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4)

[법륜스님의 하루]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방법. (2024.07.25.)

Buddhastudy 2024. 8. 1. 20:11

 

 

저는 주변에 인복은 없이 일복만 많습니다.

남자들이 많은 조직에서 일하고 있는데,

항상 남자 못지않게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서 열심히 일합니다.

기껏 고생해서 성과를 내도, 실적 가로채기를 당하거나

오히려 동료들로부터 시기 질투를 사서 왕따 당하기를 반복했습니다.

좌절감에 의욕을 상실하고, 우울, 불안한 감정이 올라와서 살기가 싫었습니다.

이런 카르마를 벗고

변화된 삶을 살고자 정토회에 들어와서 매일 정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문제가 나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고

내 탓이다하며 참회 기도를 하고 있자니

자꾸 의기소침해집니다.

욕심을 내려놓고 있으면 삶에 의미가 없는 것 같고,

남들을 기쁘게 하는 일이 좋았는데

에너지를 발휘하지 못하니 위축감이 듭니다.

그러다가 주변으로부터 조금만 인정을 받는다 싶으면

들떠서 다시 많은 일을 맡아 애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어떻게 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편안하게 나를 지키면서

또한 잘 쓰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질문자는 사는 게 좀 힘든가 봅니다.

사는 건 원래 힘들지 않습니다.

 

나뭇잎에 붙어사는 작은 벌레도 잘 살아갑니다.

개구리, 다람쥐, 토끼, 사슴도 살고,

연약하고 작은 생물들도 다 살아갑니다.

힘들다고 아우성치지도, 괴롭다고 울지도 않습니다.

또한 누구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습니다.

다들 자기가 먹을 것을 스스로 찾고,

위험이 닥치면 피하는 가운데

새끼도 낳아 키우면서 종을 번식하고 삽니다.

만약 새끼가 다른 생물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다시는 새끼를 안 낳는 것이 아니라

죽은 건 죽은 것이고 또 다른 새끼를 낳아서 키우며 종을 번식해 갑니다.

그렇게 살다가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이자 생명의 현상입니다.

 

자연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이자 가장 고등 동물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이 사는 게 힘들다고 하면

자연스럽지 못한 현상입니다.

한 생물로서의 육신이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게 아니라

정신작용이 고장이 났다는 뜻입니다.

질문자는 지금 정신작용이 고장 나서

사는 게 힘들어진 겁니다.

 

질문자의 얘기를 들어보면

현재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강박관념에 불안감이 있다고 하니

먼저 신경정신과에 가서 진료받고

치료가 필요하다면 치료받는 게 좋습니다.

정신적 상담이 필요하다면 상담 치료를 받고,

지나치게 신경이 예민하다면

약물치료를 받으면 완화됩니다.

 

가끔 제가 이런 권유를 하면

정신만 차리면 된다’, ‘마음만 바로잡으면 된다

이렇게 말하면서

제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알코올 의존자, 관절염 환자, 당뇨병 환자, 이런 사람들에게

정신 차려라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낫는 게 아닙니다.

이런 병은 몸에 어떤 물질적인 분비물에 이상이 생겨서 발병한 것이기 때문에,

약물치료를 통해 보완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신질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첫째, 질문자는 신경정신과에 가서 의사와 상담을 하는 게 필요합니다.

-둘째, 모든 괴로움이 나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됨을 알아야 합니다.

내 욕망, 즉 내 성질대로 하려는 데에서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이런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려서

괴로움의 원인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욕심을 내려놓고 살면 의욕이 없어진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얘기예요.

 

예를 들어서

내가 뛰는 중에 숨이 너무 차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뛰면 됩니다.

그런데 숨이 차서 잠시 쉬었더니,

뛸 의욕까지 사라져 버린다면 무언가 잘못된 겁니다.

 

몸은 숨이 차서 쉬어야 하는데

계속 뛰고 싶다는 생각에 집착해서

쉬는 일이 마치 낙오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숨이 차서 몸에 한계가 와도

쉬지 않고 계속 뛴다면

오히려 잠시 쉬었다가

다시 뛰는 것보다 결과가 못할 수 있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뛰는 게 더 낫다면

쉬는 게 낙오가 아니라

쉬는 것도 뛰는 일에 포함되는 거예요.

 

밥을 먹지 않고 계속 일하는 것보다

밥 먹고 일하는 게 더 효율이 높다면

밥 먹는 시간은 쉬는 시간이 아니라 일의 연장선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쉴 때 잘 쉬어주는 게

오히려 일을 더 잘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모든 욕구를 내려놓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욕구로 인해 괴롭다면,

괴로움의 원인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질문자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았는데도

괴로움이 없고 속박이 없다면,

그렇게 살지 말라고는 안 하셨어요.

 

그런데 원하는 대로 했는데 질문자가 괴롭다면,

그 원인인 욕구를 내려놓으라는 겁니다.

질문자가 원하는 대로 못 하게 하는 사람이나

상황이 문제가 아니에요.

외부 상황은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물론 외부 상황을 바꿀 수 있으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보통은 상황을 개선하려고 하기보다는

상황 속에서 괴로워하기만 하잖아요.

 

무언가를 바란다고 다 욕심이 아닙니다.

바라는 대로 안 되었을 때 괴로우면,

그것을 욕심이라고 합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등

연구하는 자세로 임하면

꼭 원하는 대로 안 되더라도 괴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원하는 대로 안 되더라도 괴롭지 않을 때는

욕심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셋째, 항상 지금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현실에 항상 불만인 것 같습니다.

지금 회사에 다닐 수 있는 것에 만족하고,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고

남자들만 있는 회사에

여자로 당당하게 끼어 일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남자 직원과 비교해서 차별받고 왕따 당한다고 불만이라면

회사를 그만두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회사는 그만두기 싫은데 상황이 불만이라면

다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욕심을 갖고 있는 겁니다.

질문자가 이런 욕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계속 불만이 생기는 거예요.

 

누가 조금만 싫은 소리를 해도

왕따시킨다고 받아들이거나 차별한다고 느낀다면

질문자가 오히려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남녀가 평등한 사회로 점점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는

100퍼센트 남녀 평등한 사회에 이르지는 못한 실정입니다.

그러나 점점 그 평등성을 확보해 가고 있습니다.

 

수치화해 보면

예전에 남녀 차별적 사회 분위기가 100퍼센트였다면

지금은 점점 줄어서 20퍼센트 정도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차별이 80퍼센트나 줄어든 긍정적인 면을 보고

남아 있는 20퍼센트의 차별을 극복할 대상으로 봐야지

불평불만을 하고만 있으면 안 됩니다.

 

수행자는 주저앉아서 불평불만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장애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봐야 합니다.

 

중도가 무엇입니까?

여전히 차별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지만

10년 전과 비교해서 나아졌음을 보는

긍정적인 관점을 기반으로 해야 합니다.

 

동시에 잔존하는 차별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조금씩 개선해 나가겠다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변화가 있어서 좋다는 긍정적 시각 위에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았다는 비판적 시각을 가질 때

자신이 괴롭지 않으면서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상생활에서의 중도입니다.