

 

그러면 내 아이에게 잘못할 거를

한 아이로 인해서 세 아이에게 잘하는 교훈을 얻었잖아요.

이래야 이 아이가 보람이 있잖아요.

 

하나의 희생이

나머지 세 아이에게 내가 실수할 거를 막아줬으니

우리 막내가 큰일을 했다.

그리고 위의 형들이나 언니들이 볼 때도

동생의 희생으로 엄마 아빠가 우리를 위해서 더 사랑했다.

 

이게 살아있단 말이에요.

동생이라는 육체적 생명은 죽었지만은

그 아이의 뜻이 3명의 아들딸들에게 살아있거나

남을 돕는다면 다른 아이 10100명에게 살아있는

이런 자세로 이 문제를 좀 극복했으면 좋겠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네.

 

...

 

저기 엄마는 더 슬픈데 아빠보다도

엄마가 더 한마디 해 봐요.

 

우는 거는, 심정은 이해해요.

그런데 운다고 돌아오는 거 아니에요?

 

잘해주지 왜 못 해줬어요?

근데 지금 걔 못 해줬다고 울면서

나머지 3명에게 또 못 해 주잖아요.

 

그럼, 그거 잘하는 거다.

하나를 잃었으면 반성을 해서 나머지 정신 차려가 잘해야 되는데

이 애 잃었다고 계속 둘이 울고 이래 있으면

나머지 3명에게 또 못 해주잖아요.

그게 바보 같은 짓 아닐까요?

 

내가 애를 잃고 보니까 돈도 중요하지만

애들하고 같이 놀아주고 잘해주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앞으로 나머지 셋에게 화를 내거나 이런 건 안 해야 된단 말이에요.

 

그럴 때 그 아이가 희생이 된 게 아니라

그 아이 하나의 죽음으로 내가 정신을 차리고

나머지 아이들에게 그 아이의 그 사랑이

세 아이에게 살아서 돌아오는 거나 다름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 정신을 차리셔야 돼요.

슬픈 거는 이해가 되는데

지금 슬퍼하고 거기에 사로잡혀 있으면

더한 실수를, 이미 한 실수를 후회하면서 똑같은 길을

또 가고, 또 가고, 또 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 번의 실수로 끝내려면

나머지 아이들에게

내가 여기서 후회했던 거를

다시는 실수 안 하도록 해야 되겠다 해서

아이들 셋이 동생 잃었다고 슬피 울어도

엄마 아빠가 달래야 되거든요.

 

괜찮아, 그래 마음이 아픈 건 사실이야.

그래도 우리 속에 다 같이 살아 있어

이렇게 격려하고 아이들의 슬픔을 없애야 되는데

엄마 아빠가 식음을 전폐하고 정신없이 그렇게 있으면

애들한테 더 큰 충격을 주잖아요.

 

그리고 자기들이 지금 반성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 감정에 빠져 있지

애한테 못 해줬다.”

그게 지금 슬픔의 감정에 빠진 정신질환에 속하는 거요.

 

반성했으면

지금 웃으면서 나머지 애들한테 잘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큰 실수할 뻔했다이렇게 하면서

나머지 3명에게 잘하는 자세로 전환해야 된다.

 

그리고 또 우리 아이에게만 아니라

돌보지 못하는

부모가 자식을 낳아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에 너무 많거든요.

그런 사람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느냐?

내가 적은 수입이지만은

우리 아이를 위해서

그런데 내가 조금이라도 기부를 해야 되겠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저는 슬픔을 더 좋은 쪽으로 승화할 수 있지 않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

 

한번 웃어보세요.

우리가 어떻게 자식이 죽었는데 어떻게 웃나?

그럼 자식이 죽어서 울면 그러면 애가 살아오느냐, 이 말이예요.

 

웃으면 나머지 3명에게라도 좋지만은

울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 건 똑같고

나머지 3명에게도 나쁜 영향을 준다.

그러니까 바보 같은 짓을 연달아서 하는 거다, 이 말이예요.

 

그러니까 어른이니까

또 셋 아이가 있는 엄마 아빠니까

빨리 마음을 수습하고 정신을 차려서

세 명과 함께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

 

자식이 죽었는데

부모한테 무슨 위로를 한다고 도움이 되겠어요?

지금 정신없어요.

 

그래서 스님도 이럴 때는 위로를 안 합니다.

그 위로가 귀에 안 들어와요.

 

그러나 이것도 크게 정신적으로 말하면 병입니다.

이런 충격에 따르는 정신질환에 속합니다.

 

그래서 정신이 잘 안 돌아오면

병원에 가서 안정제를 좀 받아서 먹어야 됩니다.

그럼 훨씬 마음이 진정이 된다.

그리고 빨리 정신을 차리게 된다, 이런 얘기고요.

 

그다음에 한 명을 잃으면서 3명까지 안 잃어서 다행이다.

나머지 3명에 대해서 다시 관심을 집중하는 게 정신을 빨리 차리는 길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

 

너무 매몰차게 얘기해서 미안해요.

근데 뭐 방법이 없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